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원 | 인터넷문학상 학생부 우수상 - 한국문인협회인니지부장상 '말랑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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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인니문화연구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1-17 22:03 조회5,808회 댓글1건본문
우수상 한국문인협회인니지부장상
말랑할머니(Malang)
간형찬 (SPHI 12학년)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났다. 19년을 이 나라에서 살았으니 내게는 한국보다 더 익숙하고 편한 나라가 인도네시아다. 건기와 우기가 있을 뿐 일년내내 계절이 바뀌지 않는 나라에서, 그러나 나는 한국의 여느 아이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경험들을 하고 살았다. 집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나눈 그 경험들이야 말로 나를 더 단단하고 성숙하게 만들어준 자양분이었다.
내가 다니는 우리 학교에서는 매년 11월쯤에 방학을 한다. 그 기간을 ‘Service Week’라고 하는데, 많은 학생들 그 기간 동안 학교 내에서가 아닌 다른 환경에 가서 봉사 활동을 지원한다. 이 프로그램은 9학년부터 12학년까지의 고등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나는 총 3번 봉사 활동에 지원해서 방학을 보냈다.
올해 12학년이 된 나는 학교생활의 마지막 봉사로 말랑(malang) 지역을 택했다. 월요일에 자카르타를 출발해서 4박 5일 동안의 봉사를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나는 어느 때보다 이 봉사기간 동안 최선의 노력을 다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이제 대학을 가게 되면 언제 다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말랑( Malang)은 중부 자바에 속한 도시라서 비행기로 1시간 반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봉사에 지원한 총 21명의 친구들이 3그룹으로 나누었다. 각자의 그룹이 유치원과 초등학교, 노인 복지 기관을 찾아가서 봉사하고 날마다 서로의 봉사지를 바꾸는 식이었다. 오전에 봉사 활동을 끝내면 1시에서 2시까지는 점심을 먹고 한 시간 동안의 휴식을 취하고, 오후 5시부터 8시까지는 여자 고아원을 찾아가서 봉사를 하는 일정이다.
화요일날, 우리 그룹은 먼저 노인 복지 기관을 찾아가게 되었다. 10학년때나 11학년때는 노인 복지 기관을 찾아가 본 적이 없어서 내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게다가 나는 한국에 외할머니 한분만 계셔서 나이가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눈 경험도 별로 없고, 사실 노인들을 대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무겁기도 하고 또 그만큼 기대되기도 했다.
노인 복지 기관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니, 사실 좀 심각했다. 말랑(Malang)은 비교적 지대가 높은 곳이라서 밤에는 춥다. 나도 자카르타에서만 살아온 탓인지 말랑의 날씨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근데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침대에는 얇은 이불 하나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방 안에는 히터나 보일러 같은게 전혀 설치 되어있지 않았다. 날이 추워질 때마다 뼈마디가 아프다고 하시던 외할머니 말씀이 절로 떠오르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건강이 걱정이 되었다. 더군다나 복지 기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말씀도 제대로 못하시고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시는 분도 많았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분들도 많았다.
우리는 노인 복지 기관의 강당에서 모여 할머니와 할아버지들과 함께 간단한 공 던지기 게임도하고 노래도 같이 부르고 체스를 두기도 했다. 근데 대부분의 시간은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보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인생 얘기도 듣고, 조언들도 듣고, 자식들 자랑도 들어드렸다.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던 나로선 뜻 깊은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11시쯤 되었을 무렵, 나는 강당에서 잠시 나와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이 잘 안 가는 강당의 반대편을 천천히 걸었다. 그런게 그곳에서 혼자 휠체어에 앉아 계신 할머니를 발견했다. 인사를 드릴까 싶어 다가갔다. 할머니는 적어도 80대는 되어 보이셨고 뼈 밖에 안 보일 정도로 마르셨다. 인사도 하기 전에 마음이 아파왔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인사를 드리고 손을 잡아드리러 다가갔다. 할머니도 내 목소리를 들으셨는지 힘겹게 손을 드셨다. 근데 내 손을 향한 곳이 아니라 허공에다 손을 흔들고 계셨고, 그 순간 난 할머니가 앞이 보이지 않으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재빨리 할머니 손을 잡았다.
그 순간, 할머니는 내 손을 놓으시더니 천천히 손에서 팔로, 팔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목으로 나를 알고 싶으신 듯 어루만지셨다. 촉각으로 나에게 인사를 하시고 내가 누군인지 파악하시고 계신 것이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잠시 만지시고 내 목을 잡으시더니 나를 끌어안으셨다. 작고 연약한 할머니의 어깨에 내 얼굴이 닿았을 때 내 속의 무언가가 가슴을 벅차고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참지 못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잘 보이시지도 들으시지도 못하시는데 내가 우는걸 아시는지 내 볼에다가 입도 맞추셨다. 그것은 내 울음을 더 주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원인이 무엇인지 나 자신조차 파악도 제대로 못한 채 나는 그 상태로 몇 분간 울었다.
무엇이었을까? 내 안에 있던 슬픔들을 할머니가 알고 계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 날 왜 그렇게 내가 서럽게 울었는지, 할머니의 무엇이 나를 울게 만들었는지.
나는 겨우 울음을 그치고 할머니의 손을 잡은 채로 할머니가 하시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목소리도 작으시고 때로는 알 수 없는 언어로 말씀을 하셨다. 그래도 나는 귀를 크게 열고 할머니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다. 뜻을 알 수 없는데, 이상하게 모든 말씀이 다 이해되었다.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할머니는 그럴 때 마다 내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대고 비비시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를 해 주셨다. 내가 할머니를 도와 드리러 간 봉사였는데, 할머니가 나를 위로해 주고 계셨다.
그렇게 정해진 시간이 다 할 때까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봉사 시간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갈 때 나는 선생님께 특별히 부탁 드렸다. 수요일과 목요일도 다시 노인 복지 기관으로 가서 봉사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선생님도 내가 여느 때보다 진지하고 간절하게 부탁한다고 느끼셨는지 쉽게 허락해 주셨다. 그래서 다음날과 그 다음날도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는 끊임없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정확하게 알 수도 없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할머니의 보이지 않는 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신지 모두 느껴졌다. 우리는 마치 오래 된 친구 같았다. 할머니는 나에게 그동안 쌓아놓은 모든 이야기를 다 하시려는 듯 했다. 밥 먹는 시간을 빼고 할머니는 휠체어에서, 나는 그 앞에 의자를 놓고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다. 나는 할머니가 알아들을 수 없을 게 뻔한 어설픈 인도네시아 말로 우리 집이 어려웠던 이야기도 하고 우리를 위해 힘든 직장 생활을 견디고 계신 엄마의 이야기도 했다. 할머니는 보이지도 않는 나를 계속 쓰다듬어 주셨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 화살처럼 가버렸다. 나는 외갓집에 다녀오던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말랑(Malang)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이제 그만 가야 한다며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으셨을 때 나는 급기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할머니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그 10분은 정지된 화면처럼 지나갔다. 내가 지금 할머니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죄송하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안타깝고.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한꺼번에 내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할머니께 건강하게 잘 지내시라는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자카르타로 돌아왔다.
지금까지도 말랑 할머니의 생각을 가끔 한다. 그 경험을 통해서 무엇보다 나는 자신과 내 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커서 심리 상담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회계사가 되라는 어머니의 말씀 때문에 포기해 왔던 꿈이었다. 하지만 말랑(Malang) 할머니와의 만남을 통해 심리상담사가 되는 꿈을 다시 꾸게 되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어려움은 어쩌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힘을 주는데 쓸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심리상담사가 되어 마음의 병을 앓거나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가장 가까이서 이해하고 도와주고 싶다. 내가 말랑 (Malang) 할머니께 그랬던 것처럼, 말랑 할머니가 내게 그래주셨던 것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상담사가 되리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어머니께 나의 꿈을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대학에 가기 위해 곧 인도네시아를 떠날 것이다. 언젠가 말랑 (Malang) 할머니를 다시 찾아뵙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꼭 따뜻하고 넓은 마음을 가진 심리 상담사가 되어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말랑(Malang) 할머니,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제가 인도네시아에 태어나 자라 우리말이 익숙하지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상을 받게 되어서 기쁩니다. 우리는 자카르타라는 바쁜 시내 속에서 일분 일초를 우리 자신에게나 우리에게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신경을 쓰게 됩니다. 말랑 할머니와의 특별한 경험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면서 그들의 봉사 정신을 일깨우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피하는 것보다 도와주는 것이 더 힘들지라도, 서로 도와주며 사는 게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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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영희님의 댓글
친구영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잘 읽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