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 양승윤교수 강연 - 왜 인도네시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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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11-01 12:28 조회4,260회 댓글1건본문
인도네시아 헤리티지 재단 코리아 섹션 주최로 2016년 10월 29일(토) 오전 10시 스나얀 센트랄 제1 빌딩(Senayan Sentral I) 17층 헤리티지 도서관에서 열린 이 날 강연에서 양승윤 교수님은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 - 왜 인도네시아인가?' 라는 주제로 두 시간 남짓 강연을 하셨습니다.
양승윤 교수의 이름을 많이 들어봤고 그분이 쓴 저서도 여럿 읽어 보았습니다.
양교수님은 예전부터 명망높은 교수였고 인도네시아에 와서 일하고 사는 동안 그분의 일생의 학문과 성취가 일궈낸 일종의 큰 그림자가 우리 주변 어딘가에 늘 드리워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작 처음 대면한 양교수님은 인터넷에서 접했던 사진보다 더 나이드신 노인이 되어 있었고 그분의 위상도 '동남아학 명예교수로 일선에서 한발 물러선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표정이나 언변에서 묻어나오는 중후함은 가히 압도적이었고 번득이는 유머와 정열적인 눈빛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교민사회 지도층이나 꽤 이름이 난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헤리티지 소사이어티 코리아섹션 이수진 회장
강희중 한인회 수석부회장
삼성전자 이강현 부사장
데일리인도네시아 신성철 사장
문화강연으로서는 적지않은 숫자인 60명 정도가 참석해 강연을 듣는 좋은 분위기였습니다. 물론 이런 훌륭한 강연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야 한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감명깊은 강연이었습니다.
강의는 왕오천축국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인연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는 서유기에 등장인물이기도 한 '삼장'이란 법호를 당나라 측천무후로부터 받은 의정(중국명 이징)의 발자취를 따라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움직이면서 인디아를 다녀오는데 총 1만자 정도인 전체 기록물 중 약 40% 정도가 마모되어 망실된 상태라고 합니다. 이 마모부분은 주로 기록물의 앞쪽부분인데 의정의 뒤를 따랐다면 아마도 이 부분은 스리위자야 왕국에 대한 기록이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스리위자야 왕국은 인도네시아에서 약 700년간 이어져왔던 불교왕국이었습니다. 물론 기록이 망실되어 유추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혜초가 스리위자야 왕국을 방문했을 개연성은 매우 큽니다.
두번째 인연은 고려인삼에 대한 부분입니다. 양교수님은 그 예를 베트남 국어대사전에서 찾았는데 거기 인용된 문구 중엔 '고려 인삼밭을 밟은 새 발목을 잘라 담근 술'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고려는 일본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던 반면 실크로드를 통한 동남아와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와도 어떤 식으로든 교류를 했을 것입니다.
세번째 인연으로 양칠성을 들었습니다. 일본명 야나가와 시치세이, 인도네시아 이름으로는 Kumarudin(어둠을 밝히는 별)이었던 그는 일본군이 되어 인도네시아에 들어와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일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으나 이미 인도네시아인과 결혼해 처자도 있었고 전범으로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 해 인도네시아에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에 뛰어 들어 싸우다가 1948년 Garut에서 네덜란드군에게 처형되었는데 당시 처형당한 외국인 3명(일본인)들을 기억한 동료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유해는 Garut에서 Kalibata의 국립묘지로 옮겨왔고 다시 한 여류 일본인 역사학자의 도움으로 야냐가와 시치세이의 이름은 일본식 이름이 아니라는 점이 확인되어 훗날 양칠성이란 신원이 확인된 경우입니다.
마지막으로 든 네번째 인연은 1962년 12월 동경에서 있었던 김종필과 수까르노의 첫 만남을 꼽았습니다. 1960대의 인도네시아는 반미 비동맹 노선을 주도하는 중이었고 1964년엔 김일성이 UI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등 인도네시아와 북한의 관계는 돈독한 형제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훗날 김-오히라 메모 사건으로 알려진 일본의 전후배상 관련 비밀협상을 위해 동경에 와 있던 김종필이 KODECO 최계월 회장의 주선으로 수까르노를 만나 마침내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외교물꼬를 처음으로 트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 인도네시아 총영사부가 설치되어 첫 총영사로 수깜또 대령, 두번째로는 벤니 무르다니 장군(당시 대령)이 총영사를 역임하며 지한파 인사가 되었고 1973년 마침내 대사관계로 발전해 사르워 에디 장군이 초대 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의 설명은 아마도 마지막 인연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보였습니다.
양교수님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 특히 남북한 통일문제에 있어 인도네시아만이 적극적인 호의로서 이를 도와주려는 의지와 그럴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유일한 나라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인도네시아가 남북한과 대사관계를 수립하고 있는 것은 물론 '한반도 대사'직제를 가지고 있는 세계 유일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후 첫 외빈은 중국 시진핑도 아닌 인도네시아 유도요노 대통령이었던 만큼 인도네시아는 전통적으로 북한과 가까운 나라입니다.
한편 수하르토가 대통령이 된 후 서로 육군소장시절 쿠데타를 통해 군사정권을 수립한 국가원수로서 박정희와 동질감을 가졌고 특히 반미, 경제개발 우선정책이라는 점에서도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외교력은 캄보디아 킬링필드 학살 당시 알리 알라타스 인도네시아 외상이 캄보디아의 4개 파벌을 인도네시아로 불러들여 중재함으로써 학살상황을 종결시켰다는 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양교수님은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배경과 과정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양교수님은 한국과 인도네시가가 서로에게 가진 감정, 인상과 서로의 위상을 다음과 같은 부분으로 설명했습니다.
1. 인도네시아는자카르타-반둥간 고속전철을 일본에게 줄듯 하다가 결국은 막판에 중국에 넘기는 수완(?)을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불법조업 중국어선을 격침시키기도 하는 외교적 배짱을 가진 나라다.
2. 한국이 가장 선호하는 외국노동력은 인도네시아 노동력이다(이직률 가장 낮음)
3. 한국은 인도네시아에게 있어 negera yang aneh 즉 '신기한 나라'이다. (그러나 원래는 '이상한 나라'라고 말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한국은 만만하기도 하고 뭔가 수틀리면 단번에 끊어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아쉽지 않은 나라이기도 하다.
4. 인도네시아는 50대 주부 행복도 1위의 나라 - 이는 가족중심, 주부 중심의 인도네시아 사회는 여성우위사회라 여겨질 부분이 있으며 그 중심의 50대 여인은 가장 존중받는다 (물론 난 이 부분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충분히 이해되기도 합니다)
5. 평균연령으로 보아 한국은 42세, 일본 48에 비해 인도네시아는 28세인 젊은 나라.
인도네시아는 잠재력이 큰 문화대국이며, 우리가 어떻게 인도네시아에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신성철 대표의 질문에 대해 우리가 현지 대학의 한국어과 학생들, 인도네시아 인들을 잘 도와 그들이 지한파, 친한파가 될 수 있도록 키워나가자며 강연을 맺었습니다. 양교수님은 20억원 규모의 재단을 만들어 한국을 공부하는 인도네시아 석사과정 학생들의 등록금을 지원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하신다고도 합니다.
노교수님의 강연 잘 들었습니다.
2016.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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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HS헤리티지님의 댓글
IHS헤리티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정말 글 잘 쓰셨습니다. 이수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