의문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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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데사드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12-08 08:03 조회1,546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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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의문부터 가져라
서예학습의 본질은 마음 가꾸기다. 서예창작은 마음 안에 감춰진 자유 찾기다. 서예 학습의 어떤 면이 마음을 가꾸게 하고 자유를 찾아 누리게 할까? 저자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마지막 책장을 넘기기 이전에 분명한 답을 찾게 할 것이다. 서예학습이 과연 그럴만한 강렬한 무기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있다. 이에 대해서도 이 책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설파하겠다. 그러므로 강권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묻는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서예창작, 자기창작의 벗과 길이 될 수 있다. 자기창작을 이끌 깊이와 넓이가 있다.
자 의문을 갖자. 의문을 갖는 것이 시작이다. 반드시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 책을 읽어야 하고, 서예창작에 돌입해야 한다. 서예창작은 그냥 되지 않는다. 어디 마음이 그냥 가꿔지겠는가. 마음 안에 오아시스 그냥 생겨나겠는가? 자유도 행복도 쉽게 찾아질 리 만무다. 의문을 갖고 붓을 다스리자. 의문을 지니고 먹을 갈고, 점 하나 찍으며, 선을 긋자. 강력한 의문은 반드시 귀한 깨달음으로 돌아올 것이다.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서예창작을 함에 있어 ‘아직 기본기도 안 되어 있는데’라고 말하지 말자. 기본이야 배우면 된다. 기본이 실천보다 상위에 있지 않다. ‘개성을 표출하기가 아직 이르다.’고 하지 말자. 이런 유약한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개성은 처음부터 드러내야 한다. 개성을 발휘할 시기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론은 이론일 뿐이야.’ 그렇게 말하지 말자. 변명이다. 게으름이다. 적극성 결여다. 그것이 바로 창작의 독이 된다. ‘취미생활인데 뭘 그렇게 전문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지 말자.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고 세월이나 흘릴 셈이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좋다.
서예창작은 소질을 타고난 사람들의 유희가 아니다. 좋은 작품 창작을 하는 작가, 창작에 적극적인 작가 누구도 소질로 하는 것을 저자는 보지 못했다. 타고난 소질 때문에 오히려 깊이 없이 겉치레만 일삼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간 작가들이 있다. ‘타고난 소질처럼 좋은 것이 없는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작정하고 이야기하겠다. 서예창작에 있어 소질이란 첫 시간부터 필요 없다. 소질이 있는 사람일수록 겉보기 좋은 글씨에서 그치고 마는 경우를 저자는 너무 많이 봤다. 일상적인 칭찬에 나태해지고 자신감에 젖어 좋은 작품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작품은 누구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지 못한다.
창작, 소질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2007년 서예평론집 『정상에 오르는 길을 찾아서』를 출간했었다. 책의 내용은 2000년부터 2002년 사이에 쓴 글들 중심이다. 당시 한국 서단의 대표적인 행사나, 작가성이 뛰어난 작가의 이면과 작품세계를 다룬 내용으로, 대부분 직접 취재하여 쓴 글을 묶은 책이다. 2003년 3월 저자의 활동처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바뀌고 나서 그 이후 쓴 글이 몇 편 추가 되었는데 또한 내용은 유사하다.
그때 저자가 인터뷰 대상에게 공통으로 던졌던 질문 하나가 있다. 타고난 소질에 관한 부분이다. 그들의 작품 어느 것도 소질이 보이기보다는, 갈고 닦은 정신세계가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역시 그랬다. 정말 단 한 작가도 본인이 소질을 타고났다고 자부하지 않았다. 의외였다. 출중한 재능을 가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작가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감히 일가를 이뤘다고 두루 인정받을 수 있는 개성 넘치는 창작을 하는 작가들일수록 손사래를 쳐가며 타고난 소질을 인정하지 않았다. 저자는 지금도 그들의 부인이 결코 겸양의 말이나 인사치레가 아니었다는 것을 믿는다.
판소리 용어에 ‘귀명창’이란 말이 있다. 한 소리 구성지게 뽑을 줄은 몰라도 소리를 들어 명창을 가릴 줄은 안다는 말이다. 귀명창들이 탄복을 하는 소리는 타고난 청(목청)으로 터트리는 목소리가 아니다. 하복부의 단전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긴장감 넘치는 통성이다. 가슴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애원성이며, 목이 쉰 듯한 수리성에 감탄한다. 피를 토하며 갈고 닦아 도달한 득음이라도 들을라치면 무릎을 치고 탄복을 하며 외마디 추임새로 답을 한다.
서예나 판소리 두 장르가 비슷하다. 타고난 소질의 풋풋함을 자랑삼지 않는다. 타고난 소질로 인해 자칫 게으름을 피우거나 기교로 빠질까 봐 거듭 조심을 한다. 타고난 소질이 빛을 발할 때가 있다. 타고난 소질이 진심으로 부러움을 받을 때가 있다. 노력과 조화될 때다. 소질이 없는 사람의 엄청난 노력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때다. 쉼 없이 뭔가를 탐구하고 맺는 경우다. 그런 작가는 의심의 여지 없이 대가이고, 대가가 될 것이다.
서예, 전통예술이다. 하지만 창작이 고전의 형식으로 한계 지어져 있지 않다. 서예창작에 한계란 없다. 하고 싶고 할 수 있다면, 평면, 입체, 추상 등 창작해보고 싶은 형식에 다 도전해봐야 한다. 창작의 주체는 자기다. 다만 단순히 시각효과를 노리는 것이나, 일회성 시도는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음을 상기하자. 부족한 부분을 감추기 위한 시선 끌기 시도는 재고에 재고를 해봐야 한다.
서예창작, 자득의 결과다. 누구에게나 깨닫는 단계가 별도로 지정된 것이 아니다. 창작력을 기르기 위해 이론과 실기를 함께 닦아 나가자. 의심나면 찾아보고 공부하고 느낀 바가 있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자. 논하고 분석하는 것에 얽매이기보다는 느낌을 중시하고 실행하자. 이론적으로 출중한 작가가 작품창작에서는 이론을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론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표현을 느낌 없이 하기 때문이다. 지식으로 하기 때문이다.
좋은 지도자, 즉 좋은 안내자를 잘 만나는 것도 복이지만 결론적으로는 자득해야 한다. 석가나 예수, 공자 등 어느 성인이 사람의 영혼을 직접 구원했는가. 진리를 믿고 선을 행함으로써 자득하여 스스로 구원받는 길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리고 성인들은 스스로 성인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자기 구원은 각자의 몫이다. 자기 창작, 자기 몫이다. 선생은 자득하도록 이끌고, 학습자는 오직 자득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교학상장이다. 서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 글은 서예가 인재 손인식이 2016년 초 출간 예정인 책,
<일필휘지 자기 창작> 제5장 부분입니다.
댓글목록
손형근님의 댓글
손형근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자~알 읽고 갑니다...나타태해지고 고치세요^^
sozon님의 댓글
sozon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지만 여전히 "나는 소질이 없어"라는 생각을 버릴 수 가 없습니다.
노력이 부족한 것이 겠지요? 오랫동안 임서에 길들여져서 일까요. 본인이 창작을 했다고 생각한 작품도 한걸음 뒤에서
보면 어디선가 본 듯 한 작품 같기도 하고 또는 부끄러운 졸작에 졸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력이 부족한 것이겠죠?
이도님의 댓글
이도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99프로의 노력과 1프로의 영감 ! 감사합니다.
데사드림님의 댓글
데사드림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경지에 오셨군요.
99% 영감 1% 노력으로
창작이 가능 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