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 바나나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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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unhyup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2-22 08:42 조회676회 댓글0건본문
바나나 고르기
김주명
낯선 나라에 막 적응해서 산다는 것은 창작이론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낯설게 보기’ 그 차체이다. 여러 면에서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과일 고르기도 그런 경우다. 특히, 바나나 고르기는 몇 번의 낭패 끝에 결국 직접 사는 것은 포하고 ‘남이 주는 바나나를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다’라는 나만의 소극적인 결론에 도달하였다.
롬복 옆에는 숨바와라는 섬이 있다. 동서의 길이가 400km쯤 되고, 남북은 들쭉날쭉하며 대부분 사화산 지대이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막은 대화산 폭발, 탐보라 화산이 있는 섬이다. 그곳을 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중, 작은 시장에 잠시 버스가 정차하자 여러 행상들이 모여들었다. 바나나를 한 가득 펼쳐둔 노점이 한눈에 들어왔고, 아직 서투른 이국생활의 호기심이 발동, 바나나를 살펴보았다. 주인장이 맛보라며 하나 건네는데, 정말이지 달달한 바나나 맛이었다. 일행도 맞장구를 친다. 3달러를 지불하고 양 손에 들지도 못할 정도의 바나나를 챙겨 들고 숙소로 오니, 종업원이 반기다가 깜짝 놀란다. 바나나 때문인가? 짐을 대충 정리하고 맥주를 들이키며 안주 삼아 바나나를 먹다가 깜짝 놀랐다. 반쯤 삶은 감자를 먹는 식감에 맛은 떫은 감 맛이 아닌가? 아! 시장에서는 입에 살살 녹는 맛인데, 왜 이렇지?
태평양전쟁사의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들이 정글의 야생 바나나를 먹다 ‘지옥의 맛’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스쳐 지나간다. 숙소직원의 말을 빌자면, 이 바나나는 바로 농장에서 수확한 것이라서 적어도 1주일은 기다려야 맛이 든다고 한다. 오늘이 여행 첫날인데, 저 바나나를 먹으려면 일주일이나 들고 다녀라? 물론, 다음날 체크아웃 하면서 숙소직원에게 익으면 맛있게 먹으라고 당부하고 일행은 길을 떠날 수밖에, 그래도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물론, 바나나는 수확해서 한국까지 오면서 숙성되고 맛이 든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데,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 어제는 동네 시장에서 바나나 한 묶음만 샀다. 대충 세어보니 10개 정도가 달려있다. 집에 두고 하루에 한 개씩, 맛의 변화를 익히리라! 다음날 아침, 첫 시도를 했다. 역시 떫은 맛, 그대로였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렇게 떫은 바나나와 실랑이를 하는 사이 일주일이 지나갔고, 이제 몇 개 남지도 안았는데, 여전히 맛은 떫었다. 왜 이럴까?
그새, 주말부부로 지내던 아내가 집에 왔고 바나나를 보더니, 한마디 툭 던진다. 이건 요리에 쓰는 바나나인데, 이걸 왜? 아내의 설명으로는 주로 튀겨먹거나 삶아서 먹는 바나나라고 한다. 아니, 삶아서 먹는 바나나도 있단 말인가? 일주일 내내 떫은 바나나를 먹고 나서야 아내에게 다짐했다. 이제는 바나나를 직접 고르지 않겠다고…….
시간을 좀 돌이켜 보자. 1978년 가을이다. 바나나는 정말 특별한 맛을 가진 과일이다. 바나나를 처음 먹었던 그때, 결코 일을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니, 어느 날 아침, 필자는 갑자기 두 다리로 걷지를 못하게 되었다. 이런 날벼락이! 부모님은 어린 아들을 업고서 청도 읍내로 갔다가 곧장, 대구 동산병원으로 왔다. 그리고서 받은 병명이 ‘소아신경마비’, 희귀한 병이며 입원 치료를 하자고 했다. 그 2주 동안, 온갖 종류의 주사와 검사, 물리치료를 한 번씩 하는 게 하루 일과였고, 저녁에 병실에 오면 어김없이 노란 바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나나를 한입 베어 물다 말고는 바나나를 던지며 집에 간다고 투정 정도가 아닌 난리를 피웠으니, 그래도 어머니는 그때 늘 바나나로 나를 달래셨다. 부모로서 당신 심정은 또 어땠을까? 아직도 가슴이 철렁한다. 그렇게 2주가 지나니 이제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이듬해 무사히 5학년으로 진학했다. 동네 친구들에게 벌써 자랑했던 바나나 이야기를, 새 학기 친구들 모아놓고 또 바나나 자랑을 했다. 너희들 바나나, 알아? 먹어는 봤니?
바바나의 본고장에서 사는 사람들이 바나나를 대하는 법은 역시 달랐다. 초상이나 찬치, 손님 접대에 빠지지 않는 바나나는 딱 맛이 제대로 들었을 때 내 온다. 색깔이야 노란 바나나도, 초록색 바나나도 있지만 맛은 한결같다. 달달하고 입에 딱 맞다. 이유식을 막 시작할 간난 아기도 잘 익은 바나나부터 시작한다. 삶은 바나나는 설탕을 조금 뿌려서 먹으면 영락없이 감자 삶아 먹는 것과 꼭 같다. 튀김도 마찬가지, 바나나를 이등분하고서 튀김옷을 두껍게 입혀서 튀겨낸다. 그러면 바나나는 튀김옷 안에서 꼭 시럽처럼 입에 녹아드니, 이 튀김 두어 개와 커피 한 잔이면 간단한 한 끼가 된다.
왜 이렇게 바나나를 삶고 튀겨서 먹을까를 넌지시 짐작도 해본다. 벼농사를 세 번씩 한다지만, 물이 많은 곳에서나 가능하고 거의 대부분이 천수답이다 보니 일 년에 한 번, 그마저도 수확량이 줄거나 하면 먹을 게 마땅치 않은 삶이었으리라. 80년대 이후가 되어서 관개시설도 좋아지고 비료가 보급되면서 배고픈 시절은 끝났다고 하니, 그래도 맛의 유전자는 계속 이어졌으리라!
시간이 많이 흘렀나 보다. ‘응답하라 1998’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제사상에서도 한 자리 딱 차지하는 동남아 과일, 바나나다. 이제는 시장의 바나나 좌판 앞에서, 이건 요리용이고 이건 며칠 숙성시켜야 된다며 그 정도 혜안은 있다며 자랑도 하고 싶고 으쓱 힘도 주고 싶은데, 사람이 없다. 유례없는 팬데믹으로 막힌 하늘 길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은 있지만, 여전히 아쉽다. 아는지 모르는지 보름달이 휘익 지나가는 밤이다.
from 롬복시인
사진촬영하신 롬복의 「나루투어」 박태순 대표님은 ‘롬복지킴이’로 알려져 있으며, 유튜브 ‘롬복의 모든 것’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