돗자리 깔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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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2.♡.46.18) 작성일22-06-19 21:24 조회4,700회 댓글1건본문
마르셀 이야기
나와 관계 있는 남자들, 특히 가족관계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6월이나 7월생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대부분 11월에서 12월 또는 1월생이다.
마르셀과 차차와 다섯 살 터울의 남매다. 마르셀 생일은 6월 5일. 통계적으로 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누나 차차는 9월생. 혼자 동떨어져 있어 나랑 처음 알게 되었던 15년 전에 나랑 잘 못지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제 고등학교 다니는 차차는 내 딸, 마르셀은 아들과 다름없다. 하지만 오해는 피해야겠다. 두 아이의 엄마 메이는 남이다. 정말루.
마르셀은 특별한 아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메이가 마르셀을 가졌을 때 스스로 임신사실을 몰랐다. 영업을 나갔다가 너무 자주 졸도해서 종합검진을 받도록 했다. 그 과정에 좀 문제가 있었다. 첫 문제는 종합검진을 진행한 끌라빠가딩의 미트라 끌루아르가 병원(Rs. Mitra Keluarga)에서 너무 많은 검사를 시켰다는 것이다. 소변검사, 피검사, X-레이 촬영까지 한 후에도 의사는 내시경 검사를 권했다. 그래야만 왜 메이가 자꾸 졸도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처음 검사를 시작할 당시 메이가 5년쯤 전 자궁근종 제거 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의사에게 말했는데 어쩌면 그래서 더 많은 검사를 받도록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많은 비용을 지불한 상태에서 지금까지의 비용을 다 합친 금액의 두 배가 넘는 내시경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메이가 먼저 손을 들고 더 이상 검사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 비용을 지불하는 나에게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그 병원의 의사는 검사를 마저 받지 않으면 병명을 알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그렇게 중단하고 말 일은 아니어서 난 메이를 설득해 조금 작은 다른 병원에서 한 번 더 진단을 받아보도록 했는데 그곳 의사는 메이를 문진한 후 대대적인 검사 대신 임신진단키트를 내밀었다. 결과는 양성. 미트라 끌루아르가 병원에서 그 많은 검사를 하고서도 임신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알고도 나머지 다른 검사들을 일부러 강행시킨 거란 심증이 강했다. 말로만 듣던 영리병원의 폐해를 직접 체험한 것이다.
난 어이가 없었고 메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혼모 상태에서 둘째를 낳고서도 여전히 그 위상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임신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자궁근종이나 저혈압 또는 다른 질병 때문이라 생각한 메이가 온갖 독한 약들을 처방도 없이 복용했다는 것이었다. 태아에게 치명적인 약들이었으므로 분명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이 있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차마 아기를 떼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메이는 오히려 자긴 기어이 아기를 낳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여러 번 찍은 태아 초음파 사진은 뚜렷하진 않았지만 사뭇 심상치 그림이 잡히곤 했다.
예상대로 출산은 순탄치 못해 결국 제왕절개수술을 해야 했는데 메이와 가족들은 물론 나중에 당시 상황을 전해들은 나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가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걸 제왕절개를 해서야 알게 된 것이다. 마르셀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흠결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로 태어났지만 마르셀의 형 혹은 누나가 되었을 또 다른 개체는 눈 만 형성되었을 뿐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핏덩어리 상태로 죽은 채 세상에 나왔다. 마치 엄마가 복용한 모든 약들의 독성을 그 아기가 홀로 모두 흡수하여 마르셀을 지켜낸 것처럼 보였다. 난 마르셀이 이 세상에서 두 사람의 몫을 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고 믿게 되었다.
마르셀의 특별한 점은 성장과정에서도 보였다. 잘 생긴 남자아이로 자라난 마르셀은 5~6세 즈음에 가르쳐주지도 않은 한국말을 툭툭 꺼내곤 했다. 물론 간단한 단어들이었지만 난 마르셀이 그걸 누구에게 배웠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중팔구 누나 차차가 보는 유튜브에서 나온 단어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셀의 대답은 전혀 의외였다. 꿈속에 어떤 할아버지가 종종 나타나 같이 놀아주며 한국말을 한 마디씩 가르쳐 주더란 것이다. 난 웃어 넘겼다. 그럴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후에도 마르셀은 여전히 가르쳐주지 않은 한국말을 한 마디씩 더했다.
물론 그런 일은 마르셀이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잦아지다가 결국 중단되었다. 하지만 난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마르셀에게 있었던 이상한 일은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난 인도네시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셔 와 제사를 지내기로 마음먹고 두 분의 영정을 준비했다. 노년에 치매로 돌아가신 할머니와 달리 젊은 날 징용을 갔다가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징용 가기 직전인 30대 초반에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 속 할아버지는 영리하고도 장난기 넘치는 표정에 날렵한 턱선을 하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본 마르셀이 이렇게 말했다. “어, 이 사진, 내 꿈속에 나오던 그 할아버지랑 똑같이 생겼네.”
소름이 쫙 끼쳤다. 난 사진을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할아버지, 얘 꿈 속에 들어가서 도대체 뭘 하신 거에요?”
마르셀이 어릴 때 꿈 속에서 한국말 가르쳐준 사람이 내 할아버지였다고? 왜? 어떻게? 더욱이 사진 속 할아버지는 나랑 족보가 할아버지일 뿐 영락없는 청년의 모습이었는데 마르셀은 왜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인식했던 걸까? 어쨋든 마르셀의 기억이 맞다면 내 할아버지는 왜 당신 친손주, 증손주 다 놔두고 왜 마르셀 꿈에 놀러가셨던 걸까?
간단히 웃어넘길 만한 일을 내가 심상치 않게 받아들인 이유는 따로 있다. 마르셀이 세 살쯤 되어 이제 말을 꽤 잘 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2013년쯤의 일이다. 그해 말에 릴리의 술라웨시 니켈 광산에서 엄청난 양의 니켈 원석 수출이 이루어졌는데 그래서 그해엔 나도 자카르타 일을 메이에게 맡기고 자주 광산을 오가며 릴리 일을 돕곤 했다.
그해 7월쯤 끈다리와 꼬나웨 지역에 수십 년 만의 폭우로 큰 물난리가 났는데 그 직후 자카르타에서 날아가 그곳 광산을 다닐 때 논들은 여전히 물에 잠겨 있었지만 산 윗쪽 도로는 바짝 말라 있었다. 그길을 릴리가 내준 토요타 하이룩스 더블캐빈 트럭을 운전수 대동하여 산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앞서 가던 트럭이 흘린 것인지 굵은 모래가 바짝 마른 비포장 도로 위에 잔뜩 깔려 있던 곳에서 사고가 벌어졌다. 운전사가 브레이크를 살짝 밟는 순간 트럭 바퀴가 미끄러진 것이다.
하필이면 산악지형의 중턱 부분을 깎아 만든 도로였으므로 오른쪽은 절벽처럼 가파른 경사길이어서 자칫 트럭이 도로를 벗어나 경사길로 굴러 떨어질 참이었다. 하지만 그 좁은 도로 위에서 두 바퀴쯤 회전한 트럭은 다행히 도로 한 가운데에서 사뿐히 멈춰 섰다. 그 사건이 벌어지던 중엔 다들 ‘어~어~’하며 당황했지만 트럭이 멈춰선 후 비로소 우리가 방금 황천길 직전까지 갔다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 그게 화요일 오전 11시쯤 벌어진 일이었다.
그 다음 주 자카르타에 돌아와 다시 원래의 일을 하던 중 내가 운전하는 차량 조수석에 앉은 메이가 이런 말을 했다. “마르셀이 요즘도 그 할아버지 꿈을 자주 꾸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해요. 지난 주에도 방에서 낮잠을 자다가 나와서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파파 배는 아무 일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요. 참 뜬금없죠?”
메이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데 난 뭔가 짚히는 게 있었다. “그게 언제 일인데?” 잠시 기억을 되짚던 메이는 화요일 낮의 일이라고 답했다. 화요일 낮이라면 그날 내가 탄 트럭이 꼬나웨 광산가던 길에 절벽 위 도로에서 두 바퀴 회전했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아직 그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던 때의 일이다. 그 사건에 대해 누구에게도 얘기해 준 적이 없는데 그걸 수천 킬로 미터 떨어진 곳의 마르셀이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난 마르셀이 모종의 신통력을 타고 난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커가면서 마르셀은 그런 이상한 능력을 더 이상 발현하지 않았고 언젠가부터 꿈속 할아버지는 점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다가 완전히 멈추고 말았다. 어릴 떄 곧잘 말하던 한국어 단어들도 다 잊어버렸다. 마르셀은 평범한 개구장이로 성장했는데 난 한편으론 다행스럽다고 여겼다. 특별하다고 해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니까.
난 기이한 상황 속에서 무사히 태어나 범상치 않은 유아기를 보낸 마르셀이 가끔 형편없는 학교성적표를 가져와 메이에게 혼나고, 내가 차차에게 한달에 두 권씩 서점에서 사주는 책들에 손도 대지 않는 것에 실망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공부는 적성이 아닌 모양이다. 건축설계사가 되겠다는 누나와 달리 마르셀은 군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 난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물론 군인보다 다른 것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싱가포르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어 있는 아들은 어린 시절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했다. 마르셀 역시 꼭 군인이 아니더라도 가족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마르셀은 6월생이어서 얼마전 생일이었다.
원래는 매년 그랬던 것처럼 생일날 또는 그 전후에 날을 잡아 식당에서 메이와 아이들을 불러 생일케익을 자르고 식사하는 일정을 계획했었다.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았던 것은 마르셀 생일 직전 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한국에서 받았기 떄문이었다. 당장 다음날이라도 한국에 날아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자카르타에서 일정 대부분을 취소했고 그 사이에 용건이나 용역이 걸려있는 거래선들에게는 양해를 구했다.
마르셀의 생일 저녁식사도 일단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연락받은 어머니 상황이 유동적이어서 바로 출발할 수 없었다. 한국에 일단 가면 오래 있을 수 없고, 한번 갔다오면 두 번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은 코로나 방역 시스템이 여전히 적용되어 내가 가더라도 어머니를 직접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루거나 중단해 놓은 자카르타 일을 당장 재개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 상태가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과 저녁식사 약속을 만드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언제 한국에 갈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르셀의 생일축하 저녁식사를 마냥 미룰 수 없었다.
난 마르셀의 생일선물을 준비해 보내면서 내가 없더라도 가족들끼리 저녁식사를 하라고 메이에게 전했다. 관련 비용도 보내줄 요량이었다. 하지만 메이는 마르셀이 원치 않는다면서 두 번이나 내 제안을 거절했다. ‘할머니’ 건강이 위독한 상태에서 먹고 마시는 파티를 할 수 없다며 마르셀이 극구 반대했다는 것이다. 차차에 비해 아직 어린애라고 생각했던 마르셀이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6월 15일(수) 아침 마르셀의 초등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원래 온라인으로 하려던 것이 오프라인으로 급조되었는데 5년 전 차차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비해 너무나 조촐한 자리였다는 얘기를 듣고 의기소침했을 마르셀이 안쓰러웠다. 어머니 상태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우울해하고 해야할 일들을 중단하거나 미루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곧바로 저녁식사를 급조해 메이와 아이들을 한국식당으로 초대했다. 메이의 집에서 요양하고 있는 메이의 어머니도 함께 불러 마르셀의 생일과 초등학교 졸업식을 함께 축하했다. 무척 좋아하던 마르셀을 보면서 내 사정 때문에 이날 할 일을 더 이상 미루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내 방 한쪽에 비치해 놓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보고 빙긋이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 마르셀 쟤를 손주 삼고 싶은 거죠?” 그렇게 물었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대답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만 품고 있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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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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