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원 | 인터넷문학상 학생부 장려상 - 한인니문화연구원상 '나의 추억 나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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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인니문화연구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1-27 20:27 조회4,373회 댓글0건본문
나의 추억 나의 보물
문현윤 (JIKS 11학년)
인도네시아, 많은 문물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매력적인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 나는 장장 11년 동안 생활하고 있다. 그 다사다난 했던 내 짧다면 짧을 수도 있고 긴다면 길 수 있는 인생을 회고해보았다. 돌이켜 보건 데, 내 가족은 여행을 정말 즐겨했다. 많은 사람이 가지 않은 곳을 여행 장소로 택하며 대부분 쉬운 방법보단 도전적인 수단을 택해 여행을 떠났던 것 같다. 어린 나는 당시 매 여행에 불평만 늘어놓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모든 여행이 나에게 뼈가되고 살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다. 이제 나는 내가 했던 여행 중 가장 힘들었으며 가장 뿌듯했던 여행을 들려주고자 한다. 11학년이 된 지금도 4년 전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이 여행은 나에게 값진 여행이다.
그 당시, 부모님과 오빠가 발리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모험을 좋아하는 우리 부모님은 오빠에게 차로 여행을 갈 것은 어떠냐며 제안했다. 처음에 오빠가 거절할 것을 예상했지만, 예상과 다르게 오빠는 그 여행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내가 불편한 것을 예상하여 계획에 찬물을 부울 예정이었으나, 내 의견은 보기 좋게 묵살 당하였다. 정확히는 엄마와 아빠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버렸다. 그때 만약 내가 가족의 계획을 무산 시켜 버렸다면, 그런 값진 추억을 얻지 못했다는 좌절감이 들었을 것이다.
여행 일주일 전부터 오빠는 상기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여행 계획을 소문내고 다니었다. 결국 며칠 뒤 엄마에게 주의를 받을 정도로 오빠는 그 여행에 기분이 좋아져있었다. 나 또한 오빠의 그런 모습에 이번 여행은 왠지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아서 오빠와 같이 기대를 하고 있었다.
여행 당일이 되자 나의 흥분한 마음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저녁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그날 하루는 참 시간이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원을 가도 집중이 안 될 정도로 들떠있었다. ‘차에서 자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가족들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라는 생각들이 온종일 내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차에 모든 짐을 싣고 나서 바닥에 깔은 이불에 누웠을 때 나는 아직도 그 포근함을 기억한다. 엄마가 아이를 재우기 위해 딱딱한 바닥을 이렇게 푹신하게 만들 정도로 정성을 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 없이 푹신한 바닥에 만족하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 때를 생각해 보면, 나보다 덩치도 큰 오빠가 자신의 잠자리를 내어주고 (내가 때를 써서 그 자리를 얻었기 때문에) 엄마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웠는데, 가족들이 막내인 나를 위해 얼마나 배려해줬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여행은 시작하였다. 모든 여행의 길은 종이로 된 지도에 의존하며 갔어야했고, 방을 얻지 못하면, 차에서 잠들어야 하는 그런 ‘모 아니면 도’인 여행을 했다.
우리의 첫 번째 도착지는 브로모 산이었다. 밤에 출발하여 다음날 밤에 브로모 산 부근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일출을 볼 목적으로 갔기 때문에 그곳에서 방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전에 아무런 예약 없이 그곳으로 향했기 때문에 모든 비상에 대비하여야 했다. 그렇게 첫 번째 시련이 왔다. 바로 호텔이 꽉 차 있었던 것 이다. 우리 가족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만 하고 있었다. 당장 잘 곳이 없어 또 차에만 자기에는 이미 가족 모두가 지쳐있었고, 기사 아저씨 또한 불편해 할 것이 물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 민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다행이 민박집은 얼마 가지 않아 구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로 하였다. 부엌에 들어간 나는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내 눈으로 아궁이 비슷한 것이 사용되는 것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아빠도 불을 때는 광경을 보고선 ‘정말 현지 체험이구나...’를 연신 말씀하셨다. 기사 아저씨도 그 광경이 신기한 듯 핸드폰으로 그 상황을 찍었다. 그리고 이틀 만에 나는 침대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렇게 셋째 날이 밝아왔고, 우리는 일출을 봐야한다는 일념 하에 일찍이 서둘러서 짐을 꾸려 산을 올라갔다. 차로 올라가기에 다소 벅찬 길들이 많았지만, 기사 아저씨가 능숙히 올라가주었다. 그러다가, 난관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반차로 갈 수 없는 영역이 나온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차에는 일주일치 물건이 저장되어 있어서 다른 차보다 무게가 남달랐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그 곳에 있던 지프차를 이용하게 되었다.
정상에 도착하였을 때, 나는 일출보다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것을 용케도 알아주신 기사 아저씨께서 자신의 담요를 나에게 덮어주었다. 그때, 낯가림이 심한 내가 기사아저씨에게 처음으로 함박웃음을 건넸었다. 그리고 브로모 산에서 또 하나 놀랐던 것은 일출을 보려고 한 그 곳에 한국인이 우리 가족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꽤 많은 한국인들도 브로모 산의 일출을 보려고 왔었고, 나는 브로모 산이 그만큼 명성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첫 브로모 산 여행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서둘러 본 목적지인 발리로 향하였다. 그때 당시, 네비게이터도 아예 발전되지 못하여서 지도에만 의존하느라 길을 찾는 데 시간이 배로 걸리었다. 하지만 여차 저차 해서 우리는 선착장에 도착하였고 차로 발리까지 들어가는 배를 예약하였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어 기분이 좀 언짢았으나, 도착하자 모두들 다시 원상복귀 하였다. 하지만 가는데 시간이 좀 걸려 해가 지고 있는 상황이여서 잠 잘 곳을 마땅히 찾지 못하였다. 심지어 아는 분이 소개해준 곳을 갔더니 예약이 만원이여서 받아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상한 허름한 모텔 같은 곳에서 하룻밤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날 만큼은 오빠가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밑에서 잠들게 되었다. 다음날 오빠가 하는 말을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빠는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편하게 자봤어.’라고 했는데, 그 때는 오빠가 이때까지 잠을 설쳤나 보다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언제나 나를 편안한 곳에 재우느라 오빠는 바닥에서 자기 다반사였고 불편한 것은 모두 오빠가 도맡아 했던 것이었다.
그 후, 아침에 일어나 한 방 가격을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때 당시는 물가가 싼 편인지 몰라도 하루 자는데 35000 루피아밖에 들지 않았다. 엄마가 당시에 돈을 내면서, 우리는 비행기에서 호텔에서 자고 갈 비용의 반을 아끼었다는 말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라면을 제외한 모든 끼니는 지나다니다가 길가에 있는 포장마차에서도 먹어보았고 인도네시아 현지 음식점만 골라 다니면서 밥을 먹었는데 언제나 싼 것만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음식비용은 현저히 줄어들었을 것일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가용으로 왔기 때문에 못갈 곳이 없었다.
발리에 있는 사흘 동안 원숭이 사원에도 가고 Tanah Lot에도 갔다. 원숭이 사원에서는 오빠 위로 원숭이가 올라갔는데, 그 악취가 너무 심하여 나는 오빠가 샤워하기 직전까지 오빠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Tanah Lot에서는 일몰을 보았는데 그 풍경은 절경이었다. 절벽과 어울러 지며 해가 지는 모습에 어린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Tanah Lot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바로 잠자리였다. 처음으로 방갈로다운 방갈로에서 잠을 잔 것 이다. 내 생각에 우리가 든 비용의 절반이 그곳에서 사용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은 시설의 방갈로였다. 그렇게 발리의 기분 좋은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다음날 나는 곧장 집으로 간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오빠가 초를 쳤다. 바로 족자를 들렸다 가자는 것이다. 솔직히 그땐 오빠의 입을 막아버릴 수 있었다면 막고 싶었다. 하지만 오빠의 끈질긴 요구에 족자에 들르게 되었고 우리는 예상 날짜보다 하루 더 늦게 도착하게 되었다. 족자에서는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날씨 또한 무지하게 더웠다. 그래서 나의 불쾌지수는 하늘을 찌를 듯이 상승하였다. 심지어 내가 방문한 쁘람빠난 사원은 공사중이여서 제대로 관람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도착한 보로부드르 사원에서는 아빠의 역사교실이 펼쳐졌다. 그리고 기사 아저씨 또한 나에게 족자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내가 인도네시아어가 조금 부족한 것을 알자 기사 아저씨는 최대한 쉬운 단어로 내가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족자 방문에 대해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렇게 우리가족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나는 한동안 차에 타는 것을 꺼려했다.
현재 우리 오빠는 한국에 대학을 다니고 있다. 그 일이 모티브가 되어 자신은 나중에 여행 다니는 것과 연관된 직장을 가지고 싶다면서 항공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여행은 가족끼리 담화를 나눌 때 꼭 등장하는 화제이다. 이로 하여금 우리 가족은 대화가 끊이질 않고 추억거리를 예기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여행은 그 누구보다 값진 추억이며 내 평생의 보물거리가 될 수 있다. 근래에 들어서 오빠가 내년에 내가 대학입시를 치룬 다음 한 번 더 시도 하자고 하지만 나는 이 일을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 어린 나의 순수함이 그 여행에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보물거리를 오염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카르타에 거주한지 어언 12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만큼 정든 나라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지금 이 곳 자카르타는 제 2의 고향이라고 할 정도로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곳에 생활하면서 힘든 일도 많이 있었지만, 뿌듯한 일도 많았습니다. 특히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를 재학하면서 제게 꿈이 생겼습니다. 바로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면서 국어에 관한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제가 국어에서 어느 부분이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가에 고심하던 도중 뜻 깊은 상이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바로 학교에서 개최한 한글 글짓기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장원을 탔던 저는 글쓰기에 더욱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그 시기에 인도네시아문학상에 대해 듣게 되어 행복한 마음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상이 제가 처음으로 지원하여 얻는 상이므로 장려상도 저에겐 과분한 상 같습니다. 저에게 이런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앞으로 향해갈 길의 시작점에서 생수 몇 통의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제게 이러한 힘을 주는 상을 받아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