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 사탕수수, ‘화학’이란 이름의 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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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롬복시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12-11 18:35 조회601회 댓글0건본문
사탕수수, ‘화학’이란 이름의 멍에
김주명
이민을 간다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주위에도 알리고 간단한 송별식도 하며, 그럴 때 마다 지인들이 덕담으로 건네는 말이,
“한국의 맛, 엄마 손맛은 챙겨가야지!”
물론, 조미료를 잘 챙겨가라는 뜻인데, 지금은 그때 생각만 하면 ‘아재개그’로도 민망하다. 조미료의 원산지에 조미료를 챙겨가라니, 그래도 그때는 몰랐으니…….
인도네시아, 동부자바의 중심도시인 수라바야 인근에는 한국의 유명 식품기업들이 모두 있다. 당연히 사탕수수가 많이 나는 지역이라 설탕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곳에 살고 있는 지인의 이야기로는 설탕과 미원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미원이라고? 미원의 원료가 사탕수수라고? 위키 백과에서 미원의 정의를 보자.
“사탕수수를 발효해 만든 조미료이며 성분은 글루탐산나트륨이다.”
조미료의 대명사인 ‘미원’, 그런데 미원 앞에는 꼭 ‘화학’이 붙어 화학조미료라고 부른다. 요즘은 MSG로도 표시하는데, 1960년대 중반, 처음 선보인 감칠맛의 조미료인 미원은 당시 경제개발기인 한국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러다 갑자기 불거진 MSG 유해성 논란으로 미원은 ‘화학조미료’란 구실로 온갖 비판을 감당 해 내야 했다.
조미료의 유해성 논란을 떠나 어째서 ‘화학’을 불신하게 되었을까? 경제개발 초기에는 새로운 세계로 인도 해 줄 것만 같던 중화학공업이 90년대 ‘페놀사태’로 대변되는 환경오염과 여러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발생시켰다. 그런 과정에서 화학은 우리 생활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화학’에 대한 거부감을 떨칠 수다.
다시 구글에서 화학조미료의 정의를 보자.
“화학적으로 합성한 조미료가 아니라 화학이란 학문을 통해 연구과정에서 나온 조미료이다.”
‘발효’라는 단어를 빼고 조미료를 설명하자니 저렇게 어려운 정의가 탄생했다고 생각된다. 이 기준에서 보면, 설탕도 화학설탕이고 식초도 당연히 화학식초가 된다. ‘자연발효식초’도 구글의 정의로 본다면, ‘자연에서 화학적으로 반응한 식초’정도는 되어야 맞겠다.
공학도가 아닌 필자가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유해성 논란보다 낱말에 스며든 왜곡된 가치관이다. 공원에서 날고 있는 비둘기와 경기장에서 날려 보낸 비둘기는 꼭 같은 비둘기지만 받아들이는 의미는 사뭇 다르다. 경기장에서 날리는 비둘기 속에는 ‘평화’라는 상징성이 스며들었고 그것을 우리는 ‘평화=선’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예단(豫斷)’이라는 형태로 우리 삶 속의 일부가 되어 있다. 다시 화학조미료를 돌아보자. 처음부터 제조공정 그대로 ‘사탕수수 발효 조미료’라고 표시했더라면 어땠을까? 혼자만의 상상을 해 본다.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종종 한문으로 표시된 상표나 이름을 읽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마다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신기한 듯 필자를 다시 쳐다보곤 한다.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권에서 한문은 여전히 난공불락의 언어가 맞겠다. 그러면서도 ‘味の素’는 단번에 ‘아지노 모토’로 읽어낸다. 어느 나라 말이냐고 되물어 보면 반은 일본어라고 말하고 나머지는 그런 걸 왜 묻느냐는 식으로 얼버무린다. 통계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에서 아지노 모토가 70% 정도 점유하고 있다니 그럴 만도 하다.
전 세계, 어느 식품 매장에서도 이제는 쉽게 찾을 수 있는 미원과 아지노 모토, 그걸 모르고 여행자용 가방에 미원 1kg를 보물처럼 꼭꼭 담아 사탕수수의 나라에 왔으니, 지금도 그 생각만하면 혼자 슬며시 웃을 뿐이다. 마치 그을음 가득한 부엌 맨 구석, 어머니께서 미원 100g 한 봉지를 고무줄로 묶어 참기름병 뒤에 꼭꼭 숨겨두었던 것처럼…….
from 롬복시인
wnaud012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