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와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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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데사드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12-27 10:49 조회1,521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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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능사인가
원고를 쓰기 시작한 지 석 달여다. 서예창작을 바탕으로 자기창작의 한 방법 제시가 목적이었으므로 이래저래 창작, 창작 어지간히 외친 셈이다. 어쨌든 늘 뇌리에서 맴돌던, 심지어 잠자리에서도 꼬리를 물던 생각들이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로 마감을 앞두고 있다. 이제 세부적인 부분에서 다듬어야 할 몇 꼭지와 책에 삽입할 도판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일이 남았다.
출판사에 보낼 출간 기획서를 작성하려다 보니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다. 다듬어지지도 않은 원고를 여기저기서 뚝뚝 떼어 내 웹에 올리면서 생긴 의문이었다. 바라던 데로 웹을 통한 독자들의 피드백도 있었다. 저자가 우려했던 것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다.
과연 창작만이 능사인가? 지나치게 창작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여가에 먹을 갈고 붓을 들어 즐기려는데 왜 자꾸 창작이란 고난의 길로 안내하는가? 꼭 창작해야 서예학습을 한다는 것인가? 하는 반문들이 생겨났다. 매우 현실적인 반문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현재 저자의 안내로 서예창작을 공부하는 분 중에도 특별한 목적을 가지기보다는 적당히 즐기려는 마음으로 입문한 학습자들이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하기는 서단의 프로 작가임을 자처하면서 창작활동과는 무관하게, 오직 서예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충분히 이해하는 부분이다.
이런 몇 가지를 고려해서 이쯤해서 이 책의 목적인 ‘서예창작에 의한 자기창작’의 개념을 좀 다른 각도로 재고하려고 한다. 함께 생각할 여유를 갖기 위해 현실적인 몇 가지 사례를 들겠다.
다시 살피는 서예창작
한국인들의 정서로 인도네시아 서민들을 바라보면 애가 탈 때가 많다. 이 큰 나라, 자원이 풍부한 나라, 좋은 환경을 보유한 나라에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빈둥빈둥 노는 사람도 너무 많다. 직업을 가진 사람도 크게 미래를 대비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돈 빌리기를 즐기고 거짓말도 잦다. 훔치기도 비일비재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한국인다운 정을 표출한다. 미래를 위해 평소 아끼고 저축하라고 진정한 마음으로 충고를 한다. “아이를 잘 키워야 하지 않는가? 집도 사고 여유롭게 살아야 하지 않는가?” 하고 온정의 간섭을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전 직원에게 통장을 만들어 주는 현실적인 한국인 기업주도 상당수다.
인도네시아 서민들은 그냥 가난하게 사는 것에 익숙해 있다. 분명 더 잘 살고 싶다고 하면서도, 지금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그냥 산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삶의 행복도가 한국인들보다 훨씬 높다는 점이다. 조사 기관에 의한 수치만 본 것이 아니다. 저자가 가까이 살면서 보니 정말 평화롭게 산다. 가난한 이웃들이 많이 모여 사는 산마을 살이 삼 년여에 저자는 한 번도 다투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 자기 삶을 비관하거나 남과 비교하는 언행도 듣고 보지 못했다. 무질서의 극치를 겪어도 개탄하지도 않는다. 마치 ‘이렇게 살면 되는 것 아냐?’ 하고 되묻는 듯싶다.
이 상황을 기후와 토양으로 인해 거저 얻는 수확이 많아서 그렇다고 해석하는 한국인이 있다. 한 세기 전쯤에는 날마다 춤추고 노는 것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그에 비해 부지런해졌다고, 바로 그 달라진 부분을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다. 틀린 해석과 풀이가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충고를 들어야할 대상이 누구일까? 그 대상이 뒤바뀐 것은 아닐까?
동포의 집에 도우미 생활 29년째인 인도네시아 여성이 있다. 그의 미혼 때 시작한 도우미 생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가정을 이룬 다음에도 변함없이 이어졌고, 최선으로 그 일을 하고 있다. 그의 변함없음이 동포의 가족에게는 제법 커다란 안정요소다. 물론 그 도우미 또한 안정된 수입으로 그의 가정도 꾸리고 자녀들 교육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지인의 회사 사무실에는 20년째 청소와 커피 심부름만 하는 인도네시아인이 있다. 그의 성실함에 현장 작업과 같은 다른 일을 시키려 해도 본인이 거부한다고 했다. 옮겨주려는 자리가 급여가 더 높은 자리임에도, 그는 그냥 그 일을 하겠다고 한단다.
이 두 사례에도 생각해볼 요소가 많다. 분명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요소가 공존한다. 이들은 정말 착한 사람들이다. 부러울 때가 많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 물을 줄 모르는 것일까? 묻지 않는 것일까? 환경에 의해서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일까? 혹 무책임의 극치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는 데서 오는 것 아닐까? 핑계가 잦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300여 년간이나 이 나라 저 나라 사람들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수탈당하고 지배를 당하며 산 것은 어찌 봐야 할까?
“사람도 착함을 지킬만한 독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 착함이 자기방어수단을 갖지 못하면 못된 놈들의 살만 찌우는 먹이가 될 뿐이다.” 산약초 같고 풀향기 같은 삶을 살다간 작가 전우익 선생의 말이다.
대부분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을 접했을 것이다. 어떤 느낌이었는가? 저자는 처음 그 작품을 보고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은 역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고뇌하는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오고 깨우침을 준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했다. 오래오래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질문이 생겼다. 질문을 했다. ‘생각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작품은 작품일 뿐 아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건 로댕이 표출한 생각으로 오직 형상이었다. 그 이상이 아니었다. 다만 보는 사람 각자가 그 생각만큼 다양한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보고 느끼는 사람의 것이 될 뿐이었다.
그렇다. 겉과 속은 이렇게 다르다. 겉을 봐서는 속을 알 수가 없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사이에는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틈새가 있다. 충고에도 틈이 있고, 겉으로 보이는 행복도에도 생각해볼 여지가 존재한다. 막연한 착함은 죄를 돕기도 한다. 그러므로 오직 찾아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자기 깨달음이다.
자기창작, 각성으로부터
각성, 각성이 없으면 밖으로부터 밀어닥친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다. 각성이 없는 곳에 변화가 밀어닥치면 불행이 초래된다. 복권 당첨과 같은 일확천금이 생긴 사람 상당수가 이전보다 불행해지는 이유이겠다.
날마다 시간마다 각성하면 좋을 이유다. 치우치지 않은 정신의 경계를 유지하면 좋을 이유다. 욕심부려도 지나치지 않고, 비교당해도 개의치 않을 만큼 단단히 마음을 챙기면 행복할 이유다. 자기를 새롭게 창작하자.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고 자조하지 말자.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자. 사람으로 태어나 생명을 가진 이상,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자기를 창작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그것이 삶의 과제임을 잊지 말자.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자기에게 스스로 낙관을 찍자는 주장, 서예창작이 능사이되, 억지가 아닌 이유가 이제 좀 더 확실해지지 않았는가.
댓글목록
소존님의 댓글
소존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선생님의 저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독자와 학생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까지 저자인 선생님께서 고려하는 것은 가혹한 짐이라는 샡각이 듭니다.
독자 본인의 그릇만큼, 필요한만큼 소화를 하겠지요.
손명석님의 댓글
손명석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멋진글감사해요
데사드림님의 댓글
데사드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