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대학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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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1-16 12:49 조회5,186회 댓글3건본문
1965–66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1. 개요
1965년에서 1966년 사이에 벌어진 인도네시아 대학살(인도네시아 학살, 인도네시아 제노사이드, 인도네시아 공산당 숙청, 인도네시아 정치학살 또는 1965년의 비극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림)은 사회적 불안에 편승해 몇 개월에 걸쳐 벌어진 대규모 학살사건으로 주로 공산주의 추종자, 화교, 좌익이라 알려진 자들을 타깃으로 했고 군과 정부가 이를 부추겼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9월 30일 쿠데타 시도에 대한 반동으로 반공숙청작업 성격을 띄었다. 가장 일반적인 사망자 추정치는 50만 명에서 백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 사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추정치의 폭이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까지 늘어나는 추세다. 이 숙청작업은 신질서 권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상징적 사건으로 당시 세계를 뒤덮은 냉전 상황에 힘입어 정치 세력으로서의 인도네시아 공산당(PKI)를 완전히 분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함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가 몰락하고 30여년간 계속되는 수하르토의 철권통치가 시작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다가 실패한 쿠데타는 이미 끓어오르고 있던 사회적 증오를 여과없이 분출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군이 기름을 부은 측면도 없지 않으나 군은 발빠르게 PKI를 비난하며 나섰다. 공산주의자들은 정치권은 물론, 사회와 군에서도 밀려났고 인도네시아 공산당 자체가 불법화되어 해체되었다.
1965년 북부 수마트라 학살진행상황
쿠데타가 실패하고 몇 주 지나지 않은 1965년 10월 피비릿내 나는 학살극이 시작되었고 그해 내내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치다가 이듬해 초에야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자카르타에서 시작된 학살극은 중부자바를 거쳐 동부자바로 번졌고 급기야 발리마저 휩쓸었다. 수천 명의 자경단원들과 군부대가 인도네시아 공산당원들, 또는 그렇게 알려진 이들을 살해했다. 학살은 전국에서 벌어졌는데 특히 PKI가 흥했던 중부와 동부자바, 발리 그리고 북부 수마트라에서 그 상황이 더욱 심했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시에 감옥에 갇히는 상황도 벌어졌다.
수카르노가 공들였던 나사콤 체제(Nasakom-민족주의(군), 이슬람,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균형관계)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그가 가장 신뢰했던 지지축인 PKI는 다른 두 축인 군과 이슬람 정치세력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었고 군은 이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오히려 PKI가 다른 두 세력을 완전히 압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PKI는 수카르노를 통해 노농적위대와 닮은 대통령 직할의 ‘제5의 군대’를 창설하려 했고 소총 등 이 군대를 무장할 무기들이 중국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이 군대가 정말 창설되었다면 공산당은 이를 앞세워 다른 두 세력을 무력으로 압도했을 개연성이 무척 크다 하겠다.
1967년 3월 수카르노는 MPRS 인도네시아 국가자문회의의 결정에 따라 남은 권력마저 모두 빼앗겼고 수하르토가 대통령 대행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1968년 3월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 학살사건은 수하르토 시절엔 정권의 압력으로 인도네시아 역사교과서에 대체로 실리지 않았고 인도네시아인들도 별다른 반성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당시 폭력의 규모와 광기를 제대로 조사하고 설명하려던 학자들은 자칫 공산주의자로 몰리기 쉬웠으므로 이념적 자기검열을 되풀이해야만 했다. 신질서 정권은 인도네시아 정치 시스템을 손아귀에 틀어쥐고서 쿠데타에 대한 잘못된 분석이나 주장이 유사한 국가전복 시도를 유도할 우려가 있다며 학자, 언론들의 입을 막았다. 공산주의의 위협을 얼마나 우려하고 혐오하느냐 하는 것이 수하르토 시절 사상검증의 최우선 척도였다. 그가 하야한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당시 그런 행태의 영향과 잔재는 오늘날 아직 남아 있다 할 것이다.
1962년 CIA 비망록에 언급된 바와 같이 미국과 영국 정부의 고위급에서는 수카르노 정권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반공육군장교들과 미국 군부 사이에도 단단히 연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고위 장성들을 포함한 1,200명 넘는 장교들을 미국에서 훈련시키고 무기는 물론 경제적 지원을 해왔던 것이다.
CIA는 자신들이 이 학살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2017년 비밀해제된 문서들을 통해 미국 정부가 처음부터 이 제노사이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고 인도네시아 군의 관련 군사행동을 지지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매우 광범위한 인도네시아 공산당 간부들의 명단을 인도네시아 측 처형단에게 제공하는 등 미국이 이 학살에 연루되었음을 여러 역사가들과 언론인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한편 1968년 미국 극비문서에도 이 학살이 1930년대 소련의 숙청작업, 2차 대전 중 유태인을 대상으로 한 나치의 제노사이드, 그리고 1950년대 모택동주의자들의 숙청작업과 함께 20세기에 가장 처참한 제노사이드 중 하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2. 배경
(사진) 1965년 10월 5일 수하르토 소장이 암살당한 장성들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
교도민주주의를 내세운 수카르노 정권에 대한 지지는 군과 종교 그룹, 그리고 공산당 사이에 인위적으로 결성된, 그래서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나사콤’ 체제를 기반으로 했다. 호전적인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영향력이 극대화되는 와중에 수카르노가 이를 적극 지지하자 군과 이슬람계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 진영간의 긴장은 196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줄곧 고조되었다. PKI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공산당 조직으로 전국에 2백만 명의 당원들을 보유했고 그들 중 30만 명이 간부들이었다. 공산당이 강력하게 밀어부치던 토지개혁은 지주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이슬람 성직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위협했다. 실질적인 공포를 느낀 지주들과 성직자들이 PKI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인식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편 수카르노는 공무원들에게 자신의 나사콤 이론과 함께 마르크스주의 이론들을 함께 공부하도록 했다.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의 주도로 분명히 좌경화되어 가는 중이었고 PKI는 그 상황에서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인민공화국의 주은래 수상을 만난 후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제5의 군대로서의 민병대를 창설하려 했고 이들을 무장시킬 무기를 중국에 주문했다. 수카르노는 한 연설을 통해 민족주의자이든, 신앙심이 깊던, 공산주의자이든 관계없이 혁명적 사상을 가진 그룹들은 높이 평가한다고 밝히며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친구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라고 천명했다. 그는 1964년 10월 카이로에서 열린 비동맹운동 정상회담에서 인도네시아의 정치의 방향은 좌측을 향할 것이며 혁명에 위해요소가 되는 군내의 ‘반동’분자들을 무력화시킬 것이라고도 말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는 그가 말한 방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1958년 초부터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서구열강들은 인도네시아 군이 보다 강력하게 PKI와 좌익에 대항해 싸우도록 부추기는 정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수카르노와 PKI의 평판에 데미지를 주기 위해 은밀히 선전공세를 벌였고 군대 내의 반공주의 지도자들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원하여 그들의 위상을 비밀리에 보장해 주었다.
3. 9월 30일 사태
1965년 9월 30일, 일단의 병력이 여섯 명의 최고위 군장성들을 납치해 살해했다. 9월 30일 사태라 불리는 사건이다. 그들은 스스로 수카르노의 수호자라 칭하며 국가를 전복하려는 “반 수카르노 친서방 장성위원회를 선제 타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성들을 처형한 쿠데타군은 자카르타의 독립광장(Merdeka Square)과 대통령궁을 점령했다. 그러나 수카르노 대통령은 이 쿠데타를 승인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고위 장성들을 납치해 암살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날이 깊어가면서 쿠데타의 지도부는 헛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일련의 일관성 없는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쿠데타는 주 통신건물들을 장악하는 것을 주 목표 중 하나로 했으나 광장의 동쪽에 위치한 코스트라드(Kostrad) 즉 수하르토 소장의 육군전략예비사령부를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은 아직까지도 불가사의다.
당시 수하르토 소장이 예비병력을 쥐고 있었는데 쿠데타 군측의 라디오 방송을 들은 그는 즉시 육군전략예비사령부에 들어가 쿠데타 세력의 약점을 파악하여 진압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사르워 에디 위보워 대령의 육군특수전연대(RPKAD)를 동원 별다른 저항없이 통일광장을 되찾았고 광장의 병력들이 항복하자 쿠데타 군은 반격하는 대신 그들의 본부가 설치된 할림공군기지로 철수했다. 수하르토는 그곳마저 공격해 쿠데타를 완전히 진압했다. 그리고 수카르노가 힘을 잃고 있는 사이 수카르노는 정국 주도권을 손아귀 안에 넣었다. 그는 이 쿠데타 행위를 국가에 대한”위험”이라고 규정하며 대대적으로 비난했다.
군대는 프로파간다 캠페인을 통해 쿠데타에 공산당을 연루시켰는데 이는 수하르토와 군이 기획한 바였고 10월 5일부터 전국에서 공산당 사냥이 시작되었다. 고문당하고 살해되어 유기된 장성들의 사진과 그 장면 묘사가 전국을 뒤덮으며 분개한 국민들이 PKI를 때려잡겠다며 봉기하게 만들었다. 비록 사실관계가 딱 맞진 않았지만 이 캠페인은 대성공을 거둬 인도네시아인들은 물론 전세계의 시청자들도 이 살인사건이 수카르노 대통령의 인도네시아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PKI의 시도였다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PKI는 연루사실을 극력 부인했지만 그간 쌓인 증오가 갈등이 파괴적인 형태로, 그리고 PKI에겐 가장 불리한 형태로 터져 나왔다.
9월 30일 사태를 통해 장성들을 포함해 전국에서 목숨을 잃은 것은 12명이뿐이었지만 수하르토는 이를 대량학살을 꾀한 PKI의 전국 단위의 음모라고 판을 키웠다. 멀리 촌동네의 문맹 농부들까지를 포함해 PKI와 관련이 있는 수백만 명이 쿠데타의 살인자 또는 공모자로 지목되었다. 1966년 초, 코넬 대학(Cornell University)의 베네딕스 앤더슨(Benedict Anderson)과 룻 맥베이(Ruth McVey)는 코넬 신문을 통해 수하르토의 군대가 9월 30일 쿠데타를 좌절시킨 후 반공산주의 캠패인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쿠데타가 진압되고 군대가 대량 체포작전에 나서기까지 3주간의 공백기간 동안 폭력사태나 내전의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이는 육군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다. 수카르노는 “군이 생쥐 한 마리를 잡으려고 집을 불태우고 있다”며 이 숙청작업을 지속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군에 대한 통제권을 강력히 쥐고 있던 수하르토에게 수카르노는 아무 힘도 쓰지 못했다.
4. 정치적 숙청
군은 PKI에게 우호적인 민간인 지도자들이나 군 지위관들을 우선적으로 제거했다. 국회와 내각에서도 수카르노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 밀려났고 체포된 PKI 지도급 인사들은 즉결 처형을 당했다. 군 지휘관들은 자카르타에서 데모를 조직해 이들을 이용해 10월 8일 PKI의 자카르타 중앙당 본청에 불을 질렀다. KAMI라고 불리는 인도네시아 학생행동전선, KAPPI라 불린 인도네시아 청년 및 학생행동 전선, KASI라 불린 인도네시아 대학동문 행동전선을 포함한 반공청년단들이 조직되기도 했다. 자카르타와 서부 자바에서만 1만 명이 넘는 PKI 당원들과 자도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들 중엔 저명한 소설가 쁘라무디야 아난타 뚜르(Pramoedya Ananta Toer)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진: 쁘라무디야 아난타 뚜르-왼쪽은 젊은 시절)
첫 번째 사상자들은 군대 내의 PKI와의 충돌에서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군부 내엔 공산주의에 공감하여 동조하던 부대들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이 수하르토 장군의 탄압에 무력으로 대항했던 것이다. PKI는 당시 해병대, 공군, 경찰군 기동여단의 사령관급까지 침투해 있었다. 10월 초 수하르토의 육군전략예비사령부(Kostrad)와 사르워 에디 위보워 대령(Kolonel Sarwo Edhie Wibowo)이 이끄는 RPKAD 특수전연대가 공산주의자들의 아성으로 알려진 중부자바로 급파되었고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부대들은 작전에서 제외되었다. 한편 실리왕이 사단은 자카르타와 서부자바를 방위하기 위해 전술배치되었는데 이 지역은 중부나 동부자바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량 학살에 대한 면역력이 있는 곳이었다.
중부자바의 고지대와 마디운 지역 일대에서 벌어진 초창기 전투상황을 보면 그 지역에서 PKI가 반란정권을 수립할 수도 있을 듯 보였다.각각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세력들이었으므로 강대국 대리전 성격의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으리란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수하르토의 부대들이 상황을 장악하면서 그러한 우려는 신속히 증발해 버렸다. 반군 세력의 많은 지휘관들이 수하르토가 보낸 병력들이 도착하는 모습을 보며 저항을 포기했지만 수빠르죠 장군(General Supardjo) 같은 이들이 이끄는 부대들은 몇
주간 저항을 이어가기도 했다. 수빠르죠 준장은 말레이시아 대결정책 당시 전선에서 직접 영연방군과 싸웠던 인물로 군 수뇌부가 전쟁을 주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몰래 밀사를 보내 말레이시아와의 평화적 타협을 추구하면서 죄전선부대들의 발목을 잡고 있던 상황에 분개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군수뇌부에 반기를 든 소장파 장성임엔 틀림없었으나 과연 그 역시 공산주의자였느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자료가 부족하다.(사진: 체포된 수빠르죠 준장)
9.30쿠데타가 실패함에 따라 수카르노 대통령의 입지가 무너져 내렸고 수하르토가 권력의 정점을 향해 점점 더 나아가는 와중에서 PKI 국내 수뇌부들에 대한 사냥이 시작되었고 즉결 처분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10월 초 PKI 당수 디파 누산타라 아이딧(Dipa Nusantara Aidit)이 비행기 편으로 중부자바로 피신했는데 그곳 인근 족자, 살라띠가, 스마랑 등의 좌익 장교들은 쿠데타 시도를 지지하는 편에 서 있었다. 하지만 PKI의 전임 지도자 뇨또(Njoto)가 11월 6일 사살당했고 뒤이어 11월 22일에는 아이딧이, 그 얼마 지나지 않아 PKI 제 1 부당수 M.H. 루크만(M.H. Lukman)도 사살당하면서 PKI는 인도네시아에서 신속히 그 명운을 다하고 있었다.
PKI의 마지막 간부들 (왼쪽부터) 아이딧 당수, 뇨또, MH 루크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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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What님의 댓글
NowWhat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브루앙님의 댓글
브루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다큐 영화를 통해 접하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피해자의 가족이 가해자들을 찾아가서 인터뷰 등을 하고 재연도 하는 장면. 소름 끼쳤어요. 수카르노. 수하르토. 헷갈리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