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을 만난 정현(22·한국체대)의 얼굴에선 밝은 미소가 넘쳤다. 그런 제자를 바라보는 옛 스승은 흐뭇하기만 했다.
정현은 1일 저녁 서울 송파구의 한 식당에서 삼성증권팀 시절 3년 가까이 자신을 가르쳤던 김일순 전 감독(49)과 재회했다. 김 전 감독은 정현이 호주오픈 16강전에서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를 꺾은 뒤 방송 카메라에 남긴 ‘캡틴 보고 있나’ 메시지의 주인공.
정현은 당시 “삼성증권 팀이 해체된 뒤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감독님에게 나중에 잘되면 뭔가 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연이 화제가 되면서 김 전 감독은 며칠 동안 휴대전화를 꺼두며 잠수까지 탔다. 주인공은 정현 하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날 김 전 감독은 삼성증권 감독 출신인 주원홍 전 대한테니스협회장이 마련한 축하 모임에 선뜻 나서 큰일을 해낸 제자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두 달 만에 정현을 봤다는 김 전 감독은 “TV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얼굴도 많이 타고 꽤 수척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와인 잔에 김 전 감독이 따라준 사이다를 받아 건배를 한 정현은 “캡틴이라는 표현은 감독님과 카톡 대화를 나눌 때 쓰는 말이다. 이렇게 앞에 계시면 감독님이라고 부른다”며 웃었다.
김 전 감독이 발 상태를 묻자 정현은 “다음 주부터 공도 칠 것 같다. 어려서 회복이 빠르다”며 안심을 시켰다. 김 전 감독은 “이젠 유명인이 된 만큼 몸 관리를 더 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귀국하면 돼지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는데 너무 바빠 구경도 못 했다는 정현은 “감독님이 좀 사달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에 김 전 감독은 “상금도 많이 받았는데 네가 쏴야 하지 않니. 지하철 타고 다닐 때 연예인처럼 마스크는 쓰지 말라”고 말했다.
중학교 때 미국 유학을 갔다 적응에 애를 먹고 귀국한 정현은 고1 때인 2012년부터 김 전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정현은 “힘든 시기에 나를 잡아주신 감독님이 안 계셨다면 이런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고 고마워했다. 김 전 감독은 “현이는 쉽게 만족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더 기대가 된다. 결과에 너무 부담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이가 우리 모두의 꿈을 이뤄주는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안양여상 1학년 때 일치감치 태극마크를 단 뒤 10년 가까이 활약한 김 전 감독은 경기 시흥에서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유소년을 지도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정현 아버지 정석진 씨와 어머니 김영미 씨를 비롯해 윤용일 전 삼성증권 코치, 조윤정 임규태 등 삼성증권 출신 선수, 재미교포인 김인곤 미주대한테니스협회장 등이 참석했다.
한편 정현은 2일 공식 기자회견을 가진 뒤 이날 오후에는 모교인 수원 삼일공고 환영행사에 참석했다.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취재진 질문에 그는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대학생 이후부턴 바퀴벌레가 나오면 라켓으로 덮어놓고 어머니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며 “모기도 손으로 잡는 걸 싫어해 휴지로 싸서 잡는다”고 고백(?)하는 등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을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