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원 | 인터넷문학상 학생부 장려상 - 한인니문화연구원상 '옆집 까깍을 불러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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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인니문화연구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1-27 19:56 조회5,131회 댓글0건본문
옆집 까깍을 불러와라
(Kakak)
김용주 (BIS 11학년)
분별력 없던 다섯살 혹은 여섯살 쯤이었다.
퇴근하신 아버지의 무서운 목소리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 귀에 , 내 기억에 너무나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나는 그날 놀이터에서 놀다가 옆집 가사도우미 누나에게 못된 말을 하고 장난을 심하게 쳐서 어머니께 혼이 났었다. 어머니는 내 행동이 몹시 당황스러우셨던지 그 모든 사실을 아버지께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다.
부모님을 따라 어린 나이에 인도네시아에 온 나. 언제부턴가 가사도우미 누나나 운전기사 아저씨께 함부로 버릇없이 행동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게 뜨끔한 교훈을 주시려는 작정이셨다. 옆집 가사도우미 누나에게 무례하게 행동한 나를 엄청나게 혼내셨고 급기야는 집으로 불러 오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 앞에서 옆집 까깍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야 했다.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였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그 날의 일은 내게도 정말로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울면서 떠듬떠듬 인도네시아어로 누나에게 내 잘못을 사과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화가 좀 풀리신 모양이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누나에게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잘 모르고 행동한 것이니 용서를 해 달라고 하셨다.
나는 인도네시아에 약 10년을 살아왔고 어렸을 때부터 당연히 한국 문화보다는 인도네시아 문화에 길들어져 있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충분히 걸어 다닐 만한 짧은 거리도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자가용을 사용하고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 주는 가사도우미인 “까깍”에게 시킨다.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쉽게 현지인에게 떠맡긴다. 그렇게 편한 환경에서 부족함 없이 살아 온 탓에 나는 조금은 게으르고 나태한 청소년이 되었다.
늘 그런 삶이 당연한 것이려니 여기고 있던 내곳을 갔다. Yum farm은 찌파나스 지역에 있는 오르가닉 농장인데, 고아원과 인근 아이들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먼저 우리 학교 아이들은 yum farm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준비했다. 축구, 영어 가르치기와 함께 요리를 하는 프로그램도 준비했다.
나는 학교 기자 팀에 속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를 시작하기 전까지 먼저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기자 팀은 좀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농장 안과 학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때 텅 빈 yum farm에 한 남자 아이가 어슬렁거리며 혼자 다니고 있는 걸 발견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일 것도 없이 인사를 했다. 그 남자 아이의 이름은 얀또였다. 나는 그 아이에게 프로그램이 11시에 시작되는 건데 너무 일찍 왔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얀또는 뜻밖의 답을 들었다.
“저는 영어 선생님이 되어서 우리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학교에 남들보다 일찍 와서 매일 영어 책을 읽습니다.”
나는 순간 마음이 얼어붙는 것 같은 작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얀또보다 백배쯤은 나은 환경에서 살고 얀또 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았지만, 그때까지 아무런 꿈도 없고 특별히 마음을 내어 노력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기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아이를 나는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이 아이 앞에서 이상하게 자꾸 부끄러웠다.
그 날 우리는 아이들과 아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나도 얀또의 말에 좋은 기운을 얻어서 더 즐겁게 아이들과 이야기도 하고 영어도 가르쳤다. 그런데 밥을 먹는 시간에 나는 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우리 학교 아이들 도시락과 Yum farm아이들이 먹는 도시락에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도시락에는 그곳 아이들의 도시락과는 달리 오렌지가 더 놓여 있었다. 나는 내 오렌지 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오렌지를 전부 모아 같이 나누어 먹자고 했다. 그래서 식사 시간이 더 왁자지껄하고 즐거워졌다.
나는 그날 누구보다 친해진 얀또에게 꼭 다시 와서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방학에는 그 약속은 지킬 생각이다. 비록 얀또는 아니지만, 부모님, 친구와 함께 메단의 한 고아원 공부방에 영어를 가르치러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얀또에게도 찾아갈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이 나라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이 나라의 땅과 문화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게 행복한 어린 시절을 선물해주고 외국인인 우리 가족을 환영해 준 인도네시아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면 내가 사는 이 나라에 뭔가 보탬을 줄 수 있는 사업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다. 아직 어린 나이이니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날 무서운 목소리로 옆 집 까깍을 불러 와 사과하라고 명령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는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인도네시아에서 지낸 지난 11년을 되돌아 볼 수 있어서 참 행복했습니다. 많은 추억들 중에서 옆집 식모누나 이야기와 yanto 이야기는 제게 강한 이미지로, 사진처럼 남아있는 특별한 사연입니다. 아마 이 이야기로 상을 받은 것도 제 인생에서 잊지 못할 일이 될 것입니다. 올해 겨울방학엔 수마트라섬 , 메단의 수녀원으로 3박 4일간 봉사를 다녀왔습니다. 그 곳에서 만난 소박하고 따뜻한 사람들과의 추억 또한 글로 남기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친구와 어른을 대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수상을 너무 기뻐해 주신 부모님과 한국에서 항상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할아버지 , 할머니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