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년명필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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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데사드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12-02 03:42 조회2,484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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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년명필이 없는가
“소년 문장은 있어도 소년 명필은 없다.”는 말이 있다. 소년도 명문장 짓기는 가능한데 훌륭한 서예작품을 창작하기는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요즘에 나온 말이 아니다. 붓글씨가 필기 수단이던 때에 생긴 말이다. 음미해볼만 하지 않는가. 서예는 역사가 길다. 그 긴 역사를 살펴봐도 청년기에 명필로 이름을 드러낸 사람이 없다. 청년기에 명작을 창작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소년 명필이 없다”는 말의 답은 인서구로(人書俱老 = 사람과 서예는 함께 곰삭아 간다.)나 대교약졸(大巧若拙:크게 교묘한 것은 서툰 듯하다)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 애늙은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무리 영특한 소년이라도 내적으로 곰삭기는 어렵다. 능숙함을 넘어 저절로 서툰 맛(巧拙)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소년이 명필이 되기는 어렵다고 했을 것이다.
여기 훌륭한 교훈이 있다. 세월을 거스르는 것도 앞서가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년은 소년답게 그 맑음과 희망으로 오늘을 창작하고, 청년은 청년다운 활기차고 신선한 모습으로 지금 여기를 창작하는 것이 진리임을 가르쳐준다. 젊음을 낭비해서도 안 되고, 늙음을 한탄할 필요도 없다. 바로 오늘에 충실한 것이 최선의 자기창작, 곧 자연인 것이다.
곰삭은 것은 다 좋다.
된장과 간장 모두가 시간이 흘러야 곰삭는다. 묵은지의 깊은 맛을 갓 담은 김치에서 찾기는 불가능하다. 능숙함을 넘어선 서툰 맛은 어린이나 초보의 서툰 맛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서예, 곰삭은 맛이 나야하고, 참답게 서툰 듯해야 좋은 작품이라는 의미다. 서예가 어린이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예술이라는 것이 아니라, 서예가 추구하는 한 특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소년의 맑음이나 청년의 활기도 서예에 필요하다. 그런 개성을 지님으로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도 많다. 다만 서예작품이란 탈속한 맛, 숙성의 느낌이 은밀하게 스며날 때 좋은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이 확실하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가볍고 약삭빠른 사람보다 소탈하고 깊은 정이 드러나는 사람을 누구나 좋아한다.
그렇다면 서예는 왜 능숙함 세련미, 풍성함이나 강력한 힘 그런 특성들 보다, 하필 곰삭은 맛이나 서툰 느낌을 더 추구할까? 답은 간단한 곳에 있다. 서예가 학문을 닦은 사람들의 표현예술이었기 때문이다. 심신을 수양하고 시와 문장 꽤나 지어낸 사람들의 창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와 같은 출세(出世)의 길에서 쓴맛 단맛 다 봤던 인물들의 고해가 담긴 예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러서지 않고 선 자리에서 돌와봐도 사람의 삶이란 그저 소탈하게, 자연스럽게 사는 것만이 최상임을 깨달은 사람들의 심상을 드러낸 예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서예창작은 경험의 소산이다. 사람의 깊은 정과 닮은 서예, 오직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것을 최고로 치는 예술이 바로 서예라는 것을 가르쳐준 선조들이 얼마나 고마운가. 오늘 우리가 그 가르침을 즐길 수 있음이 참 감사하다.
나도 쓸 수 있겠다
곰삭은 맛, 서툰 느낌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정평이 난 작품이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판전(版殿)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사찰 봉은사 경내 판전의 현판이다. 이 작품은 추사 선생 서거 삼일 전 휘호로 전해진다. 일부 평자들이 추사 일생 일대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작품이다. 예스럽고, 조화로우며, 강한 듯 여유롭고, 빈틈없으면서도 너그러운 추사 선생의 그 많은 명작들을 넘어선 작품으로 존중받는 작품이다. 평자들은 추사 선생의 개성 강한 그 많은 작품들과 또 다른 개성을 지닌 그 작품에 탄성을 지른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이 작품은 보는 사람들의 느낌이 경우에 따라 크게 다르다. 서예의 문외한들은 “이렇게 못쓴 글씨가 그렇게 유명한가?”한다. 우연히 저자 곁에서 함께 감상을 하던 한 초등학생도“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고 거침없이 말했었다. 아이 엄마의 당황하던 표정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바로 이런 인상의 작품 판전, 대다수의 서예초학자들도 그 학생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일화가 하나 있다. 저자가 아는 학자 한 분이 추사 선생의 필적을 찾아 봉은사에 갔다. 그는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단번에 집어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작품을 찾지 못했다. 몇 바퀴를 돈 후 그 글씨가 있는 곳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현판은 몇 번이나 스쳐 지났던 곳에 있었다. 선입견이었을 것이다. 유명한 명작이니 눈에 번쩍 뜨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오직 평범해 보이는 그 글씨에 선뜻 관심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바로 이것이 서예다.
환동(還童)과 생숙생(生熟生)
환동(還童), 어른이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서예의 경지를 빗댄 말이다. 대게 일반인들은 간과할 부분이다. 그러나 환동은 서예의 의외성이자 참이다. 서예학습자는 반드시 깊이 새겨야할 부분이고 도달해야할 목적지다.
생숙생(生熟生)도 이와 다르지 않은 뜻을 지녔다. 생숙생에서 첫 번째 ‘생’은 태어남이요 시작이다. 입문으로서 널리 배우는 단계다. 가운데 ‘숙’은 익는 것으로서 성숙함이다. 의기양양할 때이고 화려할 때다. 깊어지기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옳게 성숙하기도 쉽잖다. 쉽게 도달되는 경지가 아니다. 마지막 ‘생’을 위해, 즉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배전의 깨달음을 위해 노력해야할 때다. 어쩌면 숙의 단계가 99%의 노력이 필요한 때였다면, 마지막 ‘생’의 단계는 1%의 천재성이 필요할 때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생’은 서예창작 기법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으로 도달해야 할 경지다. 추사 선생의 작품 ‘판전’이 이 경지라 할 수 있겠다.
작품 판전에 대한 서예작가들의 반응은 어떤가? 그 작품을 보면 작가들은 추사 선생의 용기에 넋을 잃는다. 아무것도 의식함이 없이 기교나 법식을 그렇게 떨쳐낼 수 있는 용기에 놀란다. 과연 추사 선생임을 절대 공감한다. 그리고 그렇게 욕심을 지워버려야 한다는 사실에 입을 모은다.
서예창작이 지향하는 바를 설명하려는 것이 좀 길었다. 서예창작에도 삶에도 숙성이 필요하다는 의미의 설명이 길어졌다. 우리 모두의 삶, 우리들의 현실에서 지향하는 바가 이와 다름없지 싶어 장황해졌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세월만큼의 높이가 있다. 경험만큼의 깊이가 있다. 이것은 모두 삶의 기반이다. 붓을 잡으면 바로 명필이 될 기반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는가? 서예의 창작세계와 만나시라.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붓을 잡고 먹을 갈자. 명필이 되자. 자기의 삶을 스스로 명품으로 창작하자.
댓글목록
소존님의 댓글
소존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서예는 단기 속성반이 없는 이유가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작품을 보면 사람냄새가 나고 작가의 인생 철학이 느껴지고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느껴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협지에서 말하는 몇갑자 내공을 뿜어 낸다고 할까요.
이런 경지에 오르기 까지는 오랜시간 동안 창작활동을 한 결과이겠지요?
손형근님의 댓글
손형근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나이는 이미 숙성이 되었는데 나의삶은 아직 숙성이 덜도었지 싶네...ㅎㅎ
데사드림님의 댓글
데사드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겸손의 말씀.
통역무역컨설턴트님의 댓글
통역무역컨설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데사드림님의 댓글
데사드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공감해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