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원시부족, 다니(DANI)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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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젊은여행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10-25 11:34 조회5,1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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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글은 네이버 블로그 마따하리님의 글을 발췌한것입니다
차후 원작자의요청에 의해 수정 삭제될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서울을 떠난 지 열 일곱시간,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국내선을 갈아타고 밤새도록 날아와 다음날 아침 이곳 이리안자야( Irian Jaya)의 주도(州都)인 자야푸라( Jaya Pura) 센타니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7시가 되어서 였다.
이리안자야는 그린랜드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뉴기니아의 서쪽 절반의 영토로서 이 섬의 동쪽 절반은 파푸아 뉴기니아로 불리우는 독립국가이며, 이리안자야는 1949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1963년 네덜란드 정부가 철수하자 강제로 합병하여 오늘날과 같이 인도네시아 영토로 확정짓게 되었다. 면적은 남한의 4배에 가까우며, 대부분의 지역이 열대우림과 고원,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고 통나무, 광물등 갖가지 자원이 풍부한 그야말로 자원의 보고이다. 인구는 2백만명, 저지대와 고지대로 나뉘기도 하며, 광활한 저지대가 있는가 하면 만년설과 빙하로 덮여있는 해발 5천미터의 산도 있어 열대 우림과 신비한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이지역에는 크게 나눠 4종족의 원주민이 살고 있는데 다니, 얄리, 라니, 아스맛족이 그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방 사람들과는 생김새부터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데, 새까만 피부와 곱슬머리로 미뤄볼 때 아프리카 니그로 계통이 아니면 호주 원주민처럼 남태평양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멜라네시아 계통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리안자야는 그린랜드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뉴기니아의 서쪽 절반의 영토로서 이 섬의 동쪽 절반은 파푸아 뉴기니아로 불리우는 독립국가이며, 이리안자야는 1949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1963년 네덜란드 정부가 철수하자 강제로 합병하여 오늘날과 같이 인도네시아 영토로 확정짓게 되었다. 면적은 남한의 4배에 가까우며, 대부분의 지역이 열대우림과 고원,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고 통나무, 광물등 갖가지 자원이 풍부한 그야말로 자원의 보고이다. 인구는 2백만명, 저지대와 고지대로 나뉘기도 하며, 광활한 저지대가 있는가 하면 만년설과 빙하로 덮여있는 해발 5천미터의 산도 있어 열대 우림과 신비한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이지역에는 크게 나눠 4종족의 원주민이 살고 있는데 다니, 얄리, 라니, 아스맛족이 그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방 사람들과는 생김새부터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데, 새까만 피부와 곱슬머리로 미뤄볼 때 아프리카 니그로 계통이 아니면 호주 원주민처럼 남태평양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멜라네시아 계통이 아닐까 추측된다.
대롱으로 성기 감싸면 정장
이리안자야의 도시들은 대개 해안이나 고원지대에 소택지를 중심으로 흩어져 살고 있으나, 어떤 곳은 깊은 열대 우림이나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육로가 발달돼 있지 못하므로 생필품은 대개 항공편으로 공급되지만 이것은 공항이 근접한 일부 도시에 국한된다. 별도의 입성(入城)허가증이 필요한 발리엠 계곡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비행기가 없으면 곧바로 고립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발리엠 계곡의 중심도시 와메나(Wamena)에 도착한 일행은 수마트라 출신의 현지 안내원을 따라 '지위까'라 불리우는 마을로 향하였다. 이곳은 발리엠 계곡에 사는 다니족의 중심 마을로, 원시적인 다니족과 개화된 원주민의 생활상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다. 발리엠 계곡은 흔히 연상케 되는 산골짜기와 같은 계곡이 아니라,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싼 일종의 분지와도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동서로 약 60km, 남북으로는 15km의 평원이 해발 1천6백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단히 쾌적한 기후를 보여주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하고 낮은 덥지만 그늘 밑에만 들어가면 무척 시원하다. 우기에는 거의 매일 비가 오는데, 주로 밤에만 오는데다가 아침이 되면 물이 모두 빠져서 길이 질퍽이지 않아 기분이 좋다. 가져간 고추장과 김치만으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서 부근의 한 다니족 부락을 찾았다. 다니족은 한 울타리 안에서 보통 서너 가족이 함께 공동생활을 한다. 부락 안에는 비교적 큼직한 움막이 하나있고, 그 양쪽으로 여자들의 숙소와 돼지우리, 창고, 부엌 등이 있다.
부락입구에 들어서자 주민들이 나와 일행을 환영했다. 다니족은 평생 목욕을 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돼지기름을 머리에 발라 멋을 내기도 했는데, 아침저녁의 추위를 막기 위해서 온몸에 돼지기름을 바르기도 한다. 이들은 돼지의 이빨로 얼굴을 장식하고 머리 띠를 매거나 목에 작은 강조개를 엮어 만든 '넥타이'를 걸치기도 했지만, 아래로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코테카'라 불리우는 끝이 점점 가늘어지는 길다란 대롱으로 성기만을 겨우 가리고 있다. 다니족의 정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코테카는 호리병박과 열매의 일종인데, 그 속을 파내고 성기에다 까운다. 끝이 가늘고 뾰족한 것으로 크고 작은 것, 꼬부라진 것과 굵고 가는 것등 여러 가지가 있다. 풀을 짓이겨 나온 즙을 성기에 바른 뒤 사용하는데, 어린아이들도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풀잎으로 성기를 잘 싸서 크기를 맞춘 뒤 작은 코테카에 끼운다. 코테카는 허리와 성기 밑으로 줄을 묶어서 고정시키는데, 그래서 과격한 행동을 해도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와 오랜 시간을 같이하는 동안 간혹 이 코테카가 빠지는 경우도 목격할수 있었는데, 그럴 때면 옆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얼른 몸을 돌려서 다시 끼우곤 했다. 외부에 드러난 코테카의 크기와 비교되어서 인지 성기는 생각보다 훨씬 '빈약'했다. 더러는 잘 때도 이 코테카를 착용하고 잔다고 한다. 우리가 보기에 코테카 하나만 달랑 걸친 것이 발가 벗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지지만, 다니족 남자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위 개화된 젊은이들조차도 옷(우리가 입는)을 입고 다니다가도 다니족의 전통적인 의식이 치러질 때는 코테카만을 착용한다.
발리엠 계곡의 중심도시 와메나(Wamena)에 도착한 일행은 수마트라 출신의 현지 안내원을 따라 '지위까'라 불리우는 마을로 향하였다. 이곳은 발리엠 계곡에 사는 다니족의 중심 마을로, 원시적인 다니족과 개화된 원주민의 생활상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다. 발리엠 계곡은 흔히 연상케 되는 산골짜기와 같은 계곡이 아니라,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싼 일종의 분지와도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동서로 약 60km, 남북으로는 15km의 평원이 해발 1천6백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단히 쾌적한 기후를 보여주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하고 낮은 덥지만 그늘 밑에만 들어가면 무척 시원하다. 우기에는 거의 매일 비가 오는데, 주로 밤에만 오는데다가 아침이 되면 물이 모두 빠져서 길이 질퍽이지 않아 기분이 좋다. 가져간 고추장과 김치만으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서 부근의 한 다니족 부락을 찾았다. 다니족은 한 울타리 안에서 보통 서너 가족이 함께 공동생활을 한다. 부락 안에는 비교적 큼직한 움막이 하나있고, 그 양쪽으로 여자들의 숙소와 돼지우리, 창고, 부엌 등이 있다.
부락입구에 들어서자 주민들이 나와 일행을 환영했다. 다니족은 평생 목욕을 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돼지기름을 머리에 발라 멋을 내기도 했는데, 아침저녁의 추위를 막기 위해서 온몸에 돼지기름을 바르기도 한다. 이들은 돼지의 이빨로 얼굴을 장식하고 머리 띠를 매거나 목에 작은 강조개를 엮어 만든 '넥타이'를 걸치기도 했지만, 아래로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코테카'라 불리우는 끝이 점점 가늘어지는 길다란 대롱으로 성기만을 겨우 가리고 있다. 다니족의 정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코테카는 호리병박과 열매의 일종인데, 그 속을 파내고 성기에다 까운다. 끝이 가늘고 뾰족한 것으로 크고 작은 것, 꼬부라진 것과 굵고 가는 것등 여러 가지가 있다. 풀을 짓이겨 나온 즙을 성기에 바른 뒤 사용하는데, 어린아이들도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풀잎으로 성기를 잘 싸서 크기를 맞춘 뒤 작은 코테카에 끼운다. 코테카는 허리와 성기 밑으로 줄을 묶어서 고정시키는데, 그래서 과격한 행동을 해도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와 오랜 시간을 같이하는 동안 간혹 이 코테카가 빠지는 경우도 목격할수 있었는데, 그럴 때면 옆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얼른 몸을 돌려서 다시 끼우곤 했다. 외부에 드러난 코테카의 크기와 비교되어서 인지 성기는 생각보다 훨씬 '빈약'했다. 더러는 잘 때도 이 코테카를 착용하고 잔다고 한다. 우리가 보기에 코테카 하나만 달랑 걸친 것이 발가 벗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지지만, 다니족 남자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위 개화된 젊은이들조차도 옷(우리가 입는)을 입고 다니다가도 다니족의 전통적인 의식이 치러질 때는 코테카만을 착용한다.
남편 죽으면 손가락 잘라 추모(追慕)
여자들은 허리 위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허리 아래만을 가린다. 풀잎이나 줄기를 말려서 밑으로 내려 엮으면 결혼하지 않은 여자이고, 이것을 가로로 엮어 걸치면 결혼한 여자이다. 움직일 때 허리 아래로 걸친 도롱이 속이 보이지 않도록 꽤나 신경을 쓰는 것이 놀라웠는데, 생각 밖으로 성(性)에 대한 부끄러움이 컸다. 일부 다처제지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대화를 하다가 들키게 되면 그 남자는 남편에게 벌로서 돼지를 줘야 한다. 여자의 부정은 결코 용납되지 않으며, 부락회의의 결정에 따라서는 이혼도 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들의 움막은 따로 마련 돼있다. 여자가 남자의 힘을 약화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관계를 맺을 때는 남자가 여자들의 움막으로 가는데, 이때 남자가 원하는 여자만 남고 다른 여자들은 자리를 비켜준다. 피임방법이 매우 독특한데, 여자가 자신의 왼쪽 겨드랑이 안쪽에 부채살 모양으로 나무 막대를 끼워 넣는다. 이 나무막대를 뺴면 다시 아이를 낳을 수가 있다고 한다. 출산 후에는 3-4년 가량 아이들 사이에 터울을 두며, 이 기간동안은 성생활을 피한다. 이것은 빈번한 부부관계가 남자의 힘을 약화 시킨다고 생각하는데다, 여자들이 염천(鹽泉)이나 밭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동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니족 여자들에게는 남편이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돌도끼로 손가락을 잘라 추모하는 풍습이 있다. 특히 남편이 죽는 경우에는 부인은 얼굴을 비롯한 온 몸에 진흙을 바르고 한 달 간을 추모한다. 이곳을 여행하는 동안 손마디가 뭉텅 잘린 나이든 여자들이 자주 목격되곤 하였다. 지금은 정부 차원의 지속적인 교육으로 인하여 이러한 악습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아직도 나이든 세대는 이 풍습을 끈질기게 고집한다고 한다.
다니족은 외국 관광객들을 그동안 자주 대했던 때문인지 카메라만 들이대면 정승처럼 표정을 굳히고 꼿꼿이 선 다음 촬영이 끝나면 예외없이 돈을 요구해 온다. 아이들도 관광객을 따라 다니며 시원한 나뭇잎을 손이나 얼굴에 대주고, 바위에 오를 떄는 손을 잡아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다니족 말로 주변을 설명하는가 하면,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며 하루종일 시중을 들려고 한다. 어린이들조차 관광객들의 '돈맛'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다니족 주민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부락의 주민들은 서서히 그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들의 움막은 따로 마련 돼있다. 여자가 남자의 힘을 약화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관계를 맺을 때는 남자가 여자들의 움막으로 가는데, 이때 남자가 원하는 여자만 남고 다른 여자들은 자리를 비켜준다. 피임방법이 매우 독특한데, 여자가 자신의 왼쪽 겨드랑이 안쪽에 부채살 모양으로 나무 막대를 끼워 넣는다. 이 나무막대를 뺴면 다시 아이를 낳을 수가 있다고 한다. 출산 후에는 3-4년 가량 아이들 사이에 터울을 두며, 이 기간동안은 성생활을 피한다. 이것은 빈번한 부부관계가 남자의 힘을 약화 시킨다고 생각하는데다, 여자들이 염천(鹽泉)이나 밭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동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니족 여자들에게는 남편이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돌도끼로 손가락을 잘라 추모하는 풍습이 있다. 특히 남편이 죽는 경우에는 부인은 얼굴을 비롯한 온 몸에 진흙을 바르고 한 달 간을 추모한다. 이곳을 여행하는 동안 손마디가 뭉텅 잘린 나이든 여자들이 자주 목격되곤 하였다. 지금은 정부 차원의 지속적인 교육으로 인하여 이러한 악습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아직도 나이든 세대는 이 풍습을 끈질기게 고집한다고 한다.
다니족은 외국 관광객들을 그동안 자주 대했던 때문인지 카메라만 들이대면 정승처럼 표정을 굳히고 꼿꼿이 선 다음 촬영이 끝나면 예외없이 돈을 요구해 온다. 아이들도 관광객을 따라 다니며 시원한 나뭇잎을 손이나 얼굴에 대주고, 바위에 오를 떄는 손을 잡아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다니족 말로 주변을 설명하는가 하면,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며 하루종일 시중을 들려고 한다. 어린이들조차 관광객들의 '돈맛'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다니족 주민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부락의 주민들은 서서히 그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고구마, 소금, 그리고 골초들
다니족이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였다. 당시 연합군의 항공기가 이착륙 하기에 마땅한 활주로를 찾기 위해 발리엠 계곡을 비행하던 중 미국 공군이었던 리쳐드 아키볼드가 '아이다호의 스네이크 밸리와 아주 흡사한'이 지역을 발견하였다. 1938년에는 네덜란드 정부와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후원을 받아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되었고, 그후 텍사스 출신의 선교사였던 로이드 반 스톤이 1945년 4월 이곳에 도착하면서 원주민들에 대한 선교활동이 이루어 지기 시작하였다.인도네시아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회교가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리안 자야 지역에서는 자바, 수마트라등의 외지로부터 이주해온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독교가 절대우세를 보이는 것도 이처럼 활발한 선교활동에 의해 주도돼 온 교육정책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다니족의 주식은 고구마이다. 찌거나 구워서도 먹는다. 옛날에는 바나나와 나무열매로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고구마가 들어오면서부터는 인구도 늘기 시작했다. 다니족은 최근에 와서 돈의 가치와 위력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고, 갖가지 문명의 이기로 만들어진 생활용품의 편리함에도 길들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돈을 벌고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지식이 없어 이로 인한 부작용이 곳곳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이튿날 아침식사를 찐 달걀 한 개씩으로 때우고 나서 부근의 가파른 산에 올랐다. 이 산의 정상부근에 샘이 하나 있는데, 이 샘은 다니족의 원시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소금을 제공해 주는 곳으로 발리엠 계곡 전체에 3개밖에 없는 염천의 하나였다.
우선 바나나의 커다란 줄기를 아주 가늘게 썰어 부드러운 실처럼 만든 다음, 샘물(바닷물처럼 대단히 짜다)속에 푹 집어 넣어 물이 흠뻑 배게 하고 이것을 꺼내 바위 위에 널어 말리면 수분이 증발되고 소금가루만 남게 된다. 이것을 훑어 모아 통에 저장하는데, 아직 소금기가 남아 있는 줄기는 돼지나 다른 가축들의 소금 섭취를 위해 사료로 쓴다. 여린 바나나 잎은 소금물에 절였다가 가지고 다니면서 빨아 먹기도 한다. 요즘은 소금이 외지에서 다량으로 공급되어 시장에서 팔리고 있지만, 아직도 소금을 사먹을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직접 소금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다니족 사람들의 표정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천진스럽기 짝이 없다. 걱정이라곤 도데체 없어 보인다. 언제나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추장은 부족의 안전과 생존을 책임지고 있어서 인지 늘 적극적인 자세로 방문객과 접촉해 협상을 하려 하고, 주민들은-아주 어린 아이들까지도-기회만 되면 담배를 달라고 요구한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담배를 마다하는 주민은 단 한사람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모두가 '골초' 들이다. 이들의 흡연습관은 지속적인 교육과 기독교의 전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했다.
다니족이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였다. 당시 연합군의 항공기가 이착륙 하기에 마땅한 활주로를 찾기 위해 발리엠 계곡을 비행하던 중 미국 공군이었던 리쳐드 아키볼드가 '아이다호의 스네이크 밸리와 아주 흡사한'이 지역을 발견하였다. 1938년에는 네덜란드 정부와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후원을 받아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되었고, 그후 텍사스 출신의 선교사였던 로이드 반 스톤이 1945년 4월 이곳에 도착하면서 원주민들에 대한 선교활동이 이루어 지기 시작하였다.인도네시아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회교가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리안 자야 지역에서는 자바, 수마트라등의 외지로부터 이주해온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독교가 절대우세를 보이는 것도 이처럼 활발한 선교활동에 의해 주도돼 온 교육정책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다니족의 주식은 고구마이다. 찌거나 구워서도 먹는다. 옛날에는 바나나와 나무열매로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고구마가 들어오면서부터는 인구도 늘기 시작했다. 다니족은 최근에 와서 돈의 가치와 위력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고, 갖가지 문명의 이기로 만들어진 생활용품의 편리함에도 길들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돈을 벌고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지식이 없어 이로 인한 부작용이 곳곳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이튿날 아침식사를 찐 달걀 한 개씩으로 때우고 나서 부근의 가파른 산에 올랐다. 이 산의 정상부근에 샘이 하나 있는데, 이 샘은 다니족의 원시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소금을 제공해 주는 곳으로 발리엠 계곡 전체에 3개밖에 없는 염천의 하나였다.
우선 바나나의 커다란 줄기를 아주 가늘게 썰어 부드러운 실처럼 만든 다음, 샘물(바닷물처럼 대단히 짜다)속에 푹 집어 넣어 물이 흠뻑 배게 하고 이것을 꺼내 바위 위에 널어 말리면 수분이 증발되고 소금가루만 남게 된다. 이것을 훑어 모아 통에 저장하는데, 아직 소금기가 남아 있는 줄기는 돼지나 다른 가축들의 소금 섭취를 위해 사료로 쓴다. 여린 바나나 잎은 소금물에 절였다가 가지고 다니면서 빨아 먹기도 한다. 요즘은 소금이 외지에서 다량으로 공급되어 시장에서 팔리고 있지만, 아직도 소금을 사먹을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직접 소금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다니족 사람들의 표정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천진스럽기 짝이 없다. 걱정이라곤 도데체 없어 보인다. 언제나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추장은 부족의 안전과 생존을 책임지고 있어서 인지 늘 적극적인 자세로 방문객과 접촉해 협상을 하려 하고, 주민들은-아주 어린 아이들까지도-기회만 되면 담배를 달라고 요구한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담배를 마다하는 주민은 단 한사람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모두가 '골초' 들이다. 이들의 흡연습관은 지속적인 교육과 기독교의 전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했다.
실전 방불케 하는 전쟁축제
와메나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일행은 이번여정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다니족의 전쟁축제와 돼지잡이 축제에 초대받았다.
전쟁축제에서는 약 40여명의 부락 원주민들이 부족간의 전쟁모습을 실연했다. 부락의 여인들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다른 부족에게 납치당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창과 활 돌도끼 칼 등으로 완전무장한 남자들이 보여주는 이 전쟁모습은 너무나도 진지해 마치 실제 상황에서 대적하는 것 처럼 아찔했다.지금도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몇몇 계곡의 부족들간에는 돼지나 여자 영토문제, 혹은 해묵은 원한관계로 인해 가끔 전쟁이 벌어진다고 하는데, 정부의 개입에도 한계가 있어 실제로
살인과 같은 비극적인 상황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지 다니족이 연출하는 전쟁장면을 보고 있자니 그때껏 우리가 보아온 다니족의 모습과는 완연히 달라 보였다. 눈에는 살기가 등등하고 창과 칼을 든 팔에는 일격필살의 힘이 들어가 있었다.
와메나는 외부로부터의 주류(酒類) 반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데, 이는 살상무기를 집안에 소지하거나 휴대하고 다니는 다니족이 술로 인해 이성을 잃을 경우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고를 근원적으로 막기 위한 정책적 배려에서이다. 우리 일행 역시 자야푸라 공항에서 꼼꼼한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와메나에서는 호텔 부근의 구멍가게에서 정가의 열 배를 주고 몰래 술 한병을 불법으로 구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축제 한마당이 끝나자 이번에는 돼지잡이 축제가 시작됐다. 다니족에게 돼지는 식량 이상의 의미를 갖는 부(富)와 권력의 절대적 상징물이다. 일부 다처제 관습이 남아 있는 이곳에서는 새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보통 다섯 마리의 돼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돼지를 많이 가진 자가 아내도 많이 거느릴 수 있다. 고구마를 주식으로 하고 있는 다니족에게 돼지를 잡는 일은 가히 축제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이처럼 특별한 날을 정해 돼지를 잡는 기회가 아니면 일년에 한두번도 고기 맛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먼저 적당한 돼지를 골라 두 사람이 양쪽에서 앞 뒷발을 잡고 번쩍 들어올리면 또 한 사람이 목덜미 급소에 활을 쏘아 단번에 절명시킨다. 귀와 꼬리는 장식용으로 쓰기 위해 잘라내고 미리 마련해 놓은 불 위에다 돼지를 놓고 털을 모두 태운 뒤 칼로 각 부위를 도려낸다. 한쪽에서는 커다란 장작더미 위에 돌멩이들을 놓고 불을 피워 달군다. 돌멩이들이 뜨거워지면 미리 파놓은 웅덩이 안쪽 벽에 돌멩이를 차곡차곡 쌓고, 야채 고구마 바나나잎 등을 썰어 넣어 돼지고기와 함께 덮어서 익힌다.
모든 절차는 이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진행된다. 약 두 시간이 걸려 요리가 준비되면 축제가 절정에 오르게 되는데, 여자들은 춤을 추고 남자들은 분주하게 요리를 나르고 먹는 것으로 하루해가 저물게 된다. 축제가 끝난 뒤 일행은 주민들과 선물을 교환하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다니족 원주민의 삶은 석기시대 인류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천진스럽고 단순하다. 문명과 애써 접촉하려 하지도 않는다. 문명은 오히려 다니족을 마음대로 활동하기 어려운 처지로 몰아갈 것이다. 그들에게 무거운 정신적 부담을 줘 자칫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유발시키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자연조건대로 살아가고 싶겠지만, 그들이 원치 않았던 상황은 개화(開化)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다. 벗고 다니는 것을 편하게 느끼던 그들에게는 시장에서 싸구려 옷이라도 사 입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으며, 그러자면 돈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지금 와메나에는 거죽으로 조악하게 만든 것이나마 영화관도 최근에 들어 섰고 경찰서 은행 시장 그리고 10여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이 있으며, 일제 지프가 관광객을 싣고 거리를 누비고 있다. 원시와 현대가 교차하는 곳, 다니족의 소리없는 몸부림을 보는 듯한 미묘한 기분으로 와메나를 뒤로 하였다.
전쟁축제에서는 약 40여명의 부락 원주민들이 부족간의 전쟁모습을 실연했다. 부락의 여인들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다른 부족에게 납치당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창과 활 돌도끼 칼 등으로 완전무장한 남자들이 보여주는 이 전쟁모습은 너무나도 진지해 마치 실제 상황에서 대적하는 것 처럼 아찔했다.지금도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몇몇 계곡의 부족들간에는 돼지나 여자 영토문제, 혹은 해묵은 원한관계로 인해 가끔 전쟁이 벌어진다고 하는데, 정부의 개입에도 한계가 있어 실제로
살인과 같은 비극적인 상황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지 다니족이 연출하는 전쟁장면을 보고 있자니 그때껏 우리가 보아온 다니족의 모습과는 완연히 달라 보였다. 눈에는 살기가 등등하고 창과 칼을 든 팔에는 일격필살의 힘이 들어가 있었다.
와메나는 외부로부터의 주류(酒類) 반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데, 이는 살상무기를 집안에 소지하거나 휴대하고 다니는 다니족이 술로 인해 이성을 잃을 경우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고를 근원적으로 막기 위한 정책적 배려에서이다. 우리 일행 역시 자야푸라 공항에서 꼼꼼한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와메나에서는 호텔 부근의 구멍가게에서 정가의 열 배를 주고 몰래 술 한병을 불법으로 구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축제 한마당이 끝나자 이번에는 돼지잡이 축제가 시작됐다. 다니족에게 돼지는 식량 이상의 의미를 갖는 부(富)와 권력의 절대적 상징물이다. 일부 다처제 관습이 남아 있는 이곳에서는 새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보통 다섯 마리의 돼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돼지를 많이 가진 자가 아내도 많이 거느릴 수 있다. 고구마를 주식으로 하고 있는 다니족에게 돼지를 잡는 일은 가히 축제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이처럼 특별한 날을 정해 돼지를 잡는 기회가 아니면 일년에 한두번도 고기 맛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먼저 적당한 돼지를 골라 두 사람이 양쪽에서 앞 뒷발을 잡고 번쩍 들어올리면 또 한 사람이 목덜미 급소에 활을 쏘아 단번에 절명시킨다. 귀와 꼬리는 장식용으로 쓰기 위해 잘라내고 미리 마련해 놓은 불 위에다 돼지를 놓고 털을 모두 태운 뒤 칼로 각 부위를 도려낸다. 한쪽에서는 커다란 장작더미 위에 돌멩이들을 놓고 불을 피워 달군다. 돌멩이들이 뜨거워지면 미리 파놓은 웅덩이 안쪽 벽에 돌멩이를 차곡차곡 쌓고, 야채 고구마 바나나잎 등을 썰어 넣어 돼지고기와 함께 덮어서 익힌다.
모든 절차는 이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진행된다. 약 두 시간이 걸려 요리가 준비되면 축제가 절정에 오르게 되는데, 여자들은 춤을 추고 남자들은 분주하게 요리를 나르고 먹는 것으로 하루해가 저물게 된다. 축제가 끝난 뒤 일행은 주민들과 선물을 교환하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다니족 원주민의 삶은 석기시대 인류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천진스럽고 단순하다. 문명과 애써 접촉하려 하지도 않는다. 문명은 오히려 다니족을 마음대로 활동하기 어려운 처지로 몰아갈 것이다. 그들에게 무거운 정신적 부담을 줘 자칫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유발시키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자연조건대로 살아가고 싶겠지만, 그들이 원치 않았던 상황은 개화(開化)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다. 벗고 다니는 것을 편하게 느끼던 그들에게는 시장에서 싸구려 옷이라도 사 입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으며, 그러자면 돈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지금 와메나에는 거죽으로 조악하게 만든 것이나마 영화관도 최근에 들어 섰고 경찰서 은행 시장 그리고 10여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이 있으며, 일제 지프가 관광객을 싣고 거리를 누비고 있다. 원시와 현대가 교차하는 곳, 다니족의 소리없는 몸부림을 보는 듯한 미묘한 기분으로 와메나를 뒤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