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대학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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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1-21 10:51 조회3,389회 댓글2건본문
1965–66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9. 후유증
1) 최초의 충격파
수카르노의 나사콤 체제가 무너져 내렸다. 나사콤 체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던 PKI가 다른 두 세력인 군과 이슬람 정파들에게 의해 파괴된 후 군이 전권을 장악했다. 무슬림들은 더 이상 수카르노를 신용하지 않았고 1966년 초 수하르토는 공공연히 수카르노의 권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카르노는 떠오르는 군부의 권력을 누르지 못했지만 쿠데타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PKI에게 지우라는 수하르토의 요구는 끝까지 거부했다.
수카르노는 1966년 2월 1일 수하르토를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그해 3월 11일 표면상으론 질서회복을 위해 수하르토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내용을 담은 수뻐르스마르(Supersemar) 서한을 통해 국회와 군에 대한 통제권을 수하르토에게 넘겼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67년 3월 12일 수카르노는 국민자문의회(MPRS)에서 탄핵당하고 수하르토가 대통령 대행으로 임명된다. 1968년 3월 21일 국민자문의회는 수하르토를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선출했다.
당시 외국을 여행 중이거나 해외에 체류하고 있던 수많은 인도네시아 좌익인사들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중국대사로 나가 있던 자워토(Djawoto)는 소환을 거부하고 여생을 인도네시아 밖에서 보냈다. 작가들 중에서도 이러한 유배생활을 보내면서 글을 썼다. 이러한 인도네시아 유배문학은 새 정부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 있었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국제사회에서 출판되어야만 했다. (사진: 자워토 당시 주중대사)
1965년 12월, 자카르타 소재 미국 대사관은 “인도네시아에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외국계 석유회사들은 모두 쫒겨났을 것”이란 내용의 전문을 워싱턴에 보냈다. 1998년 하반기에 인도네시아에 대한 정보분석기관은 이런 보고서를 냈다: “수하르토 정부 경제 프로그램의 핵심적인 부분….은 외국자본이 다시 돌아오도록 양팔을 벌리는 것이다. 이미 25개의 미국 및 유럽회사들이 수카르노에 의해 국유화된 광산, 부동산 및 다른 기업들의 운영권을 되찾았다. 자유주의 입법이 이루어져 새로운 민간 외국투자들을 유치하고 있다. 이 자유주의 입법은 새로운 민간 외국인 투자 유치를 가능케 했다…..아직 전인미답의 분야와 다름없는 니켈, 구리, 보크사이트, 삼림 등에서도 괄목할 만한 외국인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중 가장 전망이 밝은 것은 …..석유산업이다.”
이 학살사건은 동티모르 점령과정에서 벌어진 제노사이드 성격의 침략 바로 직전 사례였다. 같은 군장성들이 이 두 번의 제노사이드의 전개를 감독했으므로 그들은 1965년 학살사건 당시 동원했던 폭력적인 방법들을 동티모르에서도 똑같이 사용하도록 휘하 부대들을 독려했다.
2) 세계반응
서방국가들은 냉전 한가운데에서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학살과 숙청을 대체로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로 간주하는 시각을 견지했다. 서방의 정부들과 매체들은 PKI나 점점 더 좌경화되어 가던 수카르노의 “구질서 정권”보다 수하르토와 그의 신질서 정부에 호감을 가졌다. 영국 대사 앤드류 길크라이스트(Andrew Gilchrist)는 “난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약간의 총질이 실질적 변화의 본격적인 전조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는 보고서를 런던에 보냈다. 학살에 대한 보도는 서방 정보부들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다. 인도네시아에 입국이 금지된 언론인들은 현지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에 대한 정보를 서방 대사관들의 공식 성명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자카르타 소재 영국 대사관은 싱가포르 정보부에 보도를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적당한 프로파간다의 소재로서는 장성들을 살해한 PKI의 잔혹성….PKI가 해외 공산주의자들의 주구로서 인도네시아를 전복하려 했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사용하고….영국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철저히 은폐해야 함.”
(왼쪽)헤롤드 홀트 호주수상, (오른쪽)석유사업가 H.L. 헌트
US 뉴스와 월드리포트(U.S.News & Woerld Report)는 “인도네시아: 한때 불모지였던 곳에 피어난 희망”(Indonesia: Hope... where there was once none)이란 식의 헤드라인을 뽑았고 호주의 해롤드 홀트(Harold Holt) 수상은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50만에서 1백만 명에 달하는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쫒겨났다면 바람직한 방향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라 상정하는 것이 맞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익 석유사업가 H.L.헌트(H.L. Hunt)는 인도네시아가 냉전 속에 미국에게 비친 한 줄기 밝은 빛이라 주장하며 수카르노의 축출을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자유진영의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말했으며 타임지는 PKI에 대한 탄압을 “아시아에서 지난 수년 간 나온 것 중 서방 최고의 뉴스”라며 수하르토 정권을 “답답할 정도로 헌법적”이라 찬양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 BBC 기자였던 로버트 찰리스(Robert Challis)는 이를 “서방 프로파간다가 거둔 위대한 승리”라고 훗날 회고했다. 서방 매체 기자들은 학살의 고의적이고도 조직적 성격에 대한 육군의 책임을 축소하려는 인도네시아군의 주장을 기계적으로 되풀이 했고 그대신 인도네시아의 시민들을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전형적 동양인들이라며 비하했다. 한 뉴욕타임즈 기자는 “한 국가가 광기로 날 뛸 때’(When a Nation Runs Amok)란 제목의 기사에서 폭력적이고 “인간의 목숨이 가치가 없는 아시아”에서 학살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라고 쓰기도 했다.
학살사건에 대해 미국무부 정보관료인 하워드 페더스필(Howard Federspiel)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일어난 일인데 그들이 찢겨 죽었던 잘려 죽었건 누가 신경이나 쓰겠소?”라는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왼쪽)로버트 F. 케네디, (오른쪽)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
미국 내 저명인사들 중에선 오직 로버트 F. 케네디만이 이 학살사건을 비난했다. 1966년 1월 그는 “우리는 나치독일과 공산주의자들이 자행한 비인간적인 학살행위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왔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받은, 그것도 악당이 아니라 희생자일 뿐인 10만 여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을 비인간적으로 학살한 사건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입니까?”라고 말했다.
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Sakharov) 박사는 이 학살사건을 “비극적 사건”이라 칭하면서 “지극히 반동적, 인종차별적, 군국주의적” 이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곤 소련은 대체로 침묵을 지켰다. 당시 소련과 중국은 관계가 소원하다 못해 적대적으로 변해가던 시절이어서 중국에 가까운 PKI를 소련이 공개적으로 편들기 좀 곤란한 측면도 있었으리라 보인다. 중국 정부는 이 사건을 “무시무시하고 악독한…., 역사상 전례가 없는 범죄행위”라며 이 비난을 쏟아냈다. 중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폭력을 피해 탈출한 인도네시아 좌익인사들에게 도피처를 제안하기도 했다. 한 유고슬라비아 외교관은 “설령 정치국(PKI 지도부를 지칭함)이 죄를 지었다 한들 그게 어찌 제노사이드를 정당화 할 수 있단 말이요? 죽이려면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죽여야지 (9.30 사태 음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상관도 없는 10만 명의 일반인들을 죽여서는 안되는 것 아니오?”라며 항변하기도 했다. 북한조차 수하르토 정권을 “군사파쇼정권”이라고 비난했다.
한편 유엔은 이에 대한 논평을 회피했다. 수하르토가 인도네시아를 유엔에 재가입시킬 당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알바니아만이 유일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것이다.
9. 외세의 개입
그것이 인도네시아 육군에겐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난 아마도 엄청난 피를 내 손에 뭍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꼭 철퇴를 내리쳐야만 할 결정적인 순간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니까.
-로버트 J. 마튼스(Robert J. Martens)
인도네시아군에 공산당 명단을 제공한 자카르타 주재 미대사관 정치담당 직원
이 시기에 미국 정부가 이 학살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인도네시아 정부에 무슨 말을 속삭였는지는 해당 기록이 미 정부문서보관소에 아직 비밀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으나 최소한 미국 정부는 이러한 집단학살을 가능케 할 돈과 통신장비를 공급했고 KAP-게스티뿌를 사냥하는 부대들에게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인 5천만 루피아를 공급했으며 PKI 지도부로 의심되는 표적 수천 명의 이름을 인도네시아 군에 공급한 것만은 분명하다. 1963년부터 1966년 사이 자카르타의 미대사관에서 정치담당으로 일한 로버트 J. 마튼스는 1990년 캐시 커데인(Kathy Kadane)이란 기자에게 말하기를 그가 국무부와 CIA 요원들을 지휘해 공산당 지도부 약 5천 명의 명단을 작성케 하고 이를 즉시 인도네시아군에 공급했다고 말한 바 있다.
커데인은 명단공개 승인이 주인도네시아 미국대사관 최고위 관료인 마샬 그린(Marshal Green) 대사와 정보부문 수장 에드워드 마스터스(Edward Masters)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했으나 마스터스는 이를 부인했다. 마튼스는 그러한 결정적 시기에 절차를 따지는 관료들의 미적거림을 피하기 위해 승인 없이 움직였다고 말했다.
CIA가 2001년 덮으려 해던 국무부 발간 ‘미국의 외교 1964-1968년판’(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4–1968)에서는 1966년 마샬그린 대사가 말하기를 숙청이 벌어지던 당시 미국 대사관이 공산당 지도자들의 명단을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제공했으며 사실 그 명단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PKI 지도부의 기본적 정보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인도네시아 치안당국이, 그 명단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전문을 워싱턴에 보낸 바 있다. 이 전문은 마튼스가 작성해 마스터스의 승인을 득한 것이었다. 학자들 역시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수하르토의 병력에게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전해 주었다는 주장을 확인해 주었다. 특히 마크 아론스(Mark Aarons)는 인도네시아군이 그 명단을 전달받으며 거기 이름이 등재된 이들이 집단학살 상황에서 반드시 제거될 것이라 말했다는 것이다. UCLA의 역사학교수 지오프리 B. 로빈슨(Geoffrey B. Robinson)은 미국 정부 관료들, 특히 마샬 그린이 “그 사건 속 미국의 역할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 비망록과 기사들을 쏟아내면서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의 정치적 충성심과 진실성을 문제삼았다”고 말했다. (사진: 마크 아론스)
로버트 크립은 2002년 저서에서 “미국이 반공 세력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PKI 당원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명단을 인도네시아군에게 넘겨주는 식으로 학살을 부추겼다는 상당량의 증거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이 간여해 이 학살의 규모가 괄목할 만큼 증가했다는 증거는 댈 수 없었다. (사진: 로버트 크립 교수)
마크 아론스는 마샬 그린이 학살을 부추기는 데에 결정적으로 간여한 관료라고 오래동안 간주애 왔음을 밝혔다. 카이 테일러(kai Thaler) 역시 비밀해제된 문서에서 밝힌 바 “미국 관료들은 이 집단학살을 도운 부가물 같은 존재였다”며 “집단학살이 벌어지도록 상황을 조장하는 데 일조했다”고 했다. 국가안보 문서보관소에서 인도네시아/동티모르 문서작업 프로젝트(the Indonesia/East Timor Documentation Project) 담당인 브래들리 심슨(Bradley Simpson)이사는 워싱턴이 PKI 당원이라고 알려진 이들을 인도네시아 군이 주축이 되어 학살하도록 최선을 다해 부추기고 심지어 편의를 제공했으며 당시 미 관리들의 유일한 우려는 혹시나 PKI의 비무장 지지자들을 충분히 많이 죽이지 않게 되면 수카르노가 다시 권력을 잡아 그동안 수카르토 이후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던 존슨 행정부를 좌절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서류들을 통해 미국이 인도네시아군의 집단학살에 협조하여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간여했음이 증명되었으며 그 협조란 CIA가 태국으로부터 소화기(小火器)들을 수배해 공급한 것, 미국 정부가 자금지원과 함께 일정량의 통신장비, 의약품, 군화나 제복같은 여타 물품들을 인도네시아군에게 제공한 것 등을 망라했다. 지오프리 B 로빈슨은 서면증거들을 기반하여
강력한 외국들 특히 미국과 영국 그리고 그 우방국들이 인도네시아 군이 집단학살을 자행하도록 부추기고 협조하는 역할을 했으며 그들이 지원하지 않았다면 학살행위는 애당초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추정했다. 그는 2018년의 저서 “살인의 계절”(The Killing Season)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했다. (사진: 지오프리 B. 로빈슨)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1965년 10월 1일 쿠테타 이후 벌어진 참혹한 폭력에 대해 일관되게 어떠한 책임도 없다며 부인해 왔다. 당시의 폭력은 인도네시아 국내정치세력에 의한 것이고 외부의 영향력이 있었다 해도 이는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쿠데타라고 알려진 사건이 있고나서 결정적 기간이었던 6개월 동안 서구 열강들은 인도네시아군이 좌익세력을 폭력적으로 밀어붙이며 집단학살을 포함한 폭력행위가 쉽게 번져나가게 하고 군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도록 도왔다는 것은 이제 분명한 증거가 나온 상태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PKI와 그 지지자들의 정치적, 물리적 멸망, 수카르노와 그 측근들을 정치무대에서 제거, 그들의 빈 자리를 수하르토 장군을 따르는 육군 엘리트들로 채워 넣는 것, 인도네시아의 외교정책을 서방과 자본주의 모델을 향해 나가도록 하는 등의 지각변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가 집단학살행위를 진행하며 그 결의를 보이자 인도네시아군에 대한 서방의 지원은 더욱 강고해졌다. 린든 B 존슨 미대통령의 안보보좌관 맥죠지 번드(McGeorge Bundy)는 “10월 1일 이후 벌어진 사건들이 최근 몇 년간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옳았음을 분명히 입증하는 것이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한 바 있었다. 그는 또한 인도네시아군이 미 대사관 대리인인 본건 임무 담당 프란시스 죠셉 갈브라이트(Franscis Joseph Galbraight)를 통해 “대사관과 유엔 사무차장은 인도네시아군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이며 찬사를 보내는 입장”임을 인도네시아 군부에 분명히 알리도록 했다고도 보고했다. (사진: 맥죠지 번드 안보보좌관)
미국은 영국, 호주와 함께 집단학살이 벌어지는 동안 흑색선전작전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는 학살행위를 지원하고 PKI에 대한 신뢰를 깎아 내리기 위해 고안된 심리전의 일환으로 인도네시아군의 프로파간다 방송전파를 전국에 송출하는 해적 라디오방송도 포함했다.
다른 모든 국가들 중 가장 괄목할 만한 양의 무기를 공급한 것은 스웨덴이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한 인도네시아인이 전한 바에 따르면 일찌기 1965년 12월 초, 인도네시아가 “PKI 분자들을 말살할 목적의 1천만불 상당 소화기와 탄약을 긴급 구매하기 위해 스웨덴과의 계약’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학살행위에 대해 스웨덴 대사관이 우려를 갖기 시작한 것은 몇 개월이 흐른 후 스웨덴 대사가 인도네시아군의 폭력적인 작전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했을 때부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상기 계약이 이루어진 후의 일이었다.
죠슈아 오펜하이머 감독과 대학살 내용을 담은 그의 다큐멘터리 작품들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액트오브킬링’(The Act of Killing), ‘침묵의 시선’(The Look of Silence)의 감독인 죠슈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nmer)는 이전 미의회 의원들을 검증하면서 이 집단학살행위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설명할 것을 촉구했다. 2014년 12월 10일 ‘침묵의 시선’이 인도네시아에서 첫 상영되던 날 톰 우돌 상원의원((Tom Udall, D-NM)은 미국무부가 제공한 서류에 따르면 미국이, 학살행위가 있던 시기는 물론 그 이후에도 자금과 군사적 지원을 지속적으로 공급했다고 주장하며 해당 학살행위를 비판하고 당시 이 사건에 미국이 어떻게 간여했는지를 밝힐 모든 문서들의 비밀해제를 요구하는 상원결의안을 발표했다.
비밀해제되어 2017년 10월 자카르타 소재 미대사관에서 공개된 서류들을 통해 미국이 처음부터 학살상황, 특히 수하르토가 지시한 집단학살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미국은1965년 9월 30일 사태가 소장파 군장교들에 의해 시도된 쿠데타였다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전국을 학살의 광기로 물들이고 만 인도네시아 군이 주장과 완전히 배치하는 믿을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 공개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965년 12월 21일 대사관 제1비서관 매린 밴스 트랜트(Mary Vance Trent)는 약 10만 명으로 사망자 추정수치와 함께 이 사건을 “지난 10주간에 걸져 벌어지고 있는 환상적인 전환”이라 평하는 전문을 국무부에 전송했다. “예전엔 비밀로 취급되었던 케이블, 전보, 편지, 보고서 등은 당시 미국이 의도적으로,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죄없는 민중의 제노사이드을 조장했다는 빌어먹을 디테일을 보여주고 있다”고 브래들리 심슨은 말했다. (사진: 브래들리 심슨)
10. 유산
이 학살사건에 대한 논의는 인도네시아에서 금기시 되어 왔지만 일반적으로 “65년 사태”(Peristiwa enam lima)라고 불려졌다. 1990년대에 들어서, 특히 1998년 수하르토가 하야한 후 인도네시아 안팎에서 이 학살사건에 대한 논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수하르토 정권 치하에서 투옥되거나 추방된 인사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포함해 자기들이 겪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 것이다. 외국 조사자들은 군사정권의 위협이 마침내 사라지면서 이 사건을 문서화하는 것이 훨씬 용이해졌음을 실감했다.
이 학살사건은 거의 모든 인도네시아 역사책에 누락되어 있어 인도네시아인들의 자체 반성은 물론 국제적 관심도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사실이다. 인도네시아 교과서에서는 이 사건을 8만 명 미만이 목숨을 잃은 “애국적 행동’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2004년 교과서들이 일부 개정되어 이 사건을 포함시키게 되었지만 군과 이슬람집단의 맹렬한 항의를 받고 2006년 다시 누락되었다.
집단학살 문제를 포함시킨 교과서들은 인도네시아 검찰총장의 지시에 따라 불살라지기도 했다. 존 루사(John Roosa)가 2006년에 쓴 ‘집단학살에 대한 변명’(Pretext for Mass Murder)도 검찰청에서 처음부터 금서로 지정했다. 인도네시아 국회는 진실화해 위원회를 만들어 이 학살사건을 조사하려 했으나 인도네시아 대법원이 이를 중단시켰다. 그 와중에서도 2009년 이 사건에 대한 학술회의가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학살 피해자 가족들과 생존자들이 그간 주저하던 집단 무덤 발굴도 1998년 이후에 시작되었지만 거의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인도네시아 사회에는 이 사건을 둘러싼 해묵은 적의가 아직 남아 있다.
수빠르죠 장군이 9월 30일 사태에 대해 개인 비망록을 남겼는데 그 사본을 수빠르죠 서류(Supartdjo Document)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사건의 기본적 정보를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자료로 당시의 군사적 안목과 판단을 읽을 수 있고 무엇이 9월 30일 사태를 실패로 끝나게 했는가에 대한 수빠르죠 개인의 견해를 담고 있다.
이 학살사건은 베트남 전쟁이나 남미국가들의 우익 쿠데타들에 비해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를 수하르토의 등극과 함께 냉전기간 중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2017년 비밀해제된 문서들을 들여다 본 역사가 존 루사는 “미국 대외정책 기관들 상당수가 이 사건을 앞으로 인도네시아를 아주 간단히 손끝으로 조종할 수 있도록 만든 대단한 승전보”로 간주했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이 단순히 방관만 한 것이 아니라 학살이 실제로 일어나도록 만들었다고도 했다
시드니 동남아시아 센터(Sydney Southeast Asia Center)의 연구원 제스 멜빈(Jess Melvin) 박사는 당시 PKI와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종교적, 인종적 집단들이 특정되어 대규모로
공격대상이 되었으므로 법적으로 제노사이드의 개념 안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매튜 립만(Mathew Lippman)과 데이비드 너세시언(David Nersessian)을 인용하며 무신론자 숙청은 제노사이드에 해당하며 인도네시아군은 무신론자와 비신자들이라면 무조건 공산주의나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싸잡아 제거했으므로 이런 방식의 학살은 제노사이드(genocide)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멜빈은 PKI가 당시 스스로를 이슬람과 공산주의 모두를 포함하는 “붉은 이슬람”이라며 스스로의 종교적 정체성을 밝힌 바 있으므로 PKI의 몰살이 제노사이드에 해당함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더욱이PKI는 기본적으로 사상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 그룹”이었으므로 이 역시 제노사이드의 요건을 충족시킨다고 주장했다. (사진: 제스 멜빈 박사)
1) 1965년 국제인민재판소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인권침해범죄에 대해 2015년 11월 네덜란드 헤이그에 7명의 국제 재판관들이 주재하는 국제인민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이 재판소은 인원운동가들과 학자들 그리고 인도네시아 망명자들이 “파악된 진상에 근거한 과도기적 정의구현을 위한 국내에서의 공식적인 조치 부재”에 대한 반응으로 2014년에 설치된 것이다.
2016년 7월 작 야쿱(Zak Yacoob)은 재판소가 알아낸 사실들을 공개적으로 낭독하며 이 사건에 대해 인도네시아 국가가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며 반인권범죄 혐의에 대해 유죄라는 사실과 함께 허위 프로파간다를 퍼뜨리고 학살을 정당화하도록 한 수하르토를 비난했고 이 학살행위는 전체 국민의 일부를 말살하려 의도된 것으로 제노사이드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또 다른 혐의들, 예를 들어 노동수용소에서의 노예생활, 참혹한 고문, 체계적인 성폭력, 강제실종 등을 함께 조명했다. (사진: 작 야쿱 재판장) 인도네시아는 이 재판소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보조정장관 루훗 빤자이탄(Luhut Panjaitan)은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학살문제는 그들이 간여할 바가 아니다, 그들은 인도네시아가 섬길 상관들이 아니며 인도네시아는 자체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이 국제인민재판소의 결정이나 판결은 구속력이 없다.
야쿱 재판관은 “미국, 영국 그리고 호주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 반인권 범죄의 공범들”이라고 말했다. 국제인민재판소 재판관들이 내린 결론은 “인도네시아군이 대량학살 프로그램을 시도하려 함을 미국도 잘 알면서,”이를 지원했으며 그 지원방식이란 공산당 간부들로 알려진 이들의 명단을, 거기 포함된 이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인도네시아군에게 인도한 것, 살인과 여타 반인권 범죄들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음이 명백해진 후에도 영국과 호주가 인도네사아군이 표면상 내세우던 거짓 프로파간다를 단순 반복하기만 했던 것 등이 포함되었다. (사진: 루훗 빤자이탄 인도네시아 안보조정장관, 전 특전사령관) 호주 외무상은 스스로 인원 NGO라 주장하는 국제인민재판소의 이러한 결론을 부인했고 호주가 어떤 식으로든 그 학살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을 부정했다. 한편 미국과 영국은 국제인민재판소가 확보한 내용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인권변호사 누르샤바니 까챠숭까타 (Nursyahbani Katjasungkana)는 이미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외교 통신문서들을 통해 진상규명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들 세 나라가 공범혐의를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2) 영화와 다큐멘터리
우리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그들 항문에 나무를 쑤셔 넣었다. 우린 나무 사이에 그들의 목을 끼워 부셔뜨렸다. 우리는 그들을 목매달았고 전선으로 목졸랐으며 목을 베고 그들 몸을 차량으로 깔아 뭉갰다. 우린 뭘 해도 되었다. 그 증거로서 우린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 처형단 리더 아디 줄카드리(Adi Zulkadry)
액트오브킬링(The Act of Killing)의 한 장면
수하르토 시절 매체들은 1965년 사건의 특정 역사만 조명하도록 강력한 영향을 받았고 철저한 검열이 이루어졌다. 이 정치적 비극의 책임을 온전히,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모두 PKI에게 돌리는 역사만이 공개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자카르타포스트(The Jakarta Post)지에서처럼 최근 기사들 중엔 보다 심도 있게 정말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에 대한 상충된 견해를 가진 매체들이 다양한 가능성들을 보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배신>(Pengkhianatan G30S PKI)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국영TV 방송국인 TVRI에서 매년 9월 30일마다 방영되기도 했다.
(왼쪽)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배신, (오른쪽) 가장 위험한 해
그것은 인도네시아에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버젼의 이야기였다. 수하르토의 하야 이후 많은 사람들, 특히 그 사건에 직접 관련된 이들이 많은 책과 영화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한 색다른 버젼을 내놓았다. 다큐멘터리 필름인 액트오브킬링에서는 학살행위에 참가한 개인들의 인터뷰들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자매영화라 할 수 있는 <침묵의 시선>은 왜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한 희생자 가족들의 삶을 따라가면서 당시 그 사건의 배후에 있던 이들이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얼마나 희희낙락하면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그들이 소위 PKI 연루자들이라는 희생자들의 몸을 어떻게 절단하고 창자를 꺼내고 고환를 발라내고 목을 베었는지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장면들도 담고 있다. <가장 위험한 해>(The year of Living Dangerously)는 대량학살사건으로 나아가는 길목의 사건들을 조명한 영화로 1982년 전 세계에서 개봉되었으나 인도네시아에서는 1999년까지 상영금지처분을 받았다.
3) 책과 소설
이 대량학살은 많은 소설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보다 지역적, 사화문화적 부분 또는 국가적, 정치적 부분에서 이 사건에 대한 자신만의 버전을 책으로 남기게 했다. 신질서 정권 시절에 인도네시아에서 쓰여진 책들은 특정 내용에 대해 검열삭제를 당하는 일이 흔했고 해외에서 쓰여 출판된 책들을 인도네시아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존 루사가 쓴 <대량학살에 대한 변명>은 쿠데타의 성격을 애매하게 만든 쿠데타 기획자들이 무능 같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역사에 있어 이 시기를 휘감고 흐르는 대혼란을 재구성하기 위해 이 책은 이 사건을 토의하는 통상의 범주를 벗어나 전인미답의 자료들을 조명했다.
아흐맛 또하리(Ahmad Tohari)의 3부작 소설 <무용수>(The Dancer – 원제: 롱겡 두꾸 빠룩 Ronggeng Dukuh Paruk)은 혁명의 한 가운데에 놓인 한 마을 공동체를 조명한다. 이 소설은 이 학살사건을 다룬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그래서 어쩌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관점을 제공한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 스린띨(Srintil)과 라수스(Rasus)는 혁명의 양쪽 끝부분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소설은 좀 더 큰 규모의 농촌사회를 공산주의 관행 속으로 가져갈 수 있었던 환경뿐 아니라 학살 수행의 임무를 맡게 된 이들의 정신상태까지를 다루고 있다. 소설이 출간되던 1981년 몇몇 부분들은 신질서 정권에 의해 검열삭제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3부작 소설은 이 반공 쿠데타라 불려 마땅한 사건의 뿌리 속 깊은 곳과 뒤따라 벌어진 비극들에 대한 값진 안목을 제공하고 있다. (사진: ‘무용수’)
1966년 건기가 시작하던 시기의 밤들은 매우 스산했고 사람들 사이엔 걱정스러운 긴장감이 퍼져갔다. 들개들은 아무렇게나 매장된 시신들의 피냄새를 맡고 사나와진 채 부근을 어슬렁거렸다. 부드러운 남동풍이 썩어가는 육신의 악취를 담고 불어왔다. 그 시기, 밤의 정적은 무거운 군화발 소리로 깨지거나 총소리가 들렸다는 소문에 부산해지곤 했다.
-아흐맛 또하리의 소설 <무용수>에서
에카 꾸르니아완(Eka Kurniawan)의 2002년 출간저서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Beauty is a Wound)는 1965년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그 당시, 그리고 그 이후의 국가 전체의 상태를 소재로, 역사를 풍자와 비극, 그리고 초자연적 상황으로 엮어냈다. 이 책은 쿠데타의 군사활동을 다루기보다 보다 많은 부분을 인간관계 속에서의 공산주의자들 자신, 그리고 평화를 얻지 못한 공산주의자의 망령들에게 할애한다. 작가가 굳이 의도한 바는 아닐지라도 당시 창궐하던 매춘사업, 임시 수영복사업 등의 예를 드는 과정에서 당시 인도네시아가 맞고 있던 경제적 상황에 대한 단면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꾸르니아완은 혁명과 쿠데타에 대한 그의 감상을, 연극에서나 나올 법한, 이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 전개를 통해 투영하며 네덜란드 식민시대로부터 수하르토 시대에 이르는 국가적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한국어로 출간된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
혁명이란 어떤 특정 정당의 부추김을 받아
사람들이 단체로 뛰쳐나가 난동을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아.
- 에카 꾸르니아완의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에서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운명이란
사형장 사수들 총구 앞에서 생명이 끝나는 것이야.
- 에카 꾸르니아완의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에서
루이즈 도티(Louise Doughty)의 2006년작 <검은 물결>(Black Water)는 1965년 사건을 유럽의 시각에서 들여다본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캘리포니아와 인도네시아를 번갈아 보여주는데 국제회사의 운영요원으로 일하는 한 독신남자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며 쿠데타 자체보다 이에 대한 해외반응, 특히 외국 언론인 커뮤니티의 반응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루이스 도티의 <검은 물결>
(끝)
댓글목록
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소문만 무성한 1965년 대학살 다음으로 1975년 동티모르 침공부터 1999년 사실상 독립까지의 이야기를 준비하는데(여기서 준비라는 건 '자료번역') 확실히 좀 관심이 덜 가고 자칫 지루해지기도 쉽네요. 그래도 외대 인니어학과 학부생들이나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당분간 계속 올려 봅니다. 사실 내가 제일 공부가 많이 됩니다^^
kingpillow님의 댓글
kingpillow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잘 읽고 있습니다.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