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 여자 vs. 55세 남자... 테니스 그 이상의 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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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돌도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10-27 10:25 조회2,263회 댓글0건본문
1973년 9월 20일 여자 테니스 선수 1위인 29세 빌리 진 킹 (Billy Jean King)과 남자 윔블던 챔피언인 55세 바비 릭스(Bobby Riggs)의 테니스 매치가 열렸다. 성별과 나이의 바운더리를 초월하는 이 매치는 존속했던 모든 '아이덴티티 정치'에 도전하는 사회운동이 됐다.
여성 스포츠 선수 최초로 상금 10만 달러를 수상한 유망한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은 자신의 성공에 안주하려 들지 않는다. 그녀는 여성 테니스 선수들의 상금이 남성 선수들 보다 현저히 적다는 이유로 테니스 협회를 탈퇴한다. 킹은 동료들과 여성 테니스 협회를 창설하고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지만 그녀들의 요구는 스포츠계 중역들을 포함한 기득권 남성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한물간 테니스 선수, 바비 릭스는 유복한 집의 딸과 결혼한 덕으로 장인의 회사에서 '빌붙어' 살며 꽤나 윤택한 삶을 연명하고 있다. 선수로는 이미 허물어진 자신의 삶에 도박이 유일한 낙이었던 그가 여성 테니스 단체의 창설을 보고 도전장을 내민다. 스포츠계 안팎으로 '눈엣 가시'였던 여성 테니스 협회의 선수들을 이겨 재기 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쇼비니스트 피그(chauvinist pig: 남성 우월주의자를 지칭하는 욕)"라고 자칭하며 여성 플레이어를 "그들이 있어야 할 부엌과 침대"로 보내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결국 빌리 진 킹이 바비 릭스의 '도발'을 받아들이면서 여성 vs. 남성이자 29세 vs. 55세, 전례에 없는 릭스와 킹 사이의 매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 속 < MTM쇼 >의 의미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은 <미스 리틀 션사인>의 연출을 맡은 발레리 페리스, 조나단 데이턴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다. 1973년 당시 경기를 둘러싼 피 튀기는 미디어 전쟁으로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사건이지만 영화는 경기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실제 매치가 일어나는 후반부까지 관객에게 '숨 돌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배우와 연기와 편집, 촬영 등 모든 면면이 굳이 골라 몇 개만 언급하지 않고 싶을 정도로 탁월하다. 영화는 1970년대의 미국 사회에 스며들었던 '기운'을 기능적이고 상징적인 레퍼런스들을 사용해 연출한다.
가령 릭스(스티브 카렐 분)가 도박에 이겨 따낸 '롤스 로이스' 안에서 텔레비전을 켤 때 나오는 프로그램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를 모았던 시트콤 <메리 타일러 무어 쇼>(아래 MTM show)다. 릭스가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른 채널로 돌리는 장면으로 마무리 되지만 이 신에서 < MTM쇼 >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영리한 타이밍이다. 1970년에 첫 방송돼 1977년까지 장수한 < MTM쇼 >는 미네소타에 위치한 한 지역 방송국 여성 PD의 일상을 주제로 한 코미디 쇼다. 방송은 주체적인 '커리어 우먼(들)'을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전 국민적 인기를 얻은 최초의 쇼 프로그램이다(쇼의 오프닝의 등장하는 'Love is all around you' 라는 테마 송은 전 미국에서 히트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부상하던 페미니즘, 여권신장 운동과 함께 < MTM쇼 >가 다루던 여성 이슈들, 가령 미혼모, 여성들의 승진 등은 오락 프로그램 이상의 사회적 조명을 받았다.
릭스가 도박에 이기고 받은 롤스 로이스로 인해 집에서 쫓겨나, 꽤나 진보적이었지만 인기몰이의 중심이었던 < MTM쇼 >를 보게 된다는 설정은 매우 위트 있으면서도 메시지가 묵직하다. 지나치게 잘 사는 아내 덕에 허리 한 번 못 피고 사는 도박 중독 남자는 '팬텀(유령)'이라는 별명을 가진 차를 따낸 자신이 자랑스럽다. 유령에 홀리듯 눈 앞에서 바뀌고 있는 세상을 외면하고 나머지 인생에 도박을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당신들은 '여성 반항자들' 입니까?"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레퍼런스는 빌리 진 킹이 여성 테니스 협회를 창설하고 멤버들과 함께 홍보차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디제이와 대담을 나누는 장면이다. 디제이는 "당신들은 여성 반항자들 입니까(Are you woman rebels)?"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성 반항자'는 동명의 잡지 이름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 반항자'는 미국에서 최초로 여성산아제한운동을 일으켰던 간호사 출신의 급진적 페미니스트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가 1914년 발간했던 페미니스트 잡지의 이름이다.
▲마가렛 생어가 발간했던 잡지 <여성 반항자들(The Woman Rebel)>ⓒ 여성 반항자들
당시 미국에서는 피임이 불법이었고 마가렛 생어는 "피임 금지법은 여성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 잡지의 출판으로 생어는 재판을 받아야 했으며 결국 구속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미국으로 귀국한 후 반복되는 구속과 석방을 감내하면서도 그녀의 투쟁은 계속됐다.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1960년 미국 FDA는 최초로 구강 피임약을 승인하게 된다. 시판 되고 5년도 채 되지 않은 1964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피임약을 복용하는 여성은 1300만 명을 기록했다.
빌리 진 킹과 마가렛 생어의 관계
빌리 진 킹과 마가렛 생어는 많은 면을 공유한다. 아마도 영화의 창작자들은 그 점을 염두하고 대사의 단어들을 선택했을 것이다. 단순히 페미니스트이어서가 아니라 그녀들은 누리지 못한 자들을 대변하고 투쟁했다.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에서 그리듯, 빌리 진 킹은 여성의 권익뿐만 아니라 동성애 그룹을 대변하기도 했으며 마가렛 생어 역시 이민자 가정과 저소득층을 위한 캠페인을 펼쳤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은 해학과 현학, 그 경계를 겸허히 넘나드는 작품이다. 많은 것을 보여주되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좀 능동적인 관객이 되어야 할 뿐이다. 음악, 각본, '시네마토그래피'(피사체를 촬영해 영화 이미지를 만드는 모든 과정)를 포함한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 뭐 하나 유쾌하지 않은 것이 없다. 영화를 보고,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영화'를 학습하게 된다. 참으로 오랜만에 지적인 '보신(補身)'이 되는 작품을 만난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