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 야자, 야자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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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unhyup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3-20 12:56 조회723회 댓글0건본문
야자, 야자우유?
김주명
낯선 사람을 만나 첫사랑에 빠지기까지 과학적으로 7초면 된다고, 또 사랑의 지속시간은 900일 정도 된다고 하는 것을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기억이 난다. 과학적인 수치가 놀랍다. 그렇다면 낯선 장소에서 정들기 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아직 과학적으로 연구된 사례가 없으니 자바지역에서 비즈니즈를 하시는 분들의 말을 빌자면, 6개월 정도라고들 한다. 고국에서 새로 부임한 직원도 6개월 정도 지나면 기존 직원이나 현지인이나 거의 비슷해진다고 하니, 그럴 듯도 하다.
오늘 아침에는 작은 트럭으로 늙은(잘 익은) 야자들이 배달되고 있다. 어림잡아 100여 개는 되어 보이는데, 이를 처음 본다면, ‘왜 저렇게 야자를 많이 가져오지?, 저 야자로 뭘 할까?’ 호기심 어린 이방인의 눈빛이 다시 빛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 동네에 잔치가 있겠구나!’ 정도로 마치고 만다. 그새 이방인의 경계를 벗어났다고나 할까?
야자, 야자나무의 열매라고 하면 먼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야자수 쪼개 시원한 야자수를 들이키는 장면이 절대적이다. 그런데 정작 마셔보자면 우선은 쪼개기도 어렵거니와 마셔도 그렇게 시원하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는다. 탄산수와 청량음료에 길들여진 입맛의 탓도 있으려니와, 언제 마시느냐가 또 중요하다. 어느 정도 갈증을 느끼느냐에 따라 당연히 그 맛도 달라질 수밖에는 없다. 그렇다 보니, 야자수에다 얼음과 연유, 그리고 시럽을 섞어서 주스로 만들어 마시는 방식이 더 일상적이다. 야자수를 마시고 난 다음, 이제부터 야자는 중요한 음식 재료이기도 하다. 음식재료가 된다고?
야자 껍질 속에는 과육이 있다. 단단한 섬유질의 껍질 안에 플라스틱처럼 더 단단한 속껍질이 있고 그 속껍질에서 연한 과육이 생긴다. 이 과육은 젤리처럼 숟가락으로 긁어먹기도 하는데, 나무에서 오래된 야자의 과육은 딱딱하며 뚜께도 1cm 정도가 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과육이 음식의 재료인 것이다. 껍질을 벗기고 단단히 굳은 이 하얀 과육을 손질해서 강판에 곱게 갈면 마치 쌀가루처럼 소복이 쌓인다. 이를 모아서 막 다려낸 한약을 짜듯이 고운 천에 담에 짜 내면 하얀 수액이 뚝뚝 떨어진다. 이 수액을 우유 같다고 해서 야자우유, 산탄(santan)이라고 하며 물을 쓰는 대신 온갖 요리에 육수처럼 넣어서 사용한다.
산탄의 구성성분의 70%가량이 물이다. 그리고 기름이 23%로 식용유의 대명사인 대두보다 함양이 높다. 나머지는 당분을 포함한 여러 가지 영양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 산탄을 조청 달이듯 강한 불로 끓이면 수분은 증발하고 기름만 남게 되는데, 야자오일, 팜유가 완성된다.
야자우유의 맛은 어떨까? 정말 우유 맛이 날까? 당연히 우유 맛은 없다. 그냥 마시면 뒷맛이 오래가는 물맛이다. 하지만 이 야자우유와 강황을 섞어서 소고기 찜요리(른당)를 하는 것이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데, 산탄에 특별한 맛이 있다기보다는 산탄으로 인해 온갖 양념의 맛이 오래간다. 강황 때문에 색도 노랗게 되는데, 인도네시아 음식에서 유달리 노란 국물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음으로 밀가루, 쌀가루로 반죽을 하면 물 대신 반드시 야자우유를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구워낸 빵이나 쿠키는 그 풍미가 매우 깊다. 이런 이유로 이제는 산탄이 캔에 밀봉되어 있거나 급속 냉동된 형태로 전 세계 식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야자우유를 짜고 남은 과육은 튀겨서 요리의 고명으로 사용하는데, 꼭 빵가루 같기도 하다. 그래서 야자우유는 건강식으로도 인기가 높다.
야자가 없는 곳에서 살다 야자의 과육이 좋은 건강식이라니, 단번에 그런 믿음은 가지 않지만 적당히 굳은 산탄의 심심한 맛은 매력은 없는 듯 있는 듯 자꾸만 손이 간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산탄으로 요리한 소고기 요리의 기름때는 달라붙기나 엉김이 없어 냉수에다 약간의 주방세제로도 잘 닦인다는 것이다. 무슨 과학적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오후가 되니, 동네 잔치집으로 남정네들이 모인다. 손에는 칼과 손도끼의 중간쯤 되는 ‘빠랑’을 하나씩 들고 야자껍질을 깨기(벗기기) 시작한다. 제대로 익은(오래된) 야자는 껍질이 갈색으로 변하면서 점점 단단해진다. 이제부터 잔치의 시작이다. 낯선 사랑은 운명적이란 이유도, 살다 보니 더는 낯설지 않다는 변명도 집을 나온 부빙처럼 오후 내내 떠돈다.
from 롬복시인
사진촬영하신 롬복의 「나루투어」 박태순 대표님은 ‘롬복지킴이’로 알려져 있으며, 유튜브 ‘롬복의 모든 것’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