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초 김영주 고희기념 부부서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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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데사드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80.♡.86.45) 작성일14-10-19 07:59 조회3,482회 댓글0건본문
자서
아! 멋진 연기(緣起)의 힘이여
아호가 지닌 힘
운초(雲草)! 내 아호다. 무려 30여 년 전 나이 40줄에 들어서면서 자호를 했던 별칭이다. 그때 내가 문인이나 예술가가 아니며 조선시대 선비도 아니니 특별히 아호를 가질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 때는 그때 나름 연유가 없지 않았다. 그즈음 결성된 한 친목단체에서 아호 사용을 주도한 친구가 있었고, 회자되는 유명인들의 아호는 작호의 명분과 방향이기도 했다. 아무튼 구름운(雲), 풀초(草), 나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 별칭은 내게 선택이 되어 이렇게 저렇게 쓰고 불리면서 내 것으로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아호에 대해서 참 새삼스러운 것이 바로 요즘, 칠순전을 준비하면서다. 내가 필묵을 가까이 한 것이 필연이 아니었나 생각도 들고, 칠순 부부전이 아주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아호를 부지기수로 사용해왔고, 서예를 공부하게 되면서 부터는 본격적으로 자랑스럽게 사용해왔다. 공장 안에 자리 잡은 정자에 아호를 딴 운초정(雲草亭) 현판을 걸기도 했고, 아호를 새긴 인장을 활용한 작품을 상당 수 해왔다. 아울러 서예동호인들 간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운초로 불린다. 어디 그 뿐인가 한국의 권위 있는 공모전에 입상을 하여 내 아호와 이름 석 자가 아로새겨진 작품이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 걸린 것이 그 몇 차례이던가. 왈 아호가 때를 제대로 만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순기념 부부전이란
대 이벤트를 준비하다 보니 아호에 대한 생각이 더 각별해지는 것이다. 역시 그때 아호를 지어 사용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고희 기념전과 책 발간
각설하고, 칠순을 기념한 부부전은 정말 우여곡절의 연속이다. 거기다가 과거의 흑백 사진, 가족의 글도 한데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하기로 했으니 대충 때울 일도 아니지 않은가. 마음에 부담을 갖기 시작하니 사정을 알 리 없는 무심한 날자만 빠르게 흘렀다. 정해진 날자는 줄어드는데 먹을 찍은 붓은 화선지 위에서 수없이 OB를 내댔다. 골프장에서의 OB보다 더한 손실이었다. 칠순을 맞은 마음이 더 늙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짧은 경력에 ‘고희기념 부부전’이란 거창한 명칭도 부끄러운데 수고하고 망신을 당하느니 중도에 그만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처음 시작이 그랬듯이 함께할 아내 시후당과 벗 묵정이 있지 않은가. 고희 값을 해야 하니 쉽게 물러설 수도 없었다. 물론 그렇더라도 작품 제작에서부터 전시 기획과 도록 제작 진행 등 전반에 걸쳐 지도해주는
인재 손인식 선생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먹을 갈고 또 갈고 파지를 내고 또 내는 시간들이 쌓였다. 아내 시후당은 “뭔 전시냐?”고 펄쩍 뛸 때는 언제고 틈만 나면 먹을 갈아 연습을 하면서 오히려 나를 향해 채근을 해댔다. “조금만 더해보세요”, “몇 장만 더 써보세요” 인재 선생의 작품을 심사하는 잣대도 점점 까다로워졌다. 센툴의 인재선생댁을 수시로 오르내려야 했다. 역시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하는 실천은 게으른 능력보다 우위다. 시간이 흐르고 노력이 더해지면서 내 붓질도 조금씩 작품에 가까워졌다.
하나 둘 완성된 작품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예 정한 숫자만큼의 작품을 마쳤다. 과거의 작품들도 한데 모았다. 일별을 해보니 아직 모자란 것이 내 눈에도 보인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스스로가 가히 장하다는 생각도 들고, 뿌듯한 마음 금할 길 없다. 한 숨을 돌리고 나니 책 발간을 위해 준비할 것이 한 둘이 아니다. 빛바랜 옛 사진을 찾아 한국의 집도 뒤지고 인도네시아 집도 뒤졌다. 과거를 돌아보며 내 살아온 자력을 써야 했다.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들이 쏠쏠한 재미기도 했다. 가족들의 글도 재촉해야 했다. 고희기념 부부전을 보는 소회를 좀 쓰라고 했더니 아들 녀석은 과거의 아버지에게 섭한 마음을 은근히 드러내놓았다. 며느리는 내 이력에 근거해 기발하게도 시아버지 고찰을 해내기도 했다. 사위들은 장인 장모 공경한다는 소회를 나름 밝히기도 했는데, 하! 하! 언제 이런 소중한 고백들을 헌사 받을 수 있더란 말인가. 그리고 언제 이렇게 가족 모두가 하나의 주제로 동질감을 만끽할 수 있더란 말인가. 덤으로 마음 뿌듯했던 것은 내 나이 칠순과는 상관없이 자식들 성가하여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는 사실 확인이기도 했다. 남긴 것 없이 세월만 빠르다고 한탄을 했더니, 이제 돌아보니 해놓은 것 없이 그저 세월만 보낸 것은 아닌 셈이다.
아! 감사한 인연이여
젊은 시절 아호 사용이 유별난 것이라면, 칠순기념 부부전도 주제 넘는 일이 확실하다. 칠순전이 백세시대를 대비한 일이라 생각하는 바이니 누가 들으면 이 또한 황당한 일이라 할 것이 아닌가? 하여튼 유별나고 주제넘고, 황당한 데로 다 일맥상통해서 좋다. 나 운초다워서 좋다. 얼씨구 참 좋다. 불교의 가르침으로 예를 들면 이 모두가 어찌 연기(緣起)가 아니랴. 하니 공장 한구석에 정자를 세운 것도, 거기서 고상한 취미생활 좀 해보자고 몇 몇 지인들 모아 선생을 모신 것도 다 연기의 결과다. 맘 같아서는 대뜸 일필휘지 작품이라도 당장에 해낼성 싶은 이 사람에게, 선생께서는 선 몇 개 그어주며 몇 달이고 선긋기만 시킬 것 같던 첫 시간도 인연의 한 대목이고, 체본 열심히 베끼다시피 하여 3년여 만에 첫 출품한 작품이 서울서예대전에 대뜸 특선에 걸린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의 한 페이지이리라.
어쨌든 인재선생께서 고희전이란 인연을 세워준 것은 인연 중 백미라 할 수 있겠는데, 처음 그런 제안을 들었을 때는 그저 황당하기만 했다. 요즘 세상에 칠순 잔치도 쑥스러운 일인데 어찌 모자란 솜씨로 전시를 하고, 대강이지만 인생을 반추하고 이를 빌미하여 책을 발간 한단 말인가.
과연 인연은 인연을 낳고 또 다른 인연으로 나아감이니 아! 연기의 끝없음이여!
나이 칠십을 빌어 나름의 계단 하나 놓는 느낌이다. 모든 것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 또한 더없이 소중한 것이 아닌가. 나이 칠순에 한 과정을 맺고 나아가니 모자란 중에도 보람 한 가득이다. 이 보람은 분명 이 전시를 기획하고 진행에 온 힘을 기울여 주신 인재 손인식 선생의 덕이다. 깊이 감사드린다. 내자 시후당을 비롯 우리 가족 모두는 함께 기쁜 마음일 것이라 믿는다. 아울러 축하의 말을 주신 재인니 한인회 신기엽회장과, 재인니 상공회의소 송창근 회장, 멋진 장소를 제공해준 자바 팔레스 호텔 박재한 사장, 20여 년 동안 백두회를 통해 한결같이 우정을 나누어온
선배 이진호회장, 최정남회장, 김우재회장, 함께 고희를 맞이한 박헌식회장, 늘 힘이 되는 자필묵연 회원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2014년 11월
운초 김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