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원 | 인터넷문학상 우수상 - 한인니문화연구원장상 '손 없는 그들에게 내미는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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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인니문화연구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1-17 21:34 조회4,567회 댓글0건본문
우수상 한*인니문화연구원장상
손 없는 그들에게 내미는 손길그들에게 내미는
최희정(PT.Global Fiberindo,Operational Director)
천벌을 받은 몸과 천사의 미소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본 일이 있는가.
지난 12월 13일, 처음으로 나환자촌을 방문하게 된 나의 심정은 솔직히 두렵고도 복잡했다. 과연 나는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고, 함께 웃음을 나눌 수 있을 것인가.
나병, 문둥병 등으로 불리는 한센병 환자는, 내 어린 시절 동네 할머니들이 우는 손자 겁을 줄 때 들먹이던 막연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그런데 그 나환자들이 이 곳 인도네시아, 그것도 내가 사는 땅그랑 지역에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고, 여러 해 동안 한결같이 그들을 돕는 한국후원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느꼈던 놀라움은 지금도 새롭다. 그러다 이번에 딸아이가 다니는 Sekolah Pelita Harapan (SPH) 한국 학부모회 연말 자선후원 책임자로, 바로 그 나환자 촌 봉사모임 Heaven’s Member (헤븐스) 토요 봉사에 따라 나서게 된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한센병이 쉽게 전염되는 병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길을 나서는 내내 불편한 마음은 여전했다.
나환자촌 가는 길에 헤븐스 초기멤버이자 10년째 한결같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이정민씨에게, 어떻게 처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동기는 단순했다. 2005년, 그저 우연한 기회에 한센병 환자와 가족이 길에서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는 현실을 알게 되었단다. 안타까운 마음에 뜻있는 지인들과 매주 토요일 스물여섯 가정에 쌀 5kg씩을 나눠주는 일로 시작한 일이 벌써 10 년. 봉사가 꾸준히 이어져 현재는 52명 정도의 회원이 약 90여 가정에 매주 쌀과 생필품 등을 나눠주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모임을 같이 만든 박한미씨와 이정민씨는 10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꾸준히 봉사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10년을 단 한 주도 빠질 수 없던 것은 만일 사정이 생겨 쌀을 주지 못할 경우, 고스란히 일주일을 배고픔에 시달려야 하는 그들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5kg의 쌀은 일주일 간 한 가정이 소비하는 쌀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혹 가족이 없이 혼자 살아가는 노약자에게는 매월 별도의 반찬 비용을 보조해 준다고 한다. 그리고 가끔 중고물품을 모아 기금조성과 나눔을 하기도 하고, 성탄절이나 라마단 같은 명절 때엔 뜻있는 회원이나 단체들이 물품을 기증해주기도 한다고 했다.
그저 몇 명의 한국 주부들의 마음이 모여 이렇게 큰 역사를 만들 수도 있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어느덧 나환자 촌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내가 사는 곳과 너무나 가까운 곳이어서 놀랐고, 이미 구름같이 나환자들이 모여 있어서 또한 놀랐다. 부피가 큰 라면박스 때문에 트럭까지 대절하여 찾아간 그 곳은, 넓은 공터에 간이식 버스대기소 같은 작은 건물이 있었고, 사람들은 남녀노소 건물 안팎으로 모여 배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 SPH 한국 학부모회에서 지원받은 기금과 별도의 성금모금을 통해 모은 900만 루피아 의 돈으로, 90가정에 라면 한 박스와 커피, 설탕, 연유를 담은 봉투 하나씩을 선물할 수 있었다. SPH 한인 초등학생들은 손수 정성 들여 쓴 작은 크리스마스카드를 봉투에 하나씩 매달고 직접 포장까지 하는 등, 나눔에 동참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막상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이 사람들 생각보다 평범하다. 언뜻 봐서는 얼굴 표정이라던가, 차림새 또한 여느 현지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우리를 무척 반기며 기대에 들떠 아이들처럼 웅성거렸고, 명단에 있는 이름이 불리는 순서대로 질서 있게 쌀과 선물을 받아 돌아갔다. 처음 차에서 내릴 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던 것과는 달리, 어느새 나는 일일이 사람들 손에 직접 봉투를 걸어주고 악수를 나누며 활짝 웃고 있었다. 두려움보다 나눔의 기쁨이 나를 용감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한 순간,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가 주는 봉투를 받아야 할 그 사람은 받을 손이 없었다. 오늘은 쌀 5kg가 들은 봉투와 라면 한 박스, 커피 등이 들은 비닐봉투를 한꺼번에 받아가야 하는데, 아이들이 따라오거나 둘이 온 사람은 괜찮았지만, 이렇게 혼자 온 사람은 오롯이 혼자 세 가지 물건을 가져가야 한다. 이미 쌀과 라면을 한꺼번에 끌어안은 그는, 내가 건네는 봉투를 받을 손이 없어 가슴으로 안았다. 나는 손으로 물건을 주었는데, 그는 가슴으로 받아 안아 들고 나에게 환히 웃으며 감사인사를 했다.
순간, 놀라움과 먹먹함으로 가만히 그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다리가 없어 의족을 했고, 발가락이나 손가락이 뭉개져 형태가 일그러진 사람도 많았다. 눈병을 앓거나 얼굴이 함몰된 사람도 있었고, 발목이 왜곡되어 걷기가 불편한 이도 있었다. ‘하늘이 내린 천벌 같은 병’이란 말이 다시금 생각났다. 그들은 대체 무슨 커다란 잘못을 했기에 이런 천형을 받는 것일까? 그런데도 어쩌면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일까? 그 때, 엄마 손을 잡고 따라 온 작은 여자 아이가 눈에 뜨였다. 엄마를 도와 선물을 나누어 든 그 아이는 참으로 예뻤고, 당연히 정상이었다. 한센병은 전염병이지만 유전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가 환자여도 자녀들은 다 정상인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고 사회적으로 격리된 부모 밑 에서 자라다 보니, 영양과 위생 및 교육환경이 열악하여 피부병을 앓거나 체구가 작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당장 생계가 문제이다 보니 교육은 뒤로 미뤄지기 십상이어서,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면 어려워진 공부를 따라가기 힘들어 포기해버리는 아이들이 많다’고 옆에서 이정민씨가 설명해주었다.
한 편 모든 배급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돌아간 자리에, 작은 어린 아이들이 남아 건물 안에 놓인 긴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함께 간 이정민씨는 출석노트에 적힌 이름의 아이들 하나씩을 안아주면서, 지난 한 주간 나눠준 숙제를 다 했는지 물으며 새로 수학 문제지를 꺼내놓았다. 교육의 기회가 없는 아이들을 바라보기가 안타까워서 1년 여 전부터 토, 일 주말 오후에 아이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모의 삶은 이미 바꿀 수가 없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은 교육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기 앞 날을 개척해 나갈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취지였다. 뜻을 같이하는 몇 몇 SPH 고등학생들과 엄마들이 돌아가며 주말에 간식과 학용품 등을 선물로 주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그 중 몇 몇 아이들은 유달리 총명하여 기쁘고도 안타깝다고 했다. 만일 좀 더 좋은 환경이라면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것 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인데, 과연 이 아이들 중 몇 명이 중학교 이상 진학이 가능할까? 당장 생계를 위해 초등학교 졸업 후 일자리를 찾아야만 하는 게 아닐까?
모여 앉아 나름 진지하게 손가락을 꼽아가며 셈을 하는 아이들이 귀여워서, 나도 잠시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도와주었다. 초등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아이들이 열 댓 명 가량 모여서 수업을 하는데,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다. 지난주에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처음 배웠다는 1학년생 여자아이는, 일주일새 숫자 쓰는 법을 다 까먹어서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그래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다시 숫자를 쓰면서 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빙그레 미소가 떠오른다. 한 시간 반의 수업 중간에, 유난히 귀여운 얼굴에 짙고 긴 속눈썹 밑으로 흑진주 같은 눈동자가 까맣게 반짝이는 초등 2학년 여학생 Nurul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앞에는 여느 한국 엄마처럼 딸을 응원하고 문제풀기를 도와주는 엄마가 앉아있다. 다른 엄마들이 수줍어서 혹은 셈에 어두워서, 그저 밖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딸이 어렵다고 좀 낙심하거나 하면 그 엄마는, "Ayo, Nurul! Kamu nanti mau sekolah ke Korea tidak? 라며 독려한다. 눈 여겨 보니, 딸이 틀린 문제를 가리키는 그 엄마의 손가락 역시 여러 군데 형체가 없었다.
그 순간, 가난한 현실아래 경제적으로 무능한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배려이자 노력을 보았다. 예전에 전쟁을 겪고 맨손으로 모진 고생을 하며 아이들을 교육시킨 한국의 옛 어머니 모습이 그녀와 겹쳐져, 보는 내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 눌렀다. 다음 주까지 구구단을 다 외우면 이모가 좋은 선물을 주겠노라 Nurul에게 약속하고,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한 후 헤어졌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더니, 난 물건을 건네주고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감사와 충만한 기쁨을 하나 가득 받아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2003년에 처음 인도네시아 땅에 정착해서 벌써 11년이 지났으니, 나도 이제 태어나고 자란 서울보다 이곳이 익숙하다. 인도네시아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자 소중한 인연의 중심이었고,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귀한 딸도 얻어 셋이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으니, 우리는 인도네시아에서 많은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다. 참으로 감사하고 매일의 일상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니 낮에 만난 Nurul의 눈빛이 생각 나서, SPH 엄마들에게 오늘 찍은 사진과 이야기를 전하고, 각 가정에서 옷가지 및 학용품을 모아 달라고 부탁 했다. 우리 아이들도 엄마의 그런 나눔과 봉사에 관심을 가지고, 학교공부에서는 배울 수 없는 교훈을 얻기를 소망하는 뜻으로 동참을 권했다. 우리는 더 많이 나눌 기회가 있는 땅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봉사와 희생은 마더 테레사 같은 위대한 사람들의 것만이 아니다. 바로 여기 10년째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단 한 주도 굶기지 않기 위해 쌀을 지원하고 마음의 위로를 준 위대한 한국의 어머니들이 있다. 그들은 대단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부유한 사람들도 아닌, 그저 정이 많은 평범한 한국 엄마들이었다. 10년을 한결같이, 그들 곁에 서서 어려움에 귀 기울이고, 찬 흙 바닥에 매트를 깔아주고, 화장실과 무너진 집을 보수해주며 함께 해 온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타국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는 애국자이고, 종교나 이념을 넘어선 사랑의 실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앞으로 그들의 나눔과 사랑에 기꺼이 동참하리라 다짐해본다.
내가 내민 손을 가슴으로 받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11년 넘게 살면서 인도네시아사람들에게 많이 실망하고 크고 작은 손해를 입은 일도 있었다. 다 안다고 생각한 그들의 속마음이 나의 그것과 달라 생경함과 섭섭함을 느낀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 세상 어디에서 누구와 어울려 살든,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며 나누면, 그곳이 바로 내 고향이고 그들이 내 가족이 아닐까. 조화와 상생, 이것이 십 년이 넘은 인도네시아 생활에서 얻은 삶의 지혜이다. 비록 말이나 얼굴, 문화와 사는 방식이 달라도 우리는 그 다름을 이해하고 하나로 어우러질 일이다. 우리는 인도네시아에 살러 온 손님이니, 좀 더 그들을 배려하고 이해하려 노력하자. 비록 그들이 작은 거짓말과 실망을 주더라도 쉽게 포기하고 돌아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의 작은 노력이 다른 이의 삶에 빛이 될 수 있다면, 그들에게 희망이 되고 그로 인해 그들의 삶이 바뀌어 또한 세상을 밝히는 더 밝은 빛으로 함께 빛날 수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자 행복이 아닐까. 내가 이 땅에서 받은 축복을 작게나마 나누며 산다면, 한국인으로서 이보다 더 크고 쉬운 나라사랑이 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빛이 되고 희망이 되고, 또한 다가가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함께 어우러져 피어 살고 싶다. 멀리서 그냥 바라보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내밀 것이다. 바람이 불고, 시련의 큰 비가 내릴지라도, 그들은 기꺼이 내게로 와서 꽃이 되어 피리라. 나의 손을 그들이 가슴으로 받아 주었듯이, 생각이나 환경과 언어와 생김새가 다를지라도, 두 가지 사람과 문화가 어우러져 크고 아름다운 열매가 익어가는 것을 이 적도의 땅에서 바라보며, 나는 이 나라를 좀 더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