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 붉은 양파? 붉은 마늘?
페이지 정보
작성자 munhyup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3-07 22:42 조회783회 댓글0건본문
붉은 양파?
김주명
3월 21일은 춘분, 밤낮의 길이가 같은 날이다. 춘분이 지나면서 낮의 길이가 길어지다 하지가 되면서 태양은 적도를 떠나 북반구 가장 먼 곳, 북회귀선까지 올라간다. 그러면 적도의 나라, 이곳에는 건기가 된다. 거짓말처럼,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계절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가끔 소나기가 내리기도 하는데, 롬복 섬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갈수록 건기가 뚜렷하고, 서쪽인 발리나 자바 쪽으로는 열대우림의 기후를 보인다.
하지만 화산섬의 특징으로 가운데는 높고 해안으로는 서서히 낮아지는 완만한 지형이라서 해안과 고산지대의 기후와 식생도 많이 다르다. 더군다나 대부분 화산의 정상에는 칼데라 호수가 있으니, 마치 물을 품은 깔때기를 머리에 이고 사는 형국이랄까? 그래서 산지에서는 채소농사가 그만이다. 이른바 고랭지 채소가 되는 셈이다.
자바 섬을 비롯 인도네시아 전역의 고지대에서는 배추, 양파, 마늘, 양배추, 감자 등 온갖 종류의 채소들을 지역의 토질에 맞춤형으로 재배하고 있다. 롬복의 고산지대인 ‘숨발룬’이라는 곳은 ‘바왕 뿌띠’라 부르는 마늘 재배지로 명성이 높다. 그런데 꼭 생긴 모양은 마늘인데 색은 붉고 양파 맛이 나는 품종이 있는데, ‘바왕 메라’라고 부른다. 롬복의 이웃 섬 숨바와에서 재배하여 엄청난 양이 롬복과 발리, 멀리 수라바야까지 실려 간다.
‘바왕 메라’를 번역하자면 글자대로 번역하자면, 붉은 양파가 되는데, 마늘처럼 하나의 뿌리에 여러 쪽이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마늘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유럽인들에게는 샬롯(shallot)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맵싸하고 시원한 맛 때문에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인의 식탁에는 마늘과 더불어 빠질 수 없는 양념 채소이다. 여기 사람들은 생식을 거의 안한다지만, 월남고추와 더불어 이 붉은 양파는 생으로도 가끔 먹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붉은 양파의 특별한 기능이 있으니, 주로 닭을 포획 할 때 사용한다. 토종닭은 몸집도 작거니와 새의 족속답게 한 번 날면 20∼30m 정도는 쉽게 날아가니, 산채로 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런데 밤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닭들은 주로 나무 위에서 밤을 지새우는데, 이 붉은 양파를 빻아서 긴 대나무 끝에 묻힌 다음 꾸벅 졸고 있는 닭의 코에다 가져다 대면, 닭들은 마치 환각의 상태가 되어 나무에서 떨어진다. 떨어진 다음에도 낮에 보여주던 그 민첩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비틀거리거나 그대로 꾸벅 다시 졸기 시작하니, 이때는 떨어진 밤 줍듯 닭을 잡아서 줄로 묶어두거나 닭장 안에 가둔다. 붉은 양파의 강한 향이 동물들에게는 각성제로 작용하나 싶을 정도지만, 암튼 생활에서 붉은 양파는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그런데, 붉은 양파의 크기는 마늘인데 껍질은 마늘보다 얇아서 요리 전에 껍질을 벗기는 게 보통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양파보다 더 강하게 쏘는 탓에 누가 볼까, 곧잘 눈물까지 머금기도……. 그래서 아침에는 좀처럼 붉은 양파를 까지 않는다. 얇은 껍질을 벗기다가 괜스레 훌쩍거리기라도 하면, ‘또, 고향 생각한다’ 소리 들을까!
from 롬복시인
사진촬영하신 롬복의 「나루투어」 박태순 대표님은 ‘롬복지킴이’로 알려져 있으며, 유튜브 ‘롬복의 모든 것’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