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하르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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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10-24 22:15 조회2,276회 댓글0건본문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전대통령 (4)
경제위기와 하야
인도네시아는 1997-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상황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1997년 중반부터 거대한 자본이 US달러 구매를 위해 유출되었다. 취약한 대출관행 때문에 많은 인도네시아 회사들이 이자가 저렴한 미국 달러화 대출을 받았는데 그들의 수입은 대부분 루피아화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루피아화 약세는 이러한 회사들이 급히 달러를 사재기해 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부추겼고 이는 더욱 급격한 루피아화 폭락의 악순환을 가져왔는데 외환위기 전 달러당 2,700루피아 선이었던 화폐가치는 1998년 초 달러당 17,000루피아까지 폭락했다.
그 결과 수많은 기업들이 줄도산하면서 인도네시아 경제는 13.7% 쪼그라들었고 높은 실업과 빈곤이 날카로운 비율로 상승하면서 전국을 휩쓸었다. 루피아를 방어하려던 중앙은행의 모든 노력들이 무의에 그치면서 국가의 달러보유액만 바닥내 버렸다. 430억 달러의 유동성 원조를 얻기 위해 수하르토는 1997년 10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경제개혁 프로세스를 약속하는 세 통의 서약서에 서명해 국제통화기금(IMF)에 보내야 했다. 1998년 1월, 정부는 긴급 유동성원조(BLBI)를 제공하고 은행예금의 포괄적 보장을 천명하는 한편 경제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운영난에 처한 은행의 경영권을 인수하는 ‘인도네시아 은행 구조조정처’를 발족시켰다. IMF의 권고에 따라 취해진 조치들 중엔 1998년 2월 인도네시아 정부가 금리를 70%까지 올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인도네시아 경제를 더욱 악화시킨 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1997년 12월 수하르토가 처음으로 ASEAN 정상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후에 그것이 가벼운 심장마비때문이었더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가 대통령직을 속행할 수 있는 건강상태인가에 대한 추측과 가설이 난무했다. 경제위기가 나라 전체를 휩쓸고 약 1,500억 달러의 자금이 인도네시아에서 빠져나간 12월 중순 수하르토는 기자회견에 나가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며 정부와 루피아에 대한 믿음을 국민들과 우방국들에게요구했다. 그러나 신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가족들과 측근들만이 IMF 개혁 프로세스에 가장 가혹한 요구조건들에서 예외로 취급되고 있다는 증거들이 드러나면서 경제상황과 그의 지도력에 대한 신뢰는 바닥부터 무너져내렸다.
경제의 붕괴와 함께 정치적 갈등도 더욱 증폭되었다.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소요가 1996년에 시뚜본도와 타식말라야에서, 1997년엔 반자르마신과 마카사르에서 벌어졌고 1997년 중부 깔리만탄에서는 원주민 다약족과 이주민인 마두라족 사이의 피비릿내나는 인종간 폭력충돌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서도 골카르는 부정선거를 통해 1997년 MPR 의원선거를 이겼고 1998년 3월에는 수하르토가 또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다섯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심복 BJ 하비비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가족과 사업상 측근들을 입각시켰는데 그의 딸 뚜뚯도 사회부장관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러한 인선과 정부의 비현실적인 1998년 예산은 환율불안정성을 더욱 부추겼다. 무성한 소문들로 인한 사회불안이 가중되면서 곳곳에서 사재기가 횡횡했고 물가가 폭등했다. 1998년 5월 정부가 유류가격을 70% 추가 인상하자 메단에서 또 다시 한바탕 소요가 벌어졌다
이제 가중되는 국가적 경제위기와 정치적 난맥상의 주범이 수하르토라는 것이 점점 더 명백해지면서 무슬림 정치가 아미엔 라이스(Amien Rais)를 비롯한 유력한 정치인들이 그의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1998년 1월엔 대학생들이 전국적인 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위기의 정점은 수하르토가 이집트를 국빈방문하고 있던 1998년 5월 12일에 찾아왔다. 치안당국이 자카르타의 뜨리삭티 대학에서 4명의 시위대를 살해한 것이다. 그 이후 며칠동안 소요와 약탈이 자카르타와 여타 도시들에서 벌어져 수천 개의 건물들이 파괴되고 1,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특별히 화교들과 그들의 사업장이 폭력의 타킷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 폭력사태의 원인을 당시 군의 수장이던 위란토 장군과 실세 쁘라보워 장군 사이의 경쟁적 암투에서 찾기도 하며 경제위기의 책임을 화교들에게 넘기거나 학생운동이 비난받도록 할 목적으로 수하르토가 치밀하게 계산하여 도발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자카르타 폭동 와중의 약탈자들
뜨리삭티 총격사건(1998) 희생자 추모
1998년 5월 자카르타 폭동의 장면들
5월 16일 수만 명의 학생들이 수하르토의 사퇴를 요구하며 국회의사당 건물과 그 지붕까지 장악했다. 수하르토는 자카르타에 돌아와 그가2004년에 사임할 것이며 내각을 즉시 개편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와 정치적 동맹관계였던 이들이 그를 경원하며 입각제의를 속속 거절하면서 시간을 벌며 민심을 무마하려던 그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위란토는 5월 18일 수하르토가 치안회복을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대통령이 그에게 위임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수카르노의 수뻐르스마르 서한과 데자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위란토는 국민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 명령을 집행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 지점에 역사의 변곡점이 생긴다. 결국 1998년 5월 21일 수하르토는 대통령직 사퇴를 선언했고 이에 부통령 하비비가 헌법에 따라 즉시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무부 서류에 따르면 클린턴 행정부는 수하르토의 하야 이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인도네시아 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백방으로 노력했음을 밝히고 있다.
수하르토 하야성명 (1998. 5. 21)
하야 후의 생애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수하르토는 자카르타 멘뗑의 저택에서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공공의 노출을 피해 칩거했고 그의 가족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부패조사를 피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소비했다. 그러나 나중에 1999년 2월 하비비 대통령과 검찰총장 안디 무하마드 갈립(Andi Muhammad Ghalib)의 전화통화 내용이 유출되면서 수하르토가 당시 기소의 칼날을 잘 피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 하야 전에 자신이 앉혀놓았던 정치가들 덕택이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사진- 안디 무하마드 갈립 중장, 출처: http://jenderalandighalib.blogspot.com/2013/10/andi-galib-mantan-jaksa-agung-sepertiga.html)
1999년 5월 타임아시아(Time Asia)는 수하르토 가족의 부를 현금과 주식, 기업자산 부동산, 보석, 예술품 등의 형태로 약 150억 달러라고 추정했다. 수하르토는 이 잡지에 중상혐의로 270억 달러짜리 피해보상소송을 걸었고 인도네시아 대법원은 2007년 9월 10일 수하르토의 주장을 받아들여 타임아시아 잡지가 수하르토에게 1조 루피아(약 1,290억불)를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각각 2000년과 2001년의 초심과 항소심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어느 나라든 사법부는 돈많은 이들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양이다.
국제투명성기구는 수하르토가 32년간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150억-350억 달러 정도를 횡령했다고 발표하며 부패한 지도자 명단 상위에 랭크시켰다.
2000년 5월 29일 인도네시아 정부가 전 정권시절의 부패사건들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수하르토는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2000년 7월 정부기부금 5억7,100만 달러를 그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재단들 중 하나로 빼돌린 후 이를 가족들의 사업투자에 사용한 혐의로 기소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하지만 그해 9월 법원에서 지정한 의사들은 수하르토가 건강악화로 법정에 설 수 없다고 발표했다. 2002년에도 검찰청은 또다시 수하르토를 기소하려 했지만 의사들은 이번엔 특정되지 않은 뇌질환을 언급하며 이를 피했다. 2008년 3월 26일 민사법원은 오히려 수하르토를 부패혐의를 벗겨주었다. 하지만 마치 그 대신 선심을 쓰듯이 그의 자선재단인 수뻐르스마르(Supersemar)에겐 1억1천만 달러를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수하르토 막내아들 또미
2002년 수하르토의 아들 또미가 그를 부패혐의로 유죄선고를 내린 바 있는 한 판사의 살해를 사주한 죄목과 불법무기소지, 도피 등의 죄목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006년 그는 ‘조건부 석방’이란 명목으로 석방되었다.
2003년 수하르토의 이복형제인 쁘로보수떼죠(Probosutedjo)가 부패와 국가에 1천만불의 손실을 입힌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4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2년으로 감경받았다. 하지만 이는 부패척결위원회(KPK)가 사법 마피아 스캔들을 조사하게 하는 게기가 되었고 그가 여러 판사들에게 60만불에 이르는 뇌물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쁘로보수떼죠는 2005년 10월 마침내 이 혐의를 시인했고 그의 변호사들이 줄줄히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그 역시 4년 형기를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에 저항한 그는 일단의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며 병원에서 사법기관과 대치하다가 결국 2005년 11월 30일 구속되었다.(사진-쁘로보수뗴죠, 출처: https://tokoh.id/biografi/1-ensiklopedi/anak-siantar-dari-kemusuk/)
2007년 7월 9일엔 인도네시아 검철청이 수하르토 전대통령에게 국가 자금을 회복시키라며 기소했다. 이는 장학재단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4억4천만불과 그 외 발생한 11억불의 손실과 관련한 것이었다.
대통령직을 사임한 후 수하르토는 발작과 심장 장기 등의 문제로 병원을 들락거려야 했다. 그의 변호사들은 수하르토의 건강악화를 효과적으로 이용해 그를 기소하려는 움직임을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2006년 검찰총장 압두라흐만은 20명의 의사로 구성된 전문가 팀이 수하르토가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에 대한 건강진단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중 한 외과의사인 군의관 마르죠 수비안도노 준장은 수하르토가 두 개의 만성 뇌손상을 가지고 있을 우려가 있음을 공표했다. 그 후 파이낸셜 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압두라흐만 검찰총장은 재검을 협의하면서 이것이 수하르토를 형사기소할 마지막 기회의 단초가 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그는 수하르토의 부동산에 대한 소송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서거
2008년 1월 4일 수하르토는 심장합병증과 부어오른 수족, 그리고 위장과 신장의 기능정지 등으로 자카르타 소재 뻐르따미나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그의 건강은 그 후 몇주 간 회복과 악화를 반복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심장과 신장 합병증과 내출혈, 페에 찬 수액, 출혈이 섞인 배변 등이 헤모글로빈 수치를 떨어뜨린 결과 빈혈과 저혈압이 악화되면서 지속적으로 상태가 나빠졌다. 1월 23일에는 패혈증까지 발생하며 그의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고 마침내 그의 가족들은 생명유지장치의 철수에 동의하면서 1월 27일 오후 1시10분 수하르토는 세상을 떠났다.
문상온 유도요노 대통령(좌), 비행기를 타고 솔로(Solo)로 운구
솔로 교외의 수하르토 가족묘역, 아스타나 기리방운(Astana Giribangun)
그의 임종 직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당시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어 수하르토를 인도네시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아들들 중 한 명이라 칭하며 전국이 전 대통령에게 최선의 경의와 명예를 돌릴 것을 촉구했다.
수하르토의 시신은 자카르타에서 중부 자바 솔로 가까이의 기리 방운 납골당(Giri Bangun mausoleum)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곁에 묻혔다. 장례행서는 Kopassus(특전사) 정예부대들과 KOSTRAD(육군전략사령부) 특수부대가 의장대와 운구부대로 참여했고 이를 수라카르타 Kopassus 2그룹 사령관 아셉 수바르카(Lt. Colonel Asep Subarkah) 중령이 지휘하는 가운데 국군장으로 엄수되었다. 현직 대통령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를 장례위원장(ceremony Inspector)으로 하여 부통령, 장관들, 군참모총장 등이 장례식에 참석했고 수만 명의 국민들이 장례행렬이 지나는 연도에 나왔다. 많은 지역의 수장들이 애도를 표했고 유도요노 대통령은 1주일간의 공식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2018. 10.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