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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롬복, 그 9년

박태순, 김은희/ 2000년 롬복에 가족과 함께 정착 후
지금은 한국음식점, 여행사, 선물코너 등을 운영하며 롬복인으로 살고 있다.

Indoweb2015.10.01
멋지고 품격있었던 롬복의 풀빌라 Qunci Villas의 앞 바다

사람들이 미지의 땅을 찾는 이유 무엇일까?
잠시 들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 삼아 미지의 땅을 찾는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나는 지금 우리 가족이 정착하기 까지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미지의 땅 롬복에서 살아온 지난 9년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 남편의 아픔을 삭이고 묻은 9년, 외로움과 그리움, 아이들에 대한 고맙고 미안한 정, 그리고 새롭게 맺은 인연과 쌓은 정들이 산처럼 쌓이고 바다처럼 펼쳐진 인도네시아 누사틍가라바랏주 롬복섬(Pulau Lombok)의 9년을 거슬러보고 있다.

롬복, 롬복은 이제 우리 가족에게 고향이나 다름없다. 남편 박태순과나, 지금 고1인 딸 수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아들 동수까지 우리 네 가족에게 롬복은 더 이상 이국의 낯선 땅이 아닌 것이다. 우리 가족이 천혜의 섬이라고는 하나 낯설고 물 설은 롬복에 이주를 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남편의 사고를 그 원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십 년을 넘게 소방 공무원이었던 남편은 근무 도중에 당한 큰 사고로 인해 얼굴과 머리 기타 상처부위에 무려 300여 바늘을 꿰매는 수술을 받았다. 그 사고 후 가족들은 모두 퇴직을 권유했고, 퇴직 후 우리 가족은 남편의 작은 아버님을 연결 고리로 롬복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일대 변신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엮여온 말 그대로 인연이라고나 해야 옳을 것 같다. 1차 가능성을 타진하고 돌아온 남편이 내게 조심스럽게 롬복에서 식당을 해보자는 제안에, 나는 아이들이 아직 어린데다 장사 경험이 없어서 두려운 가운데에도 겨우 일주일 정도의 고민으로 이주를 결정을 해버린 것이, 어쩌면 깊고 깊은 인연의 고리쯤으로나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환경의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은 유혹, 아직 한국인이 아무도 진출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섬이라는 점 등이 작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살기 어렵고 싫으면 돌아가면 되지. 처음엔 그렇게 마음먹었었다. 내 가족과 고국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싶었다. 그러나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포에서 자카르타까지 비행기로 7시간, 다시 발리행 비행기를 타고 1시간 30분, 발리에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경비행기를 타고 20여분을 날아 도착했던 롬복은 그렇게 만만한 곳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쉽게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기차 간이역 같았던 공항의 첫 인상, 낯선 풍토, 사람들과 그들의 정서, 더위, 언어의 장벽 따위를 헤아려 이 지면을 메우는 일은 삼가 하겠다.

정착을 하자마자 닥친 심각한 상황은 마땅히 살 물건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인 먹을거리 구하기도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돈이 없어서 못 샀는데 롬복에선 돈이 있어도 살 것이 없었다. 심지어 식당을 꾸미는데 필요한 인테리어 소품들을 비싼 운송비를 물어가며 한국에서 가져와야 했다. 어려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부터는 날마다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석양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고국의 그리움으로 몸을 떨게 하는 저물녘이 도래하지 않기를 바랐다. 고국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울음을 삼키던 명절은 망각이라도 되었으면 좋을 것이었다. 한국 책도 보고 싶고, 한국의 뉴스 드라마도 그리워졌다. 세 살짜리 아들이 한국에서 먹었던 과자 이름을 들먹이면 우리 부부는 가슴으로 울어야 했다. 견디다 못한 어느 날 한국으로 전화를 했다. 비싼 전화요금 때문에 수신자 부담으로 걸어야 했다. 책과 과자, 화장품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어려움을 간파하셨을까? 그 후로 시부모님께서는 한 달 걸러 한 번씩 고춧가루와 같은 양념과 깻잎과 같은 밑반찬 등을 보내 주셨다. 그것은 롬복에서 살 수 있는 절대적인 에너지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살게 되었습니까?” 처음 정착을 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듣는 말이다. 어쩌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나 발리나 자카르타에서 오신 한국인들이 우리 부부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다 안다. “용기가 대단하다.” “간이 크다.”는 예사로 듣는 말이고, 불쌍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 이들도 더러 있으니 말이다. 그만큼 롬복은 문명적으로는 후진적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자위가 있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자위를 하려 해도 덮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아직도 진행 중인 아이들 문제다. 그야말로 즐거울 때나 어려울 때나 우리 부부에게 버팀목이었던 아이들의 문제다.

동수가 세 살 때다.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돌아서면 동수는 한사코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유치원 선생님이나 친구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없이 나는 몇 달 동안 아들과 함께 유치원생 노릇을 했다. 맨 뒷좌석에 앉아 자꾸만 뒤돌아보는 아들을 안심시키며 나 또한 알아들을 수 없는 유치원 수업을 온전히 참관했다. 그때 딸아이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학교를 잘 다녀오곤 했는데, 고1이 되고 나서야 딸아이가 밝힌 것은“그때 혼자서 많이 울었다.”였다. 귀로 소리를 들을 수는 있으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입은 있으나 말을 하지 못했던 순간들, 그 많은 날들을 학교에 오가면서 눈물을 흘렸을 딸아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우리부부는 가슴이 미어진다.
그런 딸아이는 롬복에 와서 학교 들어간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시험을 치렀는데 26명 중에 21등을 했다. 말도 잘 못하는 아이가 꼴찌를 하는 것이 당연한데 말이다. 그 후 딸아이는 초등학교를 2등으로, 중학교는 학교에서 일등으로 졸업했다. 고등학교 과정부터는 발리로 유학을 떠났는데 부모도 없는 환경에서 영어와 비즈니스 과목에서 일등을 하는 등 절대 희망이 되고 있다. 우리 부부의 최대 목표는 우리 딸을 어떻게든 대학에 잘 보내는 것이다. 문명도 문화적인 면도 부족하기가 그지없는 롬복에서 잘 자라준 딸, 먹고 싶은 과자를 먹지 못해도 병치레 없이 잘 성장해준 아들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뿐이다. 먹고 싶은 새우깡, 초코파이가 없는 곳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의 바른 성장, 이처럼 감사할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는 중에 우리부부는 국위선양을 하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때다. 그때 우리 식당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안주와 맥주 시켜놓고 현지인들 틈에서 우리 선수들을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우리 부부가 워낙 열심히 응원을 하자 다른 나라를 응원하던 현지인들도 우리를 따라 코리아를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1:0으로 진 독일전 때도 그랬다. 그날 우리 집에선 크게 파티를 열었다. 가수와 밴드까지 동원하고 음식 음료수 맥주 등을 무제한 제공했다. 롬복의 우리 이웃들에게 기아, 삼성, 현대, LG는 일본 기업이 아닌 대한민국 기업으로 알려진 것이 그때부터다. 규모야 슈퍼마켓이라 해야 옳지만 롬복의 유일한 백화점 마타람 몰에서 파는 용마 전기밥통이 한국 제품으로 인식된 것도 그때부터였고, 몰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가 LG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세월이 약이다.” 라는 말이 정말 그냥 생긴 것이 아니란 것을 우리 부부는 정말 실감하고 산다. 이슬람 국가라는 선입견 때문에 당연히 없을 줄 알았던 돼지고기, 정착 2년여가 지난 다음에야 구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 억울한 상황을 누구라서 쉽게 이해할까. 이젠 우리의 라면도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살아있는 인정은 여러 번 우리 부부를 전율하게 했다. 어느 날 자카르타에서 놀러 왔다가 저간의 사정을 알고 가신 어느 분께서는 롬복에 다시 놀러 오실 때 천도복숭아며 과자, 나를 눈물 나게 한 총각무를 한 아름 가져다 주셨다. 또 다른 어느 가족은 과자 못 먹은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서 트렁크 가방 하나 가득 과자를 사오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신 동포들이 참 많이 있다. 이제 식당 또한 조금씩 발전이 있어서 공간과 규모를 늘렸고, 지금은 여행사와 선물의 집까지 겸하고 있다. 잘 못된 인연으로 사기를 당해 한국엘 오간 일까지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롬복인으로서 차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부모님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제 작년에 차 두 대, 작은 집이지만 우리 집을 갖게 된 것도 시부모님의 도움이 컸다. 남편이 달라진 것도 큰 힘이다. 가족들 위하는 마음도 남달라졌고 소방공무원일 때보다 대인관계도 많이 달라져 여행업에도 매우 열심이다. 7월부터는 롬복에 남편과 나만 남게 되었다. 아들이 누나 따라서 중학교를 발리로 가기 때문이다. 유학은 아이들이 떠나는데 남은 우리 부부에게는 숙제가 많다. 딸 아들 잘 가르쳐야 하고, 한국 계시는 부모님께도 효도 좀 해야겠다는 것도 숙제다. 현지의 어려운 이웃들과도 더 많은 정을 나누고 살고 싶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롬복인으로 오래오래 살 것이니 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마술을 걸어버린 섬, 롬복 또한 그 감춰진 매력을 잃지 않은 가운데 세계적인 휴양지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롬복 섬,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로 높은 해발 3,726m의 국립공원인 린자니산(Mt. Rinjani)이 있으며 투어로는 급류타기, 정글 트랙킹, 투어는 바다낚시, 스피트보트, 바나나보트, 무인도 탐사, 스노클링 등이 있다. 이 모든 것이 동력 해양스포츠 시설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연적인 것에 의존해야 하므로 문화에 길들어진 일반인들은 매우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곳 롬복은 우리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줄이고 줄인 글이지만 정해진 원고 량에 많이 넘쳤다. 지면을 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끝으로 우리가족과 직원들 무지 무지 사랑한다는 말 여기에 밝히면서 우리를 아는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행복하세요!!

롬복 섬의 한국인 주인 박태순 김은희씨 부부

글  김은희 (롬복섬)
Indoweb201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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