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가 친 공이 라인 위에 모호하게 떨어졌다. 선심이 경기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아웃"이라고 외친다. 이때 공을 친 선수가 주심을 바라보며 하늘을 향해 손을 든다. 관중은 10초 정도 박수를 치며 전광판을 바라본다. 전자 판독 시스템 '호크아이(Hawk-Eye)'가 공이 인(in)인지 아웃(out)인지 판정한다. 지난 11년간 테니스 코트의 풍경은 이랬다.
지난 2006년 나스닥100 오픈(미국 마이애미)에서 공식 데뷔한 '로봇 심판' 호크아이는 그동안 심판의 보조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로봇 심판이 선심을 대체하는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 세계남자프로테니스협회(ATP)는 19일 "오는 11월 7~12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넥스트 젠(NEXT GEN) ATP 파이널에서 선심 대신 호크아이가 모든 샷을 판정한다"고 밝혔다. 넥스트 젠 ATP 파이널은 전 세계 21세 이하 남자 선수들 가운데 한 해 동안 성적이 가장 좋은 8명이 최강을 가리는 왕중왕전이다.
전통을 강조하고 가장 보수적인 스포츠로 불리는 테니스는 그동안 주심인 체어 엄파이어(chair umpire) 1명과 9명의 선심이 경기에 배치됐다. 선수보다 심판이 많은 몇 안 되는 종목이다. 경기 중 선수들이 판정에 거세게 항의하거나 때론 분에 못 이겨 라켓을 바닥에 내리치는 모습도 테니스의 볼거리 중 하나였다. 선수들이 선심의 잘못된 판정을 지적할 때마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반박이 뒤따랐다.
그러나 '로봇 심판'이 전면 도입되면 10명의 심판 중 9명이 졸지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상황이 된다. 스포츠계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던 '로봇 심판의 인간 일자리 위협'이 현실로 성큼 다가온 셈이다. 이번 대회에선 코트 위에 두 명의 선수와 함께 주심만 남는다. 모든 샷은 로봇 심판이 판정하고, 선에 가깝게 떨어져 관중이 육안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공은 전광판을 통해 정확한 낙하지점을 보여주는 식이다.
게일 데이비드 브래드쇼 ATP 수석 부회장은 "테니스에서 기념비적인 순간이 왔다"고 표현했다. 테니스를 넘어 스포츠 전체를 흔드는 발표라는 반응도 있다. 축구·야구 등에서도 비디오 판독 기술이 넓게 적용되는 추세이지만 심판을 완전히 배제하고 로봇 심판만으로 판정을 하는 건 넥스트 젠 ATP 파이널이 사실상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미 야구의 경우도 스트라이크존 판정 등은 들쭉날쭉한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로봇에 맡기는 것이 더 공정하다는 의견이 있다. 축구의 오프사이드 판정, 배구의 라인 아웃 여부 판정 등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견이 나오는 형편이다. 테니스계는 전통을 포기하더라도 공정함을 더하기 위해 로봇 심판을 도입한다는 입장이다. 호크아이는 코트 천장 곳곳에 설치된 10~14대의 초고속 카메라가 공의 궤적을 촬영해 떨어진 지점을 보여준다. 2001년 처음 개발됐을 때 호크아이의 오차 범위는 5㎜, 현재는 3㎜ 이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ATP의 실험이 전체 투어로 확산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대회 주최 측은 "넥스트 젠 ATP 파이널이 테니스의 미래를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