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페더러는 어떻게 황제의 길을 걸어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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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돌도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9-25 11:52 조회6,280회 댓글0건본문
로저 페더러(스위스,36세)를 설명하는 데는 한참이 걸린다.
스포츠 분석가, 테니스 비평가 및 전 현직 선수들로부터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히는 페더러는 어떻게 황제의 길을 걸어왔는지 살펴보자.
출생
그는 1981년 8월 8일 스위스인 아버지 로버트 페더러와 남아프리카공화국 태생의 어머니 리네트 두란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와 독일 국경에 가까운 뮌헨쉬타인에서 자라나 그의 모국어는 스위스어(Swiss German)이지만, 프랑스어와 독일어, 그리고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다른 스위스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페더러 역시 스위스 방위군에서 의무복무를 하게 되었으나, 지속적인 척추질환으로 인하여 병역의무를 면제받게 된다. 현재 그는 스위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두 개의 국적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 페더러 어린 시절 |
어린 악마(Little Satan)
ATP Top 30 선수들이 테니스를 시작한 평균 연령은 5.6세. 이에 비하면 페더러는 조금 늦은 편인 8세 때 고향인 바젤의 한 테니스 클럽, Old Boys Club에서 테니스를 시작했다. 이 클럽의 헤드코치로 일하던 체코 태생의 세플리 카코프스키가 그의 첫 번째 코치이다. 페더러에게 테니스의 기본기술과 전술을 가르친 그는 페더러의 잠재력을 알아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우리클럽과 저는 로저가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 로저에게 개인교습을 시작했는데 일부 교습료는 클럽에서 지원했어요. 그는 엄청나게 빨리 배웠어요. 다른 애들이 몇 주씩 걸려 배우던 걸 서너 번만 해보고 깨우쳤죠” 후에 페더러는 그로부터 익힌 테니스의 기본 전술과 기술이 이후 그의 테니스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페더러는 여기에서 카코프스키로부터 그룹 및 개인훈련을 받았는데, 때때로 빈둥거리며 성질을 부리다가 훈련에서 제외되기도 했으며, 경기 중 어이없는 샷을 날렸을 때는 감정이 폭발하기도 해서, 어떤 코치는 그를 ‘작은 악마(little satan)’라고 부를 정도였다. 어느 날 페더러가 경기 도중 분을 못 참고 라켓을 펜스에 집어 던지는 것을 본 부모가 너무 쇼크를 받아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린 아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들은 그것이 문제라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엄마에게, “엄마, 집에 돌아가셔서 와인한잔 쭉 하시고 푹 쉬세요” 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할 정도였다.
페더러의 이런 불안하고 취약한 기질에도 불구하고 카코프스키를 감동시킨 것은, “로저는 지는 경기에서도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었고, 성질을 부리더라도 나중에는 결국 자신의 실수로부터 기꺼이 뭔가를 배우려고 했어요” 라며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카코프스키는 원핸드 백핸드(one handed backhand)의 신봉자였고, 페더러의 우상이 보리스 베커이고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피트 샘프라스와 스테판 에드베리였던 걸 감안하면 페더러가 일찌감치 원핸드 백핸드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 코치이자 친구인 피터 카터. 아쉽게 아프리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페더러의 결정적 약점이었던 멘탈을 지도했다 |
코치 피터 카터(Peter Carter)
10세부터 14세까지의 기간 동안 페더러는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시간보다 코치 카터와 지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호주출신의 피터 카터는 부상 때문에 선수생활을 그만 두고 스위스에서 코치생활을 시작하기 전 세계랭킹 173위까지 올랐던 프로선수였다. 또한 레이튼 휴잇, 다렌 카힐, 로저 라쉬드 등 호주의 유명 선수들을 가르쳤던 피터 스미스의 제자였다. 초기 카코프스키가 지도한 바탕위에서 피터는 페더러에게 보다 완벽한 기술과 더불어 보다 높은 레벨의 시합에서 필요한 전술 및 심리학까지 가르치며 페더러의 높은 기술완성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매일 페더러의 모든 연습, 경기를 꼼꼼히 분석하고 가르쳤다. 특히 주의를 기울인 부분은 그의 감정상태였는데, 어린 페더러에게 그가 감정을 폭발시켜 분출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허비하는지를 알게 했다. 감정조절 법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쳤다. 그 이후 몇 년 간 코트에서 페더러의 감정분출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후에 페더러는 “제가 소년시절부터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했죠. 피터는 조용했지만 전형적인 유머감각이 있는 호주 사람이었어요. 여태까지 그가 저에게 해 준 것에 대해 한 번도 충분히 감사의 표시를 한 적이 없어요. 저의 모든 기술과 평정심은 모두 피터 코치 덕분이죠” 라고 술회했다.
11세 때 스위스 국내 주니어부 챔피언십 12세부 이하에서 결승에 진출했다. 이듬해 우승하게 되는 데, 이때부터 그는 프로테니스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축구도 열심히 했던 그는 빡빡한 테니스 스케줄 때문에 축구훈련이나 주말경기에 빠질 수 밖에 없었고 점점 축구와 공부에는 흥미를 잃어갔다.
▲ 페더러의 투어 첫 코치,체코 태생의 세플리 카코프스키 |
집을 떠나서(Leaving Home)
13세 때 그는 스위스 국립테니스아카데미(Swiss National Tennis Academy)의 유망주양성프로그램에 초청받는다. 학교수업과 하루 세시간의 테니스훈련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지만 그는 그의 고향에서 기차로 두 시간 정도 걸리며, 스위스 땅이지만 프랑스 어를 사용하는 에쿠블랑에 있는 아카데미 입교를 거절한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꾸어 자신의 14세 생일이 지난 며칠 후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아카데미는 크리스토퍼 프라이스와 피에르 파가니니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프라이스는 코칭(coaching)과 피지컬 트레이닝(physical training)을 책임지고 있었다. 프랑스어도 잘 못했고 난생처음 집을 떠나서 생활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가벼운 따돌림 등 페더러에게 처음 몇 달간은 수시로 짐을 싸서 돌아갈 뻔 할 만큼 힘든 시기였지만 이내 극복하고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그리고 시합이 없는 주는 주말에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친구들과 지내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그의 어머니 리네트 여사는 페더러의 인생에서 이 시기가 “독립심을 길러 주었고, 중요한 일을 혼자 직접 결정하는 법을 배운 시기” 라고 술회했다.
1997년 1월 15세 때 페더러는 스위스 주니어챔피언십대회(18세 이하)에서 우승했지만 여전히 라켓을 집어 던지며 ‘완벽한 게임(perfect game)을 추구하는 반항아였고, 16세 생일이 한 달 지난 후 그는 자신의 첫 세계랭킹 803위를 기록했다. 그 해 연말을 704위로 마감했다.
주니어 평정
1998년 호주오픈 주니어대회 준결승에 진출하면서 그는 프로로 전향한다. 3년 후 그는 이쿠블랑을 떠나 새로 건립된 스위스 국립테니스센터로 옮겨 훈련하게 되었다. 이 때 카터 코치를 다시 만나 함께한다. 그 해에 윔블던 주니어 대회 단.복식을 석권했으나, US오픈 결승에서는 날반디안에게 패하고 만다. 그리고는 ATP 토너먼트 툴루즈 대회에서 8강에 진입하고, 새틀라이트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세계랭킹을 301위로 끌어올렸다. 12월 오렌지볼 18세이하부에서 우승하면서 주니어 랭킹 1위가 되더니 ‘주니어 세계챔피언’으로 불리어졌다.
이후 몇 년을 주니어선수로서 풀 타임 투어에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투어코치로서 피터 카터가 아닌 피터 룬드그렌을 선택했는데, 이것은 카터 코치에게는 충격이었으나, 페더러는 이후에도 꾸준히 카터와 접촉했고, 나중에 카터가 스위스 데이비스컵 캡틴으로 선임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프로투어(Pro-Tour)
1999년 초반 Top 100에 들었고,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에서 1회전에서 탈락하기도 했지만, 18세에 들어서면서부터 Top 100에 진입했고, 그 해를 65위로 마감했다.
2000년 2월 마르세유 대회에서 생애 처음으로 ATP 투어 결승에 진출했고 한달 후에는 Top 50에 진입했다. 19세 때인 2000년을 세계랭킹 29위로 마감했다.
2001년 밀라노대회에서 생애 첫 ATP 대회 우승을 했고, 프랑스오픈(Roland Garros) 8강에 오르더니 급기야 윔블던 16강전에서 피트 샘프라스를 물리치며 파란을 일으키고, US오픈 4라운드에 진출함으로써 세계랭킹을 13위로 끌어올렸다.
20세 때인 2002년, 마침내 Top 10에 진입하면서 함부르크 오픈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에서는 1회전에서 탈락하고 만다. 그 당시를 룬드그렌 코치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재능을 가졌지만, 때로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줄 몰랐어요”
친구이자 코치의 죽음
2002년 8월 1일, 피터 카터 코치가 37세의 나이로 남아프리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아내가 1년 여 동안 암과의 투병생활을 극복하고 완치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남아프리카로 여행을 갔다가 각기 다른 차로 이동 중, 카터의 랜드로버가 충돌하면서 발생한 사고였다.
당시 토론토 대회에 참가하던 도중 소식을 들은 페더러는 “매우 슬프고 충격적인 사고입니다. 그는 친한 친구였죠. 그가 저의 첫 코치는 아니지만, 저의 진정한 코치였죠. 저랑 여행도 자주 다니고, 저와 저의 게임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았고, 항상 저에게 좋은 것만 생각했죠. 그는 저의 테니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었음은 틀림 없습니다. 그는 제가 10살부터 14살 때까지 함께했고, 16살부터 20살까지 또 다시 함께했죠. 그는 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았죠” 라며 그를 회상했다.
그의 죽음이 페더러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큰 것으로 짐작된다. 룬드그렌 코치가 지적했듯이, 그는 많은 재능이 있었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그가 밝혔듯이, 그는 카터 코치의 죽음을 계기로 정신적으로 더욱 성숙해졌고, 비로소 자신 스스로가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대회 성적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페더러는 Top 10 이내의 랭킹을 유지하면서도 하위 랭킹의 선수들에게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좌절하고 고민했으나 카터 코치의 죽음 이후 점차 멘탈이 강해짐과 동시에 안정을 보이는가 싶더니, 2003년 마침내 윔블던에서 우승함으로써 한 단계 도약함과 동시에 그 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그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한다.
결혼과 가족
페더러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함께 출전했던 여자선수였던 미르카 바브리넥(Mirka Vavrinec)을 처음 만나 사랑을 싹 틔웠다. 미르카는 2002년 발부상으로 은퇴하고 페더러의 홍보 매니저로 일하다가 2009년 4월 소수의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했다. 2009년 7월 일란성 쌍둥이 로즈와 리바를 낳았으니 속도위반(?)을 한 셈이다.
▲ 그랜드슬램 우승을 가장 많이 함께 한 코치 토니 로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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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로셰(Tony Roche)
2005년 페더러는 호주출신의 토니 로쉬를 코치로 선임했다. 토니는 자신이 그랜드슬램(Grand Slam) 우승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이반 렌들, 패트릭 라프터, 레이튼 휴잇 등 수많은 스타를 키워 낸 코치이다. 페더러는 그와 함께 한 2008년 까지 모두 9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다.
폴 아나콘(Paul Annacone)
미국 대학선수출신이자 ATP 투어 단식 3승, 복식 12승을 올린 프로선수 출신 코치로서 피터 샘프라스, 마라 사핀, 팀 헨만 등 유명 스타들을 가르친, 경험도 많고 유명한 코치이다.
이후 자신의 우상인 스테판 에드베리를 코치로 영입하여 공격적인 테니스로 부활을 성공했으나 조코비치의 벽을 넘고자 크로아티아 출신의 이반 류비치치를 코치로 영입했다.
챔피언 방정식(Champion Formula)
전 스위스 국가대표팀 코치였던 스바토플룩 스토얀(Svatopluk Stojan) 박사는 수 많은 엘리트 선수들을 지도한 경험과 동료코치, 선수 등과 수 많은 토론을 거쳐 다음과 같은 챔피언 방정식을 발견했다.
스토얀 박사에 따르면,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의 재능이며 그러한 재능을 제대로 개발하고 활용하려면 좋은 코치와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지원할 조직, 부모 등 제반 여건이 구비되어야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살펴본 페더러의 테니스이력(Tennis Career)을 스토얀 박사의 챔피언공식에 대입해 보자.
1 재능
스토얀 박사는 챔피언 공식에서 재능이 차지하는 비중이 최소한 50% 정도는 된다고 주장한다. 페더러의 첫 번째 스승 세플리 카코프스키는 “다른 애들이 몇 주씩 걸려 배우는 기술을, 로저는 3~4번 정도만 해 보고 금방 배웠다”라고 했고, 투어코치였던 룬드그렌 또한, “로저는 너무 많은 재능을 가졌지만, 때로는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몰랐어요”라며 술회 한 것을 보면, 페더러가 특출한 재능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 하다.
2 훈련
페더러는 8살 때부터 고향의 한 테니스클럽에서 체계적인 엘리트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즉 동호인 수준 레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니어 선수양성을 목표로 개인 코치까지 두고 체계적인 훈련과 연습을 반복하며 주니어 토너먼트에서 활동했다.
3 코치
페더러를 가르쳤던 코치들은 사실 유명해서 페더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페더러를 가르쳐서 나중에 유명해졌다(물론 페더러가 성공한 이후부터는 유명한 코치들을 영입하여 함께 했지만). 중요한 것은 페더러를 가르쳤던 코치들은 모두 페더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 재능을 어떻게 개발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집중했던 것이다.
4 조직
페더러는 고향의 클럽에서 테니스를 배우면서 주니어 대회에 출전하던 중, 스위스 테니스협회의 유망주육성프로그램(Junior Development Programme)의 주니어 선수로 뽑혀 협회가 건립한 최신 시설의 국립테니스센터(National Tennis Center)에서 좋은 코치와 훌륭한 시설아래 본격적인 훈련을 받게 된다. 사실 페더러가 황제로 군림하기 위해 필요했던 기본적인 기술이나 체력, 전술 등의 바탕은 이 시기에 거의 형성되었다고 봐야 한다.
5 부모
미국테니스협회(USTA)에서 엘리트 선수들 부모의 역할에 대한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 아래의 항목을 보면 페더러의 부모들은 매우 바람직한 부모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판단된다.
까칠한 아들과 충돌하지 않았고, 성적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아들에게 지나친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필요한 지원을 하며 아들의 뜻을 존중하면서 가만히 지켜보는 스타일이었다.
엘리트 선수 부모들의 행동지침
부모들의 가장 심각한 7가지 행동
1) 이기는 것 강조
2) 아이들 비난
3) 감정 조절 능력 부족
4) 아이들의 성적으로 자아 실현하는 것
5) 아이들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
6) 아이들의 연습에 대해 조언을 하며 부담주는 것
7) 아이들의 실수에 소리지르며 반응하는 것
부모들의 가장 바람직한 7가지 행동
1)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원
2) 교통 등 물질적인 지원
3) 아이들이 코트에서의 행동에 책임지게 하는 것
4) 재정적 지원
5) 긍정적인 태도 강조
6) 부모로서 모범적 행동
7) 운동선수답지 않은 행동에 대한 적절한 훈육
6 운
페더러가 운이 있었는지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근거를 찾지는 못했다. 굳이 갖다 붙이듯 들여다 본다면, 그 많은 재능에도 불구하고 아직 특별한 성적을 내지 못하고 부침을 반복하며 방황하던 시기에 지금의 아내 미르카를 만났다. 그녀와 함께 살기 시작한 몇 달 후에 윔블던에서 우승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황제의 행보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내 미르카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면 지나친 억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