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 마음을 비운 채소- 공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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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unhyup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2-06 12:31 조회700회 댓글0건본문
마음을 비운 채소- 공심채
김주명
#1. 모닝글로리
어느새 태양이 북반구로 넘어가는 하지가 다가온다. 이때부터 서너 달은 한국이 이곳보다 더 더운 시절, 지금 이곳은 신학기를 준비하는 방학이다. 유럽처럼 가을 학기제를 따르고 있어, 제일 선선한 시기에 휴가철도 집중되어 있다. 몸은 이곳의 생활리듬에 맞추지만, 신학기라면 여전히 3월이 떠오르고 3월이면 ‘모닝 글로리’의 계절이다.
신학기에 쓸 공책도 새로 사고 이것저것 학용품도 챙기는데, ‘모닝 글로리’란 상표가 선명하게 들어온다. 청도에서 대구로 막 전학 와서 맞는 필자의 신학기는 더욱 신기했다. 이 빈 공책에는 무슨 내용으로 채울 것인지는 몰라도, 그 신념만큼은 모닝 글로리처럼 ‘반짝’ 빛나고 있었음을.
#2. 공심채?
2002년, 월드컵의 열기만큼 가톨릭 회관의 상담실이 북적인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외국인 근로자 상담 통역의 시간이 끝나간다. 벌써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간, 밖은 삼삼오오, 그간 못 만난 친구끼리 시끌벅적, 아시아의 온갖 수다들이 흘러나온다. 당시 외국인 근로자들이 겪는 가장 큰 애로 사항이라면, 당연 해외송금이다. 정해진 직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야 별 문제없지만, 대부분이 규정 근무지를 이탈하고 임의로 새 직장 구해서 일도 하고 숙식도 해결하다 보니 속칭 ‘브로커’를 찾게 된다. 크고 작은 문제의 시작이다. 은행에서 근무했던 필자의 짧은 경력과 업무지식을 총동원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각자의 고충을 처리하고 나니, 한결 표정이 밝아졌다.
“미스타 킴! 우리가 점심 살게요. 북부정류장 근처에 인도네시아 레스토랑이 생겼어요.”
“인도네시아 레스토랑?”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요리, 다 있어요.”
그렇게 다국적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1층은 각 나라의 식품재료를 수입해서 판매하는 마트였고, 지하1층에서 간단히 조리도 하고 식사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앉자마자 주문하라고 재촉한다. 신이 났다. 고향의 담배 맛부터 즐기며 그간의 시름을 잠시 놓는 듯, 그새 주문한 몇 가지 음식이 차려진다. 볶음밥격인 ‘나시고랭’과 소고기 튀김은 쉽게 알겠는데, 시금치를 볶은 것 같은 나물은 처음이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니, 인도네시아에서는 ‘깡꿍’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모닝 글로리’가 맞나요? 모닝 글로리라면 나팔꽃인데, 먹어보니 시금치와 미나리의 중간 맛이 난다.
#3. 깡꿍
인도네시아는 지역을 구분하여 3시간의 시차를 가지는 동서가 아주 긴 나라다. 대략 미국의 동·서부보다 조금 더 길다고 하니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섬, 열대우림, 그리고 화산으로 형성된 산악지형 등 다양한 지리적 환경을 품고 있어서 식물의 식생도 너무나 다양하다. 산악지대라도 해발 2천 미터까지 온갖 채소를 심고 수확하니 실제 보고서도 잘 믿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제일 즐기는 채소를 꼽으라면 당연, ‘깡꿍’이다. 미나리처럼 물을 좋아해서 물 있는 곳에는 지천으로 자란다. 맛은 꼭 시금치 맛이다. 힘들게 심고 가꾸는 채소들은 모두 상품이 되어 도시지역으로 팔려나가고 빈 식탁을 깡꿍이 채운다. 물론 깡꿍도 전문적으로 재배하여 출하하고 있다.
줄기를 꺾어서 물가에 꽂아두면 어느새 쭉쭉 새 줄기가 뻗어나가 있다. 그 새순의 서너 번째 마디까지 꺾어 물에 데쳐서 입맛에 맞는 양념과 함께 먹으면 그만이다. 시금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줄기가 텅 비어있다. 꺾으면 ‘통’하며 소리가 울릴 정도로 비어있다. 그래서 이를 공심채, 속이 비어있는 채소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속을 비우듯 마음까지 비우는 이름으로 그만이다. 건기나 우기를 가리지 않고 물만 있으면 잘 자라고 조금 지나면 하얀 꽃이 핀다. 꼭 나팔꽃 같다. 그래서 ‘모닝 글로리’로 곧잘 번역되기도.
오랜만에 필자의 집을 다녀간 지인이 이제는 은퇴하고 도시농업 교육을 받는다고 연락이 왔다. ‘물시금치’가 추천 작물이라는데, 풍부한 비타민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물시금치라면, 전에 오셔서 저희 집에서 드셨던 ‘깡꿍’이네요. 그래요? 그 미나리 같다고 했던 깡꿍이 물시금치인가요?
“네! 맞아요.”
from 롬복시인
사진촬영하신 롬복의 「나루투어」 박태순 대표님은 ‘롬복지킴이’로 알려져 있으며, 유튜브 ‘롬복의 모든 것’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