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칠성 세미나 후기 (2018. 8. 18)
페이지 정보
작성자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08-19 17:29 조회2,160회 댓글2건본문
양칠성 세미나 후기
2018년 8월 18일 (토) 오전 10시부터 쁘로끌라마시 거리(jl.Proklamasi)의 위스마 쁘로끌라마시에서 '독립투쟁의 보편성: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속 한국인 투사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7일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던 수까르노의 집터 위에 만들어진 '선언자들의 공원' 바로 건너편에 2018년 2월 개업한 이 2층짜리 동(東)인도네시아 음식 전문점은 작은 발표자 좌석과 백드롭, 스크린 외에도 60명 넘는 관계자들과 언론, 기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아담하고도 고풍스러운 곳이었습니다. 북말루꾸 부빠띠라는 식당 주인의 취향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이 세미나를 주최한 히스토리카 인도네시아(Historika Indonesia)는 인니 독립투자들의 기록을 발굴, 유지하고 그 후손들을 도우며 민간에 대한 역사교육, 장학금, 역사 웹사이트 지원 등을 목적으로 2014년 11월 설립된 조직입니다. 이날 주연사로서 양칠성과 빠빡 왕자의 부대(pasuKan Pangeran Papak)의 활약과 그들의 최후를 강연한 저널리스트 헨디조 (Hendi Jo)는 그 창립자들 중 한 명입니다.
루슈디 후세인(Rushdy Hoesein)은 독립전야 수까르노의 행보와 당시 시대상을 팩트를 기반하여 설명해 주었는데 그는 73세에 접어든 저명한 인도네시아 사학계 원로로 인도네시아국립대(UI) 교단에서 은퇴한 후 인도네시아 최대 역사 커뮤니티인 '꼬무니타스 히스토리아 인도네시아'(Komunitas Historia ladonesia)을 이끌며 활발한 강연활동은 하고 있습니다.
일본군 보조부대 역할이었던 현지 헤이호(Heiho-兵補) 지원자 대상으로 6주간 일본어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진 일본군 군속 양칠성을 중심으로 그를 발굴해낸 일본인 우쓰미 아야꼬, 군속과 포로감시원의 모집 과정과 태평양전쟁 말기 그들의 운명에 대해 강연한 로스티(Rostineu) UI대 문화지식학부(FIB) 교수는 한국에서 이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던 재원입니다.
이날 행사를 도운 UI대 한국어과 학생들은 물론 가룻 부빠띠 대리인, 전주 MBC 등 국내외 언론과 기자들이 자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특히 가룻은 빠빡 왕자의 부대가 출몰하던 곳으로 폭파 전문가이자 부대의 브레인 역할을 한 양칠성이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동료 하세가와, 아오키 등과 함께 처형당해 매장된 곳이기도 합니다. 흐릿한 사진 속의 양칠성은 훤칠한 미남이었고 최후의 순간 무슬림 투사 꼬마루딘(Komarudin)으로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한인니문화연구원(원장 사공경), 헤리티지 재단 코리아섹션(회장 김상태)의 한국인 회원들과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원 엄은희 박사와 위스콘신 메디슨 칼리지의 정은숙 정치학 교수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습니다.
세 시간에 걸친 세미나를 마친 후 주최측에선 모든 참석자들에게 동인도네시아식 요리를 점심으로 제공했고 한국인 참석자들은 2층에서 주최측 및 세미나 발표자들과 함께 식사하며 환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날의 세미나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양칠성으로 대변되는 제3국인들도 깊숙이 개입되었던 것이 당시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인도네시아로 한정된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공감하던 국제적 사건이었다는 다소 피상적인 접근이 이루어졌고 질문을 제기한 참석자들 중엔 한국이 일제시대를 통해 세계정세를 읽는 안목을 키울 기회를 얻었다거나 당시 일본을 위해 일한 징용자들이나 포로감시원들이 귀국하여 아직도 일본에서 연금을 받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식의 인식을 드러낸 부분은 한국 정부 및 민간차원에서 역사적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함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인이 주최했어야만 할 테마를 가지고 인도네시아 사학계 인사들이 먼저 세미나를 조직했다는 사실만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끝)
이 식당의 이름은 디'쁘로끌라마시 입니다.
라덴살레가 그린 디포네고로 왕자의 체포
백드롭 맨 왼쪽의 남자가 양칠성
주최측인 히스토리카 인도네시아의 창립자
드 쁘로끌라마시 식당의 매니저 미스터 림
사회자 등장
왼쪽부터 사회자 와엔 사이드(Waen Said), 루슈디 후세인(사학자), 로스티뉴 UI대 교수, 헨디조(저널리스트)
이상 로스티뉴 교수의 PPT 자료
구체적인 양칠성 사건을 이야기하는 헨디 조
체포 직후. 왼쪽은 하세가와, 오른쪽이 양칠성
처형직전
기념촬영. 차마 한국문화원에서 오지 않았다고 할 수 없어 우리 모두 대사관 직원인척, 한국문화원 직원인 척 했습니다.
행사를 도운 UI대 한국어과 학생들
식당 2층. 세미나 발표자와 한국인 참석자들을 위한 식사 자리
우린 일본이 미워 죽겠는데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일제강점기를 지낸 후 일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나요? 질문하는 배작가.
추최측과 한인니문화연구원 사공경 원장(가운데),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원 엄은히 박사(맨우측)
2018. 8. 18
댓글목록
명랑쾌활님의 댓글
명랑쾌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일본에 대한 감정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해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
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 질문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수까르노가 낭독한 독립선언은 일본이 이미 패망한 후였으니 일본에 대한 독립의지의 표명이라기보다는 분명 동인도 복귀를 시도하는 네덜란드와 그 배후의 연합군들에 대한 선전포고 의미를 어느 정도 담은 것이었고 실제로 그후 4년 남짓 독립전쟁이 인도네시아 전역을 휩쓸었죠. 하지만 일본이 1942년부터 3년반에 걸쳐 동인도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의 생명을 소모하고 노동력과 자원을 무자비하게 수탈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양칠성이 가담한 가룻 빠빡 왕자의 부대에서와 같이 일부 일본인들이 인도네시아편에 서서 네덜란드와 싸우다 목숨을 바친 것 역시 역사적 사실이죠. 이 부분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한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입니다. 일본에 대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역사인식이 한국인들과 어떤 부분에서 온도차이를 보이는가 물었던 질문에 대해, 그러나 루슈디 후세인 교수는 매우 모호한 태도로 동문서답에 가까운 대답을 할 뿐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실제 한국과 인도네시아 간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체로 서로에게 호의적이나 딱히 같은 편은 아니라는 포지션을 말입니다.
인도네시아가 모든 면에서 한국과 똑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길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건 쌍둥이 형제간에서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서로의 포지션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것대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제대로 된 관계란 서로의 분명한 포지션을 파악한 후에야 가능한 것이니 말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교수님들과 정부기관들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다방면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활동도 어쩌면 궁극적으로 서로의 분명한 포지션을 파악하고 조정하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역사 부문에서의 교류와 참여 역시 앞으로 좀 더 활발하고 진지하게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소한 인도네시아인들이 양칠성에 대해 아는 것보다 우린 당연히 그를 더 많이 알기 위해 연구해야 할 것이고 인도네시아인들이 한국인 군속과 포로감시원들의 기원을 연구하는 것만큼 우리 역시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위인들 그리고 수면 밑 문화 등에 대해 좀 더 탐구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쌓인다면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가진 서로 다른 포지션은 더 이상 짜증의 대상이 아니라 보다 긴밀한 협조와 발전의 대상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