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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원 | 제 7회 인도네시아 인터넷 공모전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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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인니문화연구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10-11 22:18 조회2,2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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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부 대상 주아세안대사상 

앙끌룽(Anklung)

홍예진(JIKS 11학년)

푸른 소리로 젖는다

 

초록 잎들 땅에게 다 내어주고

몸뚱이 동강동강 난 상태로

텅 빈 속도 모자라

별 점 닮은 구멍을 송송 내어

또 비웠다.

대나무는

이제

다 버린 마음에

담을 소리가 천지라고 웃는다

 

새들은 브릉브릉

햇살은 카락카락

달빛은 스몃스몃

빗물은 송알송알

바람은 서륵서륵

흔들림은 너슬너슬

울림은 사락사락

 

텅 빔에

존재의 마음이 닿으면

대나무는 소리를 담는다

알끌룽이 된다

별의 썰물이 빠지는 소리에서

동강난 몸으로 다시 일어서는 밀물 소리로

비어 있기에 소리를 만드는 존재

사르락사르락

우두두

그저 저희끼리 동강난 몸으로 소리를 부비며

우수수 별 비로 쏟아진다

솨르르

여운으로 다가선다.

 

시작노트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인도네시아. 나는 이 곳의 많은 것들을 좋아하지만, 특히 바람과 흔들림이만들어 내는 앙끌룽 소리를 좋아한다. 내가 앙끌룽을 처음 만났을 때는 고등학교 1하년이 되어 반둥수학여행을 갔을 때이다. 학업에서 잠시 벗어나 친구들과 소중한 추억을 만들면서, 우리는 반둥에 있는 ‘SaungAnklungUdjo’라는 곳을 방문했다. 그 곳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악기앙끌룽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그 지역 사람들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도 잘 알려진 곳이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이 천상의 악기를 느끼고 경험하고 감탄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입구를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타원 모양으로 좌석이배치되어 있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과 다른 방문객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잡고 앉다 보니 어느새 공연장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어린이들이  ‘앙끌룽연주를 시작하였는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연주를 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 죽순처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오프닝 무대가 끝난 뒤 공연장에 앉은 방문객들은 각각 다른 크기에 다른 음을 가진 앙끌룽을 하나씩 받았다. 그 다음 공연 안내자의 설명에 따라 앙끌룽이 어떤 원리로 소리가 나는지를 배웠고, 그 다음 길게 혹은 짧게 소리를 내는 방법을 간단하게 연습했다. 그 다음 과정은 7계의음을 가지고 있는 각각의앙끌룽으로 화음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가볍게 흔들리는 앙끌룽 소리는 청아한 빗방울이 빈 병에 통통 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손으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타악기도 아니고, 입으로 불어 소리를 내는 관악기도 아닌 단순한 흔들림만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는 이 오묘한 악기에 모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우리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음악은 물론 팝송 그리고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연주 하였다. 내가 받은 앙끌룽은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음 중에서 의 중간 크기에 해당하는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하나의 음으로 연주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피아노, 플루트 등의 악기를 배우며 협주를 한 경험이 있지만, 그때에도 내 악기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소리에 신경을 쓰며, 온전히 나를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앙끌룽은 한 가지 음이면서 전체의 음이기도 했기에 온전히 나를 내려놓고 전체가 되어야만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악기였다. 그것이 세상 모든 악기와 닮은 듯하지만 다른 앙끌룽만의 매력이었다. 나는 오카리나를 통해 사랑의 숲이라는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잔잔한 바람이 불고 고요한 물소리가 흐르는 숲 속을 거니는 경험을 했다. 단소를 통해 천년 바위라는 곡을 처음 들었을 때는 온유하고 청아한 하늘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경험을 했다. 앙끌룽을 처음 접했을 때는 대숲과 바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모습이 연상되었고, 다 비워내고 덜어내는 나와 비로소 마주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수상소감

저에게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인도네시아 이야기’ – 공모전을 통해서 뜻깊은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되었고 인도네시아 전통악기인 앙끌룽의 매력에 대해서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잎이다 뜯겨진 채 속이 텅빈 대나무 들쑥날쑥 한 어린 아이의 치아처럼 저마다 길이가 다른 대나무 사다리처럼 생겼지만 사다리도 아니고 고무줄로 엮어있지만 그렇다고 고무줄 총도 아니고 옆으로 흔들어 보니 동동동 물방울 같은 소리를 내더니


내 마음 속의 작은 심금을 울리게 하는 대나무 내 심장과 맞추어 뛰는 너 내가 빠르면 빨라지고 느리면 느려지는 마음을 울리는 소리 내 기쁨도 슬픔도 나와 함께 해 주는구나 
나의 모든 것을 표현해 주는 것 같은 앙끌룽에게도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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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부 최우수상 재인니상공회의소회장상 

하지만마까난(Makanan)인도네시아! 

박준우(JIKS 11학년)

미리 밝혀두자면아버지의 발령 소식을 듣고 나는 어느 나라보다 인도네시아로 오기가 싫었다.인도네시아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이유도 없이 좋지 않았다하지만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보니 일단은 여기로 “끌려왔다”. 그야말로 끌려오는 느낌이어서 내가 이 나라에 마음을 붙이고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내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다.맨 처음아버지의 이직으로 초등학교 2학년때 중국 심천으로 떠났다당연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했다이제 겨우 한글을 어렵게 배워놨는데 이제는 중국어를 하란다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언어중 하나라는 중국어를초등학교 2학년때말이다한글 받아쓰기도 간신히 해내던 나에게 중국어는 정말 답이 보이지 않았다.

 

누나랑 나는 중국어영어수학 이렇게 세개의 과목을 시험 보고서야 겨우 학교에 입학할수있었다입학 시험이 어려워서 어떤집은 형제가 시험을보면 둘 중에 한명은 붙고 한명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모든학교가 다 입학하기 어려운건 아닌데내가 입학하려는 학교는 그 지역에서 제일 명성이 높아서 입학조건이 까다로웠던 거라고 한다.

여하튼누나와 나는 운 좋게입학을 하고 학교에 갔다.첫날하루종일 선생님께서 무슨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알아들을수가 없었다하루종일 그림만 그리고 멍때리기 대회에 나온 소년처럼 눈을 껌벅이며 앉아있었다그때 생긴 그림그리는 버릇과 멍때리는 버릇은 지금까지도 좋지 않은 버릇으로 남아 있다특히 수업시간에 자꾸 이버릇이 나온다게다가 중국학교는 숙제의 양이 정말 많았다.숙제를 하기 위해서 과외 선생님을 불러야 할 지경이었다담임선생님은 숙제를 해 오지 않으면 무섭게 혼을 내셔서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숙제와의 전쟁이었다.

 

중국은 사회주의 나라이다보니 모든 수업은 주입식교육이고, TV에서 보는 북한애들처럼 빨간수건을둘러야 했다나는 과외 선생님이 숙제 내용을 가르쳐 주면한자를 마치 그림 그리는 수준으로 숙제를 하곤 했다.학교를 가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재미도없었다허나,차츰 적응하고 나니 한국에서와는 달리 학원도 전혀 다니지않고 노는 시간이 늘어서 좋았던 부분도 있었다특히 학교 점심시간에 중국친구들은 학교 급식을 먹는데 내입에는 급식이 영 맞지않아서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을먹었다가끔 내 입에맞는 고기반찬이 나오면 급식을 먹는식이었다중국 친구들이 내가 먹는 도시락에 관심을 보이기에 처음에는 그냥 나눠 먹었는데생각해보니 내가 괜히손해보는느낌이 들어서 나중엔 반찬을 1위안씩 받고 팔아보기도 했다나름 파는재미에 수입이 짭짤했다그 수입으로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마셨던 것도 완전 꿀맛이었는데나중에 선생님이 내가 반찬파는걸 알게되는 바람에 더이상은 장사를 할수가 없었다.

 

어렵게 중국에 적응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나한테 아버지가 홍콩으로 발령이 났다고이번에는 홍콩으로 가야한다고 하셨다.물론내가 살던 중국 심천과 홍콩은 거리가 가깝고 일일 생활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통학을 하기엔 멀다.1997년에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국경을 넘을때에는 이민국을 통과해야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매일 지각할 게 뻔했다어쨋든 이번에도 별 수없이 홍콩으로 이사를 했다중국과 만찬가지로 홍콩 역시 좋은 학교 들어가기가 힘들다나는 총 두개의 학교에 지원을했는데영국학교는 시험에 떨어졌고 캐나다학교에 합격했다.다행히 영어 본과수업을 바로 들을수는 있었지만 수업은 어렵고친구들과 선생님하고 대화는 안되는 형편이니 학교에 다니는게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그래도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다홍콩에서 다니는 캐나다 학교도 서서히 적응을 했다.

 

중국과 홍콩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뽑으라고 하면나는 맛있게 먹었던 맛집들을 들고 싶다어디서 무엇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들이 내 추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또한 홍콩에 살때는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게 지금생각해보면 굉장히 편하게 느껴진다놀거리도 많지만 지하철이 너무 편해서 인도네시아의 열악한 교통사정과 많이 비교된다.

 아무튼 중국을 거쳐 홍콩에서 한국가는걸 목표로 삼고 있었던 나에게또다시 아버지는 인도네시아 발령이 나셨다는 소식을 전하셨다나는 당황스러웠고 심지어 화까지 났다겨우 또 적응했는데…. 나는 단호하게 못가겠다고 하고 홍콩에서 혼자 홈스테이를 시켜달라고 한참을 졸랐다아버지는 나에게 강아지 사줄테니 인도네시아로 가자고 하셨다결국 그 약속은 지키지도 않으셨다.막상 인도네시아에 와서 보니 고양이가 더 좋아서 나중에 고양이 한 마리를 분양받을 생각이다이런저런 사정으로 나는 인도네시아로 어쩔수 없이 끌려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인도네시아가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만큼 나쁘진 않다우선 한국학교에 다니니 친구들과 공감도 잘되고 말도 잘통하고 이제까지 잘 느껴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있는중이다.한국으로 대학을 가야하니 미리 적응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그 중 가장 좋은건 역시 인도네시아 음식이다엄마는 나에게 길거리에서 현지음식을 사 먹으면 탈난다고 사먹지 말라고 타이르셨다하지만 원래 이 나이때에는 그런말도 꿀꺽 소화할 수 있는 튼튼한 위장이 있는 법이라고 내가 스스로를 꼬드겼다.

 

지금은 현지음식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빠당(Padang),바소(baso), 나시고랭(nasigoreng), 미아얌(miayam), 소또(soto)등등학교끝나고 집에 오기전에 친구들하고 인도네시아 음식들을 돌아가며 먹는 재미는 인도네시아에서만 느낄수 있는 즐거움이다인도네시아는 그로박(gerobak) 이라는 한국의 포장마차 비슷한 것을 굉장히 쉽게 찾아볼수 있는데나와 친구들은 학교 근처나 레슨하는 곳 근처의 그로박에서 여러음식을 시도해 본다맛도 맛이지만 가격도 굉장히 싸서 항상 돈이 부족한 우리또래 친구들한테는 인기가 좋다물론 포장마차이니 만큼 위생적인 부분은 좀 부족해서 그걸 먹고 아픈사람들을 볼때마다 남의 일 같지는 않지만우리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돌도 씹어먹을 나이인데.

 

인도네시아는 여러지역에서 나온 가지각색의 음식들이 있다예를들어 내가 말한 빠당이나 박소등이 그러한것이다빠당은 인도네시아의 빠당지역에서 나온 음식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특히 빠당음식 종류중 하나인 른당(endang)’은 CNN에서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 1 위에 뽑힐정도로 깊은 맛이 있다.바소는 고기를 완자처럼 모양을 빚은다음 끓여서 육수와 라면과 완자를 다함께 먹는다나시고랭은 밥(나시)를 볶은(고랭)것이다인도네시아어로도 말그대로 볶음밥이다이 볶음밥은 평범해 보이지만역시 CNN 선정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 2위에 오를정도로 맛있다.나는 나시고랭에 해산물을 넣을지 고기를 넣을지 채소를 넣을지 고민할때가 우주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라는 생각을 한다예전에는 수학레슨이 끝나고 친구들이랑 항상 우르르 몰려가서 근처 유명한 그로박에서 나시고랭을 자주 시켜먹곤 했었다그 밖에도 국수에 닭고기를 감칠맛 나게 버무린 미아얌이나 소또등이 있다소또의 국물 맛은 구수하고 시원하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 인도네시아에 와서느꼈던 감정은 행복이나 신기함이 아니라 ‘한심이었다.뚜렷한 이유도 없이 인도네시아의 모든게 마음에 들지않고 여기있는 친구들이랑은 절대 친해질수 없을 것 같았다그런데 태어나서 한번도 가본적 없는 수학여행을 친구들과 함께 가고 처음 사귀어보는 한국인 친구들과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가다 보니 많은 추억이 보물처럼쌓였다이 추억들은 평생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아직 어른이 되기도 전에 여러나라를 다니며 살았다어느 나라건 처음 경험하는 것들 투성이었고적응하기 힘들었다하지만 다 지나고나서 보니 중국어영어인니어까지 할수 있는 드문 능력을 가질수있게 되어서 오히려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인도네시아도 타의로 오게되었지만,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진 나라는 그 나라대로또 조금 불편하고 부족한 나라는 그 나라대로 장점과 단점이 골고루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것들이 그 나라만의 매력이라고 여기면 되었다그리고 내가 살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것들과 별생각없이 받아들였던 것들이 실은 얼마나 크고 감사한 행복의 조건인지도깨닫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맛있는 음식들마까난 인도네시아를 먹고 나는 키만 자란 게 아니라 마음도 많이 자랐다고 생각한다한마디로,나는 인도네시아에 와서 철이 좀 들었다.

 

수상소감

저는 고등학교를 들어오면서 자카르타로 오게 되었습니다오기 싫었지만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제가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아버지 발령으로 어쩔 수 없이 오면서또 새로운 곳에서 다시 적응하는 힘든 제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고 기쁘지가 않았습니다그런데 생각과는 다르게 한국학교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참 편하게 대해 줘서 차차 좋아졌습니다거리에 있는 현지인들을 보면 까만 얼굴에 씨~익 웃는 모습이 순해 보이고 정겹기까지 합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음식을 먹다보니 짧은 시간에 인도네시아 음식에 빠져버렸습니다음식과 함께 차츰 인도네시아 생활에 적응하면서 점점 인도네시아와 하나가 되어 가고 있는 제 모습에 놀라기도 했습니다맛있는 음식은 앞으로도 어떤 환경에서든 긍정적으로 살아가라는 모티브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기분좋은 예감을 느낍니다.

 

‘인도네시아 이야기’ 인터넷 공모전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무엇을 쓸까 고민 하다가 역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먹거리에 대해 쓰게 되었습니다생각지도 못하게 이런 큰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남은 인도네시아 생활이 수험생이라는 힘든 시간이 남아 있지만 수상소식은 더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합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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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부 우수상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장상

『바람과 해, 고집과 도움』

 

정 란(주부)

 

“큰언니로서 걱정되는 마음에 잔소리 좀 하려고 해.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혼자 끙끙거리다 이렇게 감당 안 될 만큼 아파버리고, 아픈데도 혼자 아이 돌 볼 수 있다고 말하고. 네가 씩씩하고 강해서 혼자 충분히 잘 해 낼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옆에서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피붙이 하나 없는 외딴 동네에서,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땅에서, 다행히도 기대고 의지할 곳이 있잖아. 우리 셋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가림막이 되어주고 때론 쉴 그늘이 되어주어야 해. 네가 언제든 와서 기댈 수도, 쉴 수도 있는 곳이라고. 혹시 아이들이 잠에서 깼는데 아이들 돌볼 힘이 없다면, 밥을 먹이긴 해야겠는데 일어설 기운이 없다면 나에게 바로 연락해. 내가 아이들을 돌볼 수 있으니까.”

 

큰언니.

세상에 태어나 부모님이 한 배에서 낳아주신, 나와 ‘남매(男妹)’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은 한 살 터울의 오빠와 세 살 터울의 여동생뿐이었다.

 

하루라도 사고 치지 않으면 배가 아픈 사고뭉치 오빠와 자기 몸에 실오라기 하나 묻으면 유난을 떠는 여동생. 난 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 부모님께 짐이 되지 않고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어드리려 부단히 노력을 했더랬다.

 

누가 보아도 나는 장녀(長女)였고, 누가 보아도 의젓한 딸이었다.

젖먹이 때부터 지금까지 ‘아프다’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살았다. 엄마가 주무시기 전에 내 이마를 한 번 짚어보셨다가 펄펄 끓는 체온에 깜짝 놀라 응급실을 간 게 몇 번 이던가.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아프다’는 소리 대신 누워서 잠을 자는 자식(子息)이었기에, 나는 부모님께 늘 ‘아픈 손가락’이라 불리었다.

 

그런 내게 ‘큰언니’가 생겼다.

 

큰언니는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판 남’ 이었다.

 

남편의 일로 연고(緣故)도 없는 이 땅 인도네시아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남편과 결혼하고 사 년 하고도 팔 개월을 살고 나서였다. 남편과 내 슬하에 네 살 난 아들과 두 살 난 딸이 있다. 제대로 우리나라 말도 못하는 자식들을 데리고 인니어 한 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내가 살 나라, 인도네시아.

 

없는 걱정도 만들어하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는 내게 ‘출국’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인정하기가 힘든 단어였다.

 

그런 와중에 ‘띠링’, 휴대전화에서 소리가 났다.

 

모르는 번호다. ‘광고인가?’하는 생각으로 속 내용을 보니, 인도네시아로 출국하는 나와 같은 처지인 분이 보낸 것이다.

 

나의 남편과 같은 일을 하는 남편을 둔, 나와 같은 처지의 아내들.

 

나를 포함해서 딱 세 명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나마 대화(對話)라도 하며 지낼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사는 삶을 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홀로, 자립(自立)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이미 뼈에 박혀 있을 정도였다.

 

남편의 내조(內助)와 육아(育兒), 집안 살림까지 내가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 누군가와 수다 떨고,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첫 아이가 내 뱃속에서 나온 순간 없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니 많이 이야기하고, 출국해서는 그 곳에서 모임을 자주 가지자는 말에 벌써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미 나는 내 일로도 충분히 힘들기에, 그 분들과의 대화(對話)는 일이 더 가중(加重)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보다 나이도 많은 분들이라 내가 막내가 되어 ‘큰 언니, 작은 언니’라 그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다. 어디서든 ‘장녀(長女)’소리만 듣던 내가 ‘언니, 언니’하니,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혼돈과 어색함 속에서 나는 남편과 함께 아이 둘을 데리고 낯선 나라, 인도네시아에 도착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말을 걸까 두렵고, 게다가 정말 현지인이 내게 말을 걸면 울고 싶어졌다. 속으로 계속 ‘괜찮다, 괜찮다’는 말을 수없이 해댔다.

 

나만 힘들고, 나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줄 알던 그 때, ‘언니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행히도 모두 똑같은 마음이었다. 공중에 붕 떠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불안한 마음이 안정되게 착지(着地)했다. ‘그래, 이렇게 적응하고 가족들이 아프지 않으면 된다, 그것으로 난 만족한다’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집안 살림에 육아(育兒)를 우리나라에서 했던 것처럼 하고, 위생관리를 좀 더 철저히 하며 내 가족들의 건강을 챙겼다. 그리고 필요한 인니어를 공부하자는 마음으로, 새벽에 일어나 남편의 아침밥을 차려주고 점심 도시락을 싸서 남편을 출근시킨 뒤에는 아이들이 깰 때까지 인니어 공부를 했다. 그런 작은 노력으로 현지인들과 약간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던 어느 날이었다.

 

새벽 두 시.

춥디추운 한파에 맨몸둥아리로 눈밭에 내쳐진 것 마냥 추워서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더운 나라에서 이게 웬 일이냐’며 이불을 다 찾아 꺼내서 덮었다. ‘감기 몸살인가보다’하며 남편도 깨우지 않고 누웠는데 서른다섯 인생에 이런 오한(惡寒)은 처음이었다. 그대로 세 시간이 흘러 남편이 일어났다. 이제, 오한(惡寒)은 지나가고 발열이다. 몸이 전(前)과 다르게 이상함을 느끼고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에게도 해 본 바 없는 ‘아프다’라는 말을 남편에게 했다. 깜짝 놀란 남편은 몸이 축 쳐진 나를 부축해서 병원 응급실로 직행했다. 병원에서는 그저 ‘급체’라며 팔에 주사 한 방을 놓고 약을 처방했다. 그렇게 집에 와 누웠는데, 새벽에 오들오들 떨리는 몸에 힘을 너무 줬던 터라 애들 돌볼 힘이 없다. 게다가 약을 먹고 나서는 증상이 없어지기는커녕 설사(泄瀉)와 구토(嘔吐), 복통에 두통까지 시작 되었다.

 

내 인생에 도움을 구해 본 적도, 도움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도움’이라는 것은 ‘민폐’라 생각되어 아이들이 냉장고의 물과 과자로 배를 채워도 도움을 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돌아가신 할배, 할매와 멀리 계신 엄마를 애타게 불러도 보고, 눈물을 흘릴 기력(氣力)도 없어지자 ‘이대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큰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안부 문자겠거니’하고 보니, ‘혼꾸멍을 내겠다’는 문자였다.

 

‘애들이라도 봐주며 도와주러 우리집으로 오겠다’는 큰언니에게 ‘괜찮다’했었더니, 이틀이 지나도록 몸져누웠다는 애들 아빠의 말을 전해 듣고 화가 났던 모양이다. 생사(生死)를 오가는 듯이 정신없는 터에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는 큰언니에게 야단을 맞으니 살짝 마음이 상(傷)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저대로 두면 집안에 환자가 더 늘겠다’싶어 큰언니에게 ‘도움’이란 것을 부탁해 보았다. 그랬더니 당장 언니가 아이들이 먹을 김밥과 내가 먹을 호박죽을 해서 가지고 왔다.

 

큰언니는 곧 죽을 듯이 누워있는 나를 보고는 아이들에게 밥 먹일 사이도 없이, 번갯불에 콩 구워지듯 후다닥 아이들과 나를 급하게 차에 태웠다. 큰언니가 둘째아이를 안고 첫째아이를 옆에 앉힌 채, 나를 우리나라사람이 의사로 있다는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병원으로 가는 중에도 끙끙대는 나의 굽은 등을 큰언니는 두 아이를 보며 정신이 없는 틈에도 쓸어내려주는데,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나였기에 큰언니에게 고마움보다는 미안함이 더 컸다. 큰언니가 데리고 간 병원에서는 급체가 아니라며 나에게 급하게 수액을 놓고 검사를 시작했다. 계속 주저앉고 일어날 힘도 없던 내가 수액을 맞고 누워 있자, 큰언니는 너무나도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혼자서 병(病)을 참는다고 병(病)이 이겨지니? 아이들이 있으면 아이들 생각에 더 빨리 치료할 생각을 해야지, 그 몸으로 애들 볼 생각을 어떻게 하니? 도움도 마음만 열면 되는 일이야. 다른 사람들은 도움을 받고 싶어서 난리인데, 너는 어쩜 도와준대도 사양(辭讓)만 하니. 몸이 이 지경인데……”

 

나는 할 말이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곧 검사 결과가 나오고 의사는 티푸스가 의심된다며 큰 병원으로 갈 것을 당부(當付)했다.

 

큰언니는 아이들 생각에 ‘입원(入院)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내 생각을 금방 읽어냈다.

“애들 생각은 하지 마. 언니가 언제든 돌봐 줄 수 있어. 그러니 입원(入院)해서 몸부터 치료해.”

 

큰언니의 말에 나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말하지 않아도 ‘같은 엄마’이기에 알 수 있는 마음, 바로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니… 고마… 워요.”

힘겹게 말을 하는 내 모습에 큰언니도 눈물을 글썽거리며 목이 잠겼다.

 

“나도 너 같아서 알아. 도움을 청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하지만, 도움을 받는 것은 마음만 열면 되는 일이야. 부끄러운 것도, 민폐를 끼치는 것도 아냐. 도움을 받은 것이 빚을 지는 것이라 생각하는 건 너무 어리석은 생각이야. 마음을 나누는 것뿐이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받는 것이고, 고마움을 느끼면 되는 것이지.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야.”

 

남편이 퇴근을 했다.

 

나는 남편에게 큰 병원으로 가서 입원(入院)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편은 마누라가 입원(入院)은 고사(固辭)하고 집에서 앓아누워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나의 결정에 아이들 걱정하지 말고 치료에 집중해 달라고 말하며 마음 한편으로 매우 고마워했다.

  

다음 날,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입원절차를 밟고 검사를 시작했다.

 

검사결과는 급체도, 티푸스라는 이 곳 풍토병도 아닌, 장염(腸炎)과 식중독이 겹쳤던 것이었다.

 

수액과 항생제를 팔에 맞으면서 점차 구토(嘔吐)가 멎고, 죽도 먹었다. 그러면서 점차 큰언니가 했던 행동과 말이 머릿속에서 생각나기 시작했다.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나였기에 어쩌면 그동안 나 자신과 내 가족들이 더 힘들지 않았을까. 엄마도 그런 나를 야단친 적이 있었다. 부모에게 알리면 지혜롭게 풀릴 일을 혼자 머리를 싸매고 누워 걱정을 한다며, 언제든 힘들면 말을 하라고 일러 놓으셨다. 하지만, 이미 한 몸이 되어버린 ‘내 걱정은 내가 하기’, ‘내 일은 내가 하기’가 쉽게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릴 때부터 서른다섯이 넘도록 지켜 온 고집(固執)스러운 철칙(鐵則).

 

친정 부모님의 호통도 깨뜨리지 못한 그런 내 삶의 철칙(鐵則)을 깨뜨린 것은, 바로 큰언니의 ‘도움’이었다.

  

철칙(鐵則)을 깨뜨린 첫 변화는 퇴원을 하고 바로 나타났다.

 

퇴원을 하고서도 심한 빈혈(貧血)로 몸을 가누지 못하던 나는, 애들이 바깥 음식만 먹어 탈이 날까 걱정스러워 집에 있는 반찬을 아무거나 달라며 작은 언니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작은 언니가 흔쾌히 그 손을 잡아 주었다. 부모도 형제도 없는 외로운 타국(他國)에서 나는 언니들의 도움으로 점차 몸이 회복(回復)되었고, 생각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여태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민폐를 끼칠까 염려(念慮)스러워 남의 집에 놀러가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이제는 큰언니와 작은언니가 손짓하면 무조건 달려가게 되었다.

그것도, 방글거리면서.

 

항상 장녀(長女)의 모습을 벗지 못하고 살았던 인생이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언니들’과의 인연, ‘생판 남’인 큰언니와 작은언니를 만나면서 내면(內面)에 숨겨져 있던 막내둥이의 모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정작 ‘가족’이어서 할 수 없던 이야기, 친구들에게는 ‘누워서 침 뱉기’라 할 수 없던 이야기들을 나는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서슴없이 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친구보다 더 친구 같고,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이곳 인도네시아에서의 ‘인연(因緣)’ 이야기.

 

장녀(長女)의 삶이 막내의 삶을 만났을 때, 비로소 도움의 손길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의 내 삶이 누군가를 돕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가며 얼마나 더 윤택(潤澤)해질 것인가를 기대하며, 오늘도 나는 언니들과의 수다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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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란 우수상 - 바람당선소감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열일곱 되던 해였습니다.

  

숫기가 없어 남과 어울리기 어려웠던 저는 항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살고, 항상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구석에 주저앉아 울기만 했던 연약하디 연약한 소녀였지요. 저는 그런 저를 달래기 위해 초등학교 이후로 그만뒀던 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제가 글을 쓰는 것의 아귀를 튼 것이었습니다. 일기를 쓰다 보니,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고, 어느새 저의 문제점을 제가 알고 고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일 여년의 시간이 지나 다행스럽게도 제 주위에는 많은 친구들이 저와 함께 웃고 있었어요. 저는 혼자가 아니었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일상의 행복은 더운 나라의 누군가에게 목을 적셔주는 일이고, 추운 누군가에게 작은 담요를 덮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별스럽지 않은 아주 작은 행복인 것이죠.

 

그런 작은 행복을 ‘제 7회 인도네시아 인터넷 문학상’에 당선되어 제 자신만이 아닌 뜻밖의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낯선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인니문화를 연구하시는 분들과 한인사회를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 모두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낯선 나라, 낯선 문화에 적응해 나가는 이 땅에 처음 발을 내딛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린 자식들을 키우느라 ‘글을 쓸 틈이 어디 있냐.’며 아내에게 핀잔을 매번 들으면서도, 퇴근하면 ‘공모전에 낼 글을 적었느냐’고 몇 날 며칠을 끈질기게 물으며 따라다니던 제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린 자식들을 키우기에도 바쁜 제가 '자카르타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공모전에 공모할 글 소재가 있겠느냐'고 투덜거려도, 퇴근하면 ‘공모전에 낼 글을 적었느냐’고 몇 날 며칠을 끈질기게 물으며 따라다니던 제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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