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정구선수 김복림을 기억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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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돌도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5-14 11:31 조회8,719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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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선수들의 페이지’(『여성』, 1936.5.)에 실린 김복림의 정구 경기 하는 모습.
여류선수들의 페이지’(『여성』, 1936.5.)에 실린 김복림의 정구 경기 하는 모습.
1931년에 체육계 권위자들에게 조선의 대표적 운동선수를 뽑아달라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이 설문에는 조선체육회와 조선축구협회 발기인이었던 김동철, 손기정 사진의 ‘일장기 말소’를 주도했던 동아일보 기자 이길용 등도 참여했다.
이 설문에서 ‘이영민 타격상’의 주인공인 야구선수 이영민이 1위를 차지했고, 2위가 김은배, 그리고 3위가 김복림(金福林)이었다(‘조선이 낳은 10대 운동가’, 『동광』, 1931.12.). 그러니까 김복림은 당시 여성으로서 가장 유명한 운동선수였던
셈이다.
김복림은 1926년 이화여자고보에 입학한 지 약 한 달 만에 참가한 전선(全鮮)여자정구대회에서 3연패를 노리던 일본인 팀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민족 대결’의 양상을 띤 이 경기는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나뉜 관중의 열띤 응원으로 한때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그때까지 조선인 학생은 결승전에 진출해 본 적도 없었는데 14살짜리 여고생이 우승을 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니, 조선인들의 기쁨과 흥분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할 만하다. “처음으로 내지인(內地人) 고녀(高女)와 실력을 다툴 수 있다는 것을 일반 운동 팬들에게 인식”시킨 계기였다(‘여류 선수들의 페이지’, 『여성』, 1936.5.). 어쩌면 그녀의 우승은,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못지않게, 조선인의 민족적 열등감을 몸(운동)으로 극복하게 해준 뜻 깊은 성취였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김복림은 십 년 넘게 여자 정구선수로 활약했지만, 오늘날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앞의 설문에서 2위를 차지한 김은배라는 이름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많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우리 안의 ‘민족주의’를 발동시키며 흥분과 감동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들 중 우리가 오래 기억할 선수는 몇 명이나 될까?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은 김은배, 권태하 같은 선배들이 1932년 LA올림픽에 참가해 6등과 9등을 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는 말을 한 바 있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김복림은 1926년 이화여자고보에 입학한 지 약 한 달 만에 참가한 전선(全鮮)여자정구대회에서 3연패를 노리던 일본인 팀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민족 대결’의 양상을 띤 이 경기는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나뉜 관중의 열띤 응원으로 한때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그때까지 조선인 학생은 결승전에 진출해 본 적도 없었는데 14살짜리 여고생이 우승을 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니, 조선인들의 기쁨과 흥분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할 만하다. “처음으로 내지인(內地人) 고녀(高女)와 실력을 다툴 수 있다는 것을 일반 운동 팬들에게 인식”시킨 계기였다(‘여류 선수들의 페이지’, 『여성』, 1936.5.). 어쩌면 그녀의 우승은,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못지않게, 조선인의 민족적 열등감을 몸(운동)으로 극복하게 해준 뜻 깊은 성취였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김복림은 십 년 넘게 여자 정구선수로 활약했지만, 오늘날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앞의 설문에서 2위를 차지한 김은배라는 이름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많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우리 안의 ‘민족주의’를 발동시키며 흥분과 감동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들 중 우리가 오래 기억할 선수는 몇 명이나 될까?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은 김은배, 권태하 같은 선배들이 1932년 LA올림픽에 참가해 6등과 9등을 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는 말을 한 바 있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오늘의 조선사회는 그 두 분의 존재를 씻은 듯이 잊어버리고, 만일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을 정신적으로까지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불쾌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1착을 해야 천지가 무너질 듯이 떠들고, 6착, 9착을 했다고 그들을 심적으로까지 후원·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두 분이 우리 전체를 대표해서 ‘운동 조선’을 널리 세계에 알리려고 장구한 시일을 앞서서 분투노력한 그 공을 몰라보는 일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민족의 제전’, 『삼천리』, 19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