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하르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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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10-17 13:15 조회3,276회 댓글5건본문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전대통령 (1)
요약
수하르토는 1921년 6월 8일 출생하여 2008년 1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도네시아군의 지휘관이자 1967년 수카르노를 몰아낸 후31년간 인도네시아 대통령 권좌를 지킨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는 족자 인근 고데안(Godean 지역에 속하는 꺼무숙(Kemusuk) 마을에서 태어났을 당시는 바아흐로 네덜란드 강점기의 한가운데였다
그는 빈한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의 무슬림 부모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않아 이혼했으므로 유년시절 대부분을 양부모와 함께 지냈다. 그는 일본 강점기 당시 PETA에서 근무했고 독립전쟁이 터진 후엔 막 구성된 인도네시아군에 합류해다. 그는 인도네시아 독립 후 승승장구하며 소장 계급을 달았는데 1965년 9월 30일 실패로 끝난 공산 쿠데타 와중에서는 진압군으로서 쿠데타군과 맞섰다. 그의 부대는 그후 벌어진 반공숙청 작업을 진두지휘했는데 CIA 문서에서는 이 사건을 20세기 들어 가장 잔혹한 집단학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를 기화로 수카르노부터 정권을 빼앗았다.
그는 수카르노를 대신해 1967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전임대통령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반수카르노화’라 불리게 되는 사회운동을 일으켰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내내 수하르토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확고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신질서 정부의 권위주의와 만연한 부패로 인해 마침내 국민이 분통을 터트리게 되었고 극심한 금융위기로 사회적 불안이 확산되자 마침내 1998년 5월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그가 31년간의 철권통치를 통해 남긴 유산에 대해선 인도네시아 국내외에서 아직도 논란이 일고 있다. 가난하지만 엄청난 다양성을 가진 인도네시아를 안정적으로 운영한 능력과 확고한 반공 스탠스가 냉전기간 동안 서방의 경제적, 외교적 지원을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 그의 임기 중 인도네시아는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이루었고 건강, 교육, 생활수준의 지표도 모두 향상되었다. 그에게 국가영웅의 지위를 주는 것을 인도네시아 정부가 검토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국민적 열띤 논쟁이 오가는 이유는 국제 투명성기구(TI)가 밝힌 바처럼 그는 현대 세계역사상 가장 부패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기간 중 150-350억 달러를 빼돌렸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유년기
수하르토는 네덜란드 강점기인 1921년 6월 8일 고데안(Godean) 마을의 일부를 이루는 꺼무숙(Kemusuk) 촌에서 태어났다. 족자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그의 부모는 모두 자바인으로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아버지 꺼르토수디로(kertosudiro)는 앞서 결혼에서 두 명의 자녀를 얻었고 수하르토가 태어나던 당시 마을에서 관개시설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지만 대나무를 엮은 벽으로 세워진 집에 살 정도로 빈곤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수끼라(Sukirah)는 하멩꾸부워노 5세의 첫 번째 후궁의 먼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수하르토의 어머니는 그를 낳고서 신경쇠약에 시달렸으므로 수하르토는 태어난 지 5주 후 부터 큰고모인 끄로모디르요(Kromodirjo)의 손에 자랐다. 꺼르토수디로와 수키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한 후 각각 재혼했다. 수하르토가 친모에게 돌아간 것은 그가 세 살 때의 일로 당시 그의 어머니는 부락의 다른 남자와 재혼한 상태였다. 수하르토는 새아버지의 집에서 논농사를 거들었다. 1929년 수하르토의 아버지는 그와 농업감독원인 쁘라위로위하르죠(Prawirowihardjo)에게 결혼한 그의 누이를 워노기리(Wonogiri) 지역의 가난하고 소출이 적은 우르얀토로(Wuryantoro)라는 마을로 함께 데려갔다. 그로부터 2년 후 계부와 함께 꺼무숙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친부의 손에 이끌려 우르얀토로로 가는 등 거쳐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꺼무숙(Kemusuk)의 수하르토 박물관
고모부인 쁘라위로위하르죠는 수하르토를 자기 자식처럼 키우려 했으므로 그에게 부성을 느낀 수하르토는 우르얀토로에 정착하여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1931년 워노기리 시내의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처음엔 쁘라위로하르죠의 아들 술라르디(Sulardi)와 함께 살다가 나중엔 아버지의 친척인 하르죠위요노 (Hardjowijono)의 집에 살면서 다르야트모 (Daryatmo)라는 두꾼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의 경험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나중에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자신의 주변에 강력한 부적을 두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워노기리에서의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겨 수하르토는 다시 꺼무숙의 아버지에게 보내져 1939년까지 등록금이 싼 족자의 무함마디아 중학교를 다녔다. 두꾼과 관계를 맺은 후 정통 이슬람학교로 전학하게 된 셈이니 수하르토는 청소년 시기에 무속과 종교 사이에서 모종의 갈등을 겪었음 직하다.
자바의 많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는 오직 한 단어로 된 이름만을 가졌다. 후년에 그가 하지 모하마드 수하르토(Haji Mohammad Suharto)라고 불린 것은 메카순례를 다녀온 후 붙여진 종교적 의미의 호칭일 뿐이다. 수카르노의 이름이 수카르노였던 것처럼 수하르토 역시 수하르토라는 이름 하나만을 가지고 있다. Suharto라는 철자는 현대문법을 따른 것으로 그가 태어날 당시엔 Soeharto라는 철자를 썼고 그 스스로 훗날에도 이 옛 표기법을 선호했다. 따라서 외국 기사에서는 발음되는 바에 따라Suharto라고 쓰인 것이 많은 반면 인도네시아 정부문서나 현지 미디어에서는 Soeharto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수하르토의 성장배경에는 수카르노 같은 다른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가졌던 반제국주의에 대한 관심이나 정치사상의 영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직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 더욱 몰입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수카르노와 그 친구들이 바타비아나 수라바야 같은 대도시를 배경으로, 또는 네덜란드 유학시절 도중 그랬던 것과 달리 철저히 촌에서만 살았던 수하르토는 유럽 식민주의자들과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 네덜란드어나 다른 유럽 언어를 배울 기회도 갖지 못했다. 그가 네덜란드어를 배우게 된 것은 1940년 네덜란드군에 입대한 후의 일이다
군시절
수하르토는 18세에 중학교를 마치고 우르얀타로의 한 은행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자전거 사고로 근무복이 찢어지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는 사직을 강요당했다. 백수가 된 그는 등 떠밀리듯 1940년 6월 네덜란드령 동인도군인 KNIL에 자원 입대하여 족자 인근 곰방(Gombang)의 훈련소에서 기본군사훈련을 받았다. 네덜란드 본국은 독일군에게 강점당하고 태평양에서는 일본군이 병참로를 차단하고 있었으므로 KNIL은 예전엔 입교를 허락하지 않았던 자바인들에게 문호를 넓혀 실전에 투입할 병력을 확보하려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수하르토는 람빠이(Rampai)의 제8대대로 배속되어 곰방의 KNIL Kaderschool이라는 군사학교에서 간단한 훈련과정을 마친 후 하사관으로 임관했고 곧 찌사루아(Cisarua)의 KNIL예비대대로 배속되었다. (사진: KNIL 하사관 시절 수하르토, 출처: http://soeharto.co/dari-zaman-knil-ke-zaman-peta)
그러나 허무하게도 1942년 3월 네덜란드가 일본군에 항복하자 수하르토 KNIL 군복을 벗고 우르얀토로로 돌아갔다. 몇 개월간 빈둥거린 그는 다른 수 천명의 인도네시아인들과 함께 이번엔 일본군이 조직한 치안부대인 족자 경찰군에 입대했다. 그는 1943년 10월 일본이 새로 조직한 민병대 PETA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에서는 네덜란드 동인도군과는 달리 인도네시아인이 장교로 선발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는 소대장급인 쇼단쬬 양성과정에서 일본의 무사도를 접하게 된다.비록 일본군의 보조부대 성격이었으니 이 PETA 훈련과정을 통해 장병들은 네덜란드에 대한 적개심과 민족주의 정신을 함양했다. 이러한 민족주의와 군국주의를 처음으로 접하면서 수하르토는 큰 사상적 영향을 받게 된다.
수하르토는 족자 남부 와떼스(wates)의 PETA 해안방어대대에 배속되었다가 곧 쭈단죠(중대장) 교육과정에 선발되어 1944년 4월부터 8월까지 보고르에서 해당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후 그는 수라카르타, 자카르타, 마디운 등지에서 PETA 신병들을 훈련시켰다. 1945년 8월 일본이 마침내 항복하고 자카르타에서 독립선언이 낭독될 당시 수하르토는 윌리스산 기슭 브레벡(Brebeg)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1945년2월 쇼단쬬 수쁘리야디가 이끌던 블리타르 지역 PETA 부대가 일으킨 반란이 진압된 후 당시 체포되어 처형당한 하사관들을 대신할 병력들을 훈련시키던 중이었다.
독립전쟁
일본 항복 이틀이 지난 후 독립지도자 수카르노와 하타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신생 공화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선임되자 수하르토는 일본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연대를 해산시키고 족자로 낙향했다. 그러나 공화국 지지자들이 귀환하려는 네덜란드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시류를 타고 수하르토도 새로 구성된 인도네시아 군대에 합류했다. PETA에서의 경력으로 인해 그는 곧바로 부지휘관 보직을 받았고 1945년 10월 공화국군이 정식으로 구성되자 대대장으로 선발되어 마글랑과 스마랑에서 연합군과의 전투에도 참전하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야전부대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으면서 독립전쟁 초기에 자기 지역의 무장세력을 규합해 제1연대 제10대대로 조직하여 제10대대장이 되었다.
인도네시아를 전쟁 전 상황으로 되돌리라는 명령을 받은 연합군이 상륙하자 공화국군은 연합군, 즉 돌아온 네덜란드군과 그들을 돕는 영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수하르토는 자신의 제10대대 병력을 이끌고 1946년 5월 17일 네덜란드 T(타이거) 여단의 진출을 저지했다. 이를 눈여겨본 수나르토 꾸수모디르요(Sunarto Kusumodirjo) 중령은 수하르토를 불러 전쟁지휘사령부 운영안을 만들도록 했다. MPP라고 불리는 전쟁지휘사령부는 인도네시아 정부군의 명령체계를 조직하고 통합하기 위해 조직된 곳이었다. 아직 초창기의 인도네시아군은 몇 번씩이나 그 전체 조직을 재구성해야 했다 1946년 8월 수하르토는 제3사단(디포네고로 사단)의 제22연대장의 보직을 맡았고 그해 후반엔 족자의 서부와 남서부를 네덜란드군으로부터 방어하는 책임을 맡게 된다. 네덜란드 측 정보통에 따르면 당시 공화국군 상황은 매우 열악했고 수하르토 자신도 부대를 지탱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역내의 아편 밀수조직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1948년 9월 수하르토는 마디운에서 공산당 봉기를 일으킨 인도네시아 공산당 당수인 무쏘(Musso)를 만나라는 명령을 받지만 평화협상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1948년 12월 네덜란드군이 끄라이 작전을 통해 수카르노, 하타 등 공화국군 수뇌부를 나포하고 공화국 수도 족자를 손에 넣은 후 수하르토는 두 개 대대로 이루어진 Wehrkreise III을 이끌고 족자 남쪽 구릉지대에서 네덜란드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9년 3월 1일에는 회심의 족자총공세를 벌여 수하르토의 부대와 현지 민병대가 족자를 탈환해 정오까지 점령하기도 했다. 수하르토는 훗날 이 작전이 자신의 업적인 것처럼 말했지만 다른 정통한 정보에 따르면 족자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 제3사단 사령관 등이 공격을 명령했음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압둘 하리스 나수티온 장군은 수하르토가 그 총공세 준비에 지대한 공을 들였다고 증언하였다. 시민들도 이 작전에서 공화국군의 목적에 동조하여 힘을 보여줌으로써 네덜란드군이 게릴라전에서 승리하지 못했음을 증명해 보이는 데에 일조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네덜란드가 공세를 멈추고 협상을 시작하라 권고했고 결과적으로 네덜란드군이 1949년 12월 족자에서 철수하게 된다. 수하르토는 1949년 6월부터 철수하는 네덜란드군으로부터 족자를 인수받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사진-독립전쟁 당시 수하르토 대령, 출처: http://presidentsuharto.blogspot.com/p/indonesian-national-revolution-military.html)
독립전쟁 기간 동안 수하르토는 솔로 망꾸느가란 봉국 왕실의 말단 귀족의 딸 시티 하르띠나(Siti Hartinah – 후에 띠엔 부인 Madan Tien으로 불림)과 결혼했다 중매로 이루어진 이 결혼은 띠엔 부인이 사망하는 1996년까지 이어졌다. 그는 여섯 자녀를 두었는데 1949년엔 시티 하르디얀티(Siti Hardiyanti – 후에 뚜뚯 Tutut이라 불림), 1951년 시깃 하르요주단토(Sigit Harjojudanto), 1953년 밤방 뜨리핫모죠(Bambang Trihatmodjo), 1959년 시티 헤디아티(Siti Hediati – 후에 띠띡 수하르토 Titiek Suharto라 불림), 1962년 후또모 만달라 뿌뜨라(Hutomo Mandala Putra – 후에 또미 Tommy라 불림), 그리고 1964년 시티 후따미 엔당 아디닝시(Siti Hutami Endang Adningsih-후에 마믹 Mamiek이라 불림)이 그들이다. 자바의 상류사회에서 아내가 작은 상업행위를 통해 집안에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은 흉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띠엔 부인과 그녀의 자녀들, 손주들이 훗날 벌이게 되는 가열찬 상업행위는 결과적으로 수하트토의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가장 큰 치부가 되었다.
수하르토 가족
뚜뚯(왼쪽), 시깃(가운데), 씨티 헤디아티(우측)
밤방(왼쪽), 또미(가운데), 마믹(오른쪽)
독립전쟁 후 군경력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수하르토는 정규군에 남아 주로 자바섬에서 보직을 받아 근무했다. 그는 1950년 대령으로 가루다 여단을 이끌고, 안디 아지스의 반란으로 시작되는 마카사르 반란진압에 참여했다. 이 반란은 예전 식민지 군대인 KNIL 군인들이,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가 그사이 괴뢰국가로 세워놓은 동인도네시아 주국(洲國)과 연방제를 지지하며 중앙정부를 상대로 일으킨 무력저항이었다. 그가 마카사르에 주둔하는 동안 여러 유력한 인사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하비비 가족이었고 그 집 큰아들 BJ하비비(BJ Habibie)는 훗날 그의 마지막 부통령이 되어 그의 하야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1951-1952년 사이엔 중부자바로 무대를 옮겨 끌라뗀(Klaten) 지역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에 영향을 받은 426 대대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1953년 네 개의 대대를 지휘해 중부자바 북서부에서 다룰이슬람 반군과 싸웠고 머라삐 화산(Mount Merapi)에서는 방범치안활동에 참가했다. 그는 부내 내의 좌파척결에도 앞장섰다. 그의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이슬람 극단주의와 공산당을 깊이 혐오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고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그는 스마랑에 사령부를 둔 디포네고로 사단의 지휘관이라는 요직을 맡게 된다. 이는 족자를 비롯한 중부자바를 관할하는 부대였다. 나중의 그의 대통령 임기 내내 이어지는 유력한 사업가 림 시우 리옹(Liem Sioe Liong), 봅 하산(Bob Hasan)과의 교분이 이때 중부자바에서 맺어졌다. 이 시기에 그는 군활동을 위한 예산이 극히 빈약했으므로 수하르토는 이를 지원한다는 일차적인 목적으로 몇몇 ‘이윤을 창출하는’ 회사에 발을 담궜다가 1959년 군 반부패 조사단이 밀수 스캔달에 연루된 수하르토의 혐의를 잡아냈다. 이로 인해 그는 사단장 보직에서 해임되어 반둥 소재 육군참모 및 지휘관 학교(Seskoad)로 전근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반둥에서 오히려 준장으로 진급했고 1960년 말에 육군 부참모총장의 자리로 승진했다는 사실은 그의 저력과 수완을 보여준다. 1961년 3월 6일 그는 새로 창설된 육군전략예비사령부 (KOSTRAD)의 사령관직까지 맡게 된다. 이는 자카르타에 사령부를 둔 즉각대응 공중기동부대였다.
(사진-알리 무르토포, 출처: https://ebooks.gramedia.com/id/majalah/tempo-english/ed-1360-14-20-oct-2013)
1962년 1월 수하르토는 다시 소장으로 진급하여 마카사르에 육해공 통합사령부를 둔 만달라 작전 지휘관으로 선발되었다. 이는 네덜란드가 서부 파푸아를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별도의 국가로 독립시키려던 시도에 맞서 이 지역을 병합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주관하는 곳이었다. 1965년에는 새로 막 구성되던 말레이시아 연방에 맞선 수카르노의 대결정책 작전사령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대결정책으로 인해 자바의 방위가 약해지고 2백만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발호를 우려하여 KOSTRAD의 정보장교 알리 무르토포(Ali Murtopo)를 시켜 영국 및 말레이시아와 비밀 접촉을 갖게 했다.
2018.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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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an123님의 댓글
Awan123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뷰티시안님의 ...또 하나의 멋진 장편글이 만들어질것을 손꼽아 기다려 봅니다
개인적으로 10년전 미팅이 있어 직접 만나본 ..저 막내딸 (당시 제가 듣기론 이름이 "미믹" 이었습니다 ^^) 키도 크고 상당히 미인 이었습니다 ( 저 사진과는 좀 차이가 있네요^^)
찔릉시에 있는 따만부아 "머카사리" 라고 있는데 ....소유권자가 미믹이었고(수하르토 시절 주셨겠죠 ^^) ...그 땅의 크기가 정말 엄청났었던게 기억납니다 ( 죠니뎁의 촬리와 초컬릿공장 영화가 생각나게하는 환경이었어요^^)
혹시 멜론을 직접 고르고 ...손으로 따서 드시고 싶으시면 꼭 들려보세요 ^^
구글맵에서 보실수 있습니다
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머카사리는 몇년 전에 찌부부르 통해 들어가본 적 있습니다. 그게 이미 찔릉시 지역이었군요.
엄청난 크기의 유원지여서 그때까지 모르고 지냈다는 게 새삼스러웠어요.
머카사리 스티커를 아직도 차에 붙이고 다닙니다^^
Awan123님의 댓글
Awan123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앗 !..... 그 머카사리 스티커^^ 예전에 저도 근 1년간 차 뒤에 붙이고 다녔는데 ^^ ..
구글맵에서 보시면 머카사리 전체면적의 1.5배되는 땅이 그 뒤로 붙어 있는데 그 땅도 미믹 소유이고 말레이시아 모 회사에게 장기 임대를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토지 촬영을 거의 일주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Musicman님의 댓글
Musicm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수하르토 시절을 직접 경험하고, 그 뒷 얘기들을 더 잘 아는 분들이 많으니 이 글을 쓰면서 좀 뒷덜미가 캥기지만 여러분들의 지적과 지도편달을 받아 일단 신질서시대를 한번 훑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