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 바나나, 나무 or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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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unhyup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3-01 20:46 조회1,204회 댓글0건본문
바나나, 나무 or 풀?
김주명
출항시간이 다 되어간다. 어제 숙소 직원이 일러준 대로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준비하고 6시에 체크아웃을 했다. 직원이 따라 나오며 아침으로 준비한 종이 도시락을 건넨다. 하얀 비닐봉지에 폭 쌓인 도시락이 따뜻하다. 숨바와 섬의 동쪽 끝 사뻬에서 배를 타고 플로레스 섬의 바조 항구까지, 8시간의 뱃길이다. 바조에 도착하면 이번 여정의 마지막, 코모도 섬으로 가는 배로 갈아타면 된다. 하루에 한 번만 운항하는 노선이라 새벽부터 분주하다.
7시가 되니 바로 승선을 시작했고 일행은 장거리(?) 항해에 대비해 전망도 좋고 편안한 자리에 앉았다. 이제 아침 시장기가 돈다. 숙소에서 준비해준 하얀 종이도시락을 펼치니, 팬케익 두 장과 작은 물병이 들어있다. 팬케익을 집어 들고 얼른 한 입 삼키는데, 어? 팬케익 안에서 씹히는 있다. 그제야 남은 팬케익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바나나였다. 바나나를 얇게 썰어 반죽과 함께 팬에서 구운 듯 보였다. 이른바 ‘바나나 끄레뻬’, 이곳에서 ‘삐상 끄레뻬’라고 하는데, 이 또한 유럽 국가들의 오랜 식민통치 유산인가? 배는 바람 한 점 없는 플로레스 바다를 무명천 다림질하듯 미끄러져 가고 있다.
열대의 나라 답게 인도네시아에는 바나나 나무가 정말 많이 보인다. 동네 여기저기 우물가, 논두렁은 기본이고 호텔이나 레스토랑에도 조경수로 많이 심는다. 우물을 새로 팔 때, 바나나가 자라는 곳을 파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바나나는 물을 좋아하고 물가에서 잘 자란다. 그래서 우물가에 바나나가 많구나! 그런데 한결 같이 시퍼런 줄기에 시퍼런 잎만 달고 있을 뿐, 그 흔한 바나나 열매는 본 기억이 없다. 또 바나나 나무는 엄청나게 키가 크다. 자란다 싶으면 이내 2∼3m는 기본이고 가만히 두면 웬만한 집의 지붕보다 더 높게 자라니, 대체 씨도 없는 바나나는 어떻게 자라는 것일까? 그리고 열매도 안 맺는 바나나 나무를 왜 저렇게 키우는 걸까?
사실, 바나나는 나무가 아니라 ‘파초과’의 풀로 분류되어 있다. 필자가 고국에서 나무 답사를 하며 어깨너머로 얻은 지식으로만 봐도, 꽃을 한 번만 피우면 풀이고, 여러 해 꽃을 피우면 나무라는 구분법으로 보자면 바나나는 딱 한 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니 풀이 맞겠다. 그래서 동네에서 흔히 보이는 바나나 나무에는 바나나가 없구나! 이렇게 열매를 맺은 바나나 나무의 줄기를 베어내면 바나나는 뿌리에서 죽순처럼 새로운 새싹(흡아)을 올린다. 이 싹을 골라서 다시 간격에 맞춰 옮겨 심으면 바나나가 열린다. 이런 방식으로 또 베어내고 흡아가 올라오면 옮겨 심고, 또 수확하고 베어내고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맨 처음의 바나나는 어떻게 키웠을까? 맨 처음의 싹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쯤 되면 전문가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초기 야생의 바나나는 당연히 씨가 있었을 것이다. 씨가 있는 바나나 속에서 갑자기 씨가 없는 돌연변이 바나나가 나오게 되었고, 사람들이 이를 골라 재배하면서 지금처럼 씨 없는 바나나가 주종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바나나 입장에서도 인간에게 선택 당하면서 번식의 유리한 조건을 만나게 되니 점점 씨 없는 바나나만 선택된다는 논리다.
이쯤 되니 바나나가 진화의 타임캡슐 같다. 바나나가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도, 씨가 있든 없던, 바나나와 함께 사는 삶을 더 들여다보자. 살다 보니, 이곳에선 바나나만 먹는 게 아니었다. 우선 넓은 잎은 비가 오면 우산이 되고 급히 음식을 놓을 곳이 필요하면 음식을 담는 접시가 된다. 하지만 바나나 잎으로 잘 접고 말아서 쪄낸 밥, 론똥이 단연 으뜸이다. 우리네 연잎 밥처럼, 무엇과도 어울리며 휴대도 간편해서 어디 길 나서면 꼭 몇 개씩 챙겨가는 밥이다.
다음으로 줄기는 훌륭한 잔치요리가 된다. 딱딱한 겉은 소 사료로 쓰고 부드러운 속껍질로 요리를 한다. 온갖 양념과 함께 완성된 요리는 ‘바나나줄기 찜’이 된다. 다음으로 땅속에 묻힌 뿌리(진짜 줄기)는 잘 다듬어 소의 사료로 쓴다. 물론 줄기도 함께 사료가 되지만, 뿌리 부분이 영양분이 많다고 해서 특별히 챙겨주는 별식인 셈이다. 토막으로 잘라놓은 뿌리를 자세히 보면 ‘마’ 같기도 하고, 고구마 같기도, 한눈에 봐도 탄수화물이 가득해 보인다. 이 땅 속 줄기에서 싹(흡아)가 올라오니, 잘라다 심으면 또 10m가 넘는 바나나 풀이 된다. 여기까지 살펴보니, 우물가에 열매도 안 맺는 바나나를 왜 그냥 두는지 알만도 하다. 제각각 쓰임에는 용도와 때가 있는 법, 아직 때가 되지 않았나 보다.
인도네시아에는 태풍이 없다. 섬 대분이 적도에 걸쳐 있어, 다만 계절풍이 바뀌는 2월과 8월에 많은 비를 동반한 열대성 폭풍 정도이다. 비록 태풍에는 못 미치는 바람의 세기라 해도 섬 전역에서 많은 피해가 나고 아름드리 나무들도 대책 없이 줄기가 부러지기 십상이다. 그래도 바나나 풀이 부러지고 쓰러지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풀의 유연함을 진즉에 익혀서 그런가? 덩달아 이 땅에 뿌린 내린 나의 삶에도 어느새 예쁜 새싹들이 바나나의 흡아처럼 쑥쑥 올라와 자라고 있다. 언제가 저 애들에게도 옮겨심기를 해 주는 날이 있으리라! 바나나처럼, 풀처럼!
from 롬복시인
사진촬영하신 롬복의 「나루투어」 박태순 대표님은 ‘롬복지킴이’로 알려져 있으며, 유튜브 ‘롬복의 모든 것’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