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경영하는 데는 많은 덕목을 필요로 한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눈, 변화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하는 유연함,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굳건함, 직원을 아끼는 인간미, 사회에 봉사하는 사회적 책임. 이 중 무엇하나만 빠져도 기업의 운영은 삐걱거리기 쉽다.
인도네시아 한성기업의 방진학 대표이사는 어려운 시기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아무런 기반 없는 외국땅에서 기업을 일궈내는 경영자 능력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태권도를 인도네시아에 보급하면서, 국위선양에 앞장서고 있는 글로벌 리더로서 모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2016.자랑스런한국인 한민족동포대상은 7백만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바른 국가관과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고 국가브랜드 가치를 선양하고 재외동포사회에 귀감이 되는 분을 한국신문기자연합회에서 소정의 심사를 거쳐 시상하고 있다. 해외 각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기업을 이끌며 세계 속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세우고 있는 기업가들에게 그 공로를 인정하여 주어진다. 기업가로서의 능력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이와 함께 국가를 위해 노력하는 방진학 대표의 모습은 앞으로 해외 진출할 우리 기업들이 배워야 할 글로벌 기업의 미래를 제시해주고 있다.
어려웠던 시기를 변화의 기회로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있다. 그 타이밍이 비록 기존의 것을 버리는 선택이라 할지라도, 1~2년을 지키려하다 이후 10~20년을 버릴 수도 있다.
88서울올림픽이 열리던 시기는 국가적으로 화려한 시기였다. 경제성장률이 고공행진을 하고, 올림픽을 앞두고 대대적인 국가 차원에서의 변화가 시도됐다. 그러나 국내 모든 분야에서 화려한 시기는 아니었다.
특히 몇몇 분야의 경우, 산업구조의 변화와 함께 국내에서 운영이 더욱 힘들어졌다. 올림픽과 맞물려 국가 차원에서 시도된 이미지 개선은 3D업종으로 불리는 산업들이 국내에서 살아남기가 힘들어졌다.
방 대표가 인도네시아로 건너간 것도 국내에서 일어난 변화를 국내에서 적응하기에 제조업이 더 이상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80년과 90년의 교차선에서 많은 업체들이 동남아시아와 중국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1989년 시장 조사를 통해 인도네시아가 적합하다고 판단한 방 대표는 91년 본격적으로 인도네시아에서의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인도네시아는 당시 개발도상국이라 부르기도 힘들 정도의 경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방 대표가 처음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고 깜짝 놀랐을 정도이다. 길거리에 신발을 신고 다니는 현지인을 보기 드물었을 정도였다.
희망이 있다면 많은 인구와, 인도네시아 정부의 경제 발전을 위한 의지였다. 지금 2억7천만 명에 이르는, 세계 4위의 노동력은 한때 세계의 공장이라 불린 중국에 못지 않은 환경을 제공해 줬다. 특히 제조업의 경우 노동력 확보가 급선무였기에 오히려 아직 개발되지 않은 환경이 많은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많은 한국 기업들의 인도네시아 진출도 방 대표에게는 기회로 다가왔다.
봉제업을 중심으로 한 한국 기업들의 진출에 따라 방 대표도 봉제기계를 생산, 공급하고, 차후 서비스와 판매를 위해 인도네시아로 건너가는 것이 효율성을 보나 장래를 보나 더 나은 판단이었다.
한국에서 초래된 변화가 인도네시아에서의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졌다. 태어나서 자라고, 사업을 일으킨 한국을 버리고 인도네시아를 택한 것은 큰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모험과 도전 앞에 주저했다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이 닥칠 시기가 한국에 오고 있었다. 방 대표의 과감한 결정이 지금의 한성기업을 만들 수 있는 한수가 됐다.
탄탄한 기반, 부드러운 소통, 정직한 품질
기업을 운영하는데 탄탄대로만 걸을 수는 없다. 바람이 불 때도 있고, 거센 비가 올 때도 있다.
방 대표에게 찾아온 첫 어려움이 인도네시아 진출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시기가 늦었다면, 어려움이 단순한 어려움으로 끝이 아닐 수도 있었다.
첫 번째 어려움은 한국에서 시작됐다.
1998년 IMF가 가져다 준 영향은 당시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모두가 어려움을 넘어 절망에 빠지는, 한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만약 방 대표가 한국에서의 기반에 미련이 남아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지금의 한성기업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변화에 적응을 위해 새로운 시도 선택한 과감함이 돋보이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에서의 사업도 마냥 쉽게 풀려가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진출 초기 한국에서 인도네시아로 진출한 기업들과의 거래를 통해 성장해가던 한성기업은, IMF로 인도네시아 현지 기업들도 줄줄이 사업을 접고 돌아가는 상황에 직면했다. 130여 군데가 되던 거래처가 몇 년 사이 10여개로 줄어들게 됐다.
여기서 방 대표는 다시 한 번 변화를 시도했다. 사업의 다각화를 꾀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기반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봉제기계 등 제조업 기계 생산의 기술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 정비와 렌탈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생산 장비를 살릴 수 있는 비닐백 제조업으로 사업을 다양화시켰다. 특히 자동차 렌탈의 경우, 인도네시아에 진출하는데 있어 현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동 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한국 기업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더구나 국산차는 많지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렌탈업체가 없다보니, 방 대표가 사업을 시작한 이후 많은 기업들이 방 대표를 찾아오게 됐다. 모두가 인도네시아에서 공장을 설립하고 제조업에만 치우칠 때 숨겨져 있던 블루오션과도 같은 길을 찾은 것이다.
두 번째 어려움은 인도네시아 현지인에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런 기반이 없는 곳에서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맨땅에 부딪히는 것과 다를바 없었다.
인도네시아로 막 해외 기업들의 진출이 시작될 무렵이다 보니 현지인들도 기업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기술이 없어 이를 가르치는 것은 둘째 문제였다. 온순한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자기들 목소리만 내기에 바빴다. 노동법이나 규정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나오는 현상이었다. 그만큼 후진적 기업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2억7천만 명의 인구가 인도네시아의 강점이었지만, 또 그것이 한편으로는 약점으로 다가오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방 대표는 우선 언어를 통해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언어가 통하면 커뮤니케이션 부족에서 오는 일차적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었고, 언어의 소통만 해결돼도 대부분의 문제가 줄어들었다. 소통이 시작되는 불필요한 언행도 줄어들게 됐다. 한국인들이 처음 동남아시아지역에 진출하면서 가지는 문제점과 동시에 어려움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쉽게 보면서, 언어가 안통하니 그 답답함을 푸는 과정에서 나오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크다. 현지 직원들도 그런 한국인의 모습을 답답하고 안 좋게 보는 경향이 크다. 그런 선입견을 극복한 방 대표의 태도는 인도네시아 현지 직원들도 방 대표를 더 가깝게 느끼게 해준 계기가 됐다.
인도네시아가 제조업 공장을 위한 국가로 부상하면서, 일본과 중국의 진출도 한국 기업들에게는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특히, FTA체결 이후 중국의 진출이 가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물량을 앞세운 중국의 진출에 기존 한국 기업들이 차지했던 분야도 많은 부분 중국 기업들의 차지가 됐다.
방 대표가 거센 후발 주자들의 도전을 견뎌낼 수 있었던 비결은 따라올 수 없는 기술력에 있었다. 중국 제품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인도네시아 시장을 공략하지만, 기술만큼은 따라올 수 없었다. 같은 용도의 기계를 1/3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지만, 그 내구성이나 수명은 한성기업이 제조한 기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처음에 저렴한 가격에 중국 제품을 구입했던 기업들도 얼마가지 않아 다시 한성기업 제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정직하고 신뢰도 높은 제품 앞에서 가격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변화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방 대표와 한성기업의 저력이었다.
여전히 산적한 문제는 많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경제 개발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만, 지역별로 편차가 큰 임금이라던지, 기업 운영을 위한 기반 시설의 부족 등은 여전히 큰 어려움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하나씩 해결해 갈수록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기업들의 성장 동력도 커져갈 것이다. 지금의 어려움은 미래에 대한 투자이다. 방 대표가 지금껏 보여준 변화의 가능성과 저력을 본다면, 한성기업의 성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태권도를 통한 국위선양, 한국을 알리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나날이 강조되고 있는 부분이다. 이는 해외 기업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방 대표는 한국의 국기인 태권도를 통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행하면서, 한국을 알리는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방 대표가 태권도를 통해 인도네시아에 한국을 알리기로 결심한 것은, 일회성이나 짧은 기간을 통해 얻어낸 결론이 아니다. 방 대표는 대한태권도협회에서 꾸준히 일을 해오며 태권도의 세계화를 추진해 오고 있었고, 인도네시아는 그런 방 대표의 바람을 실현하기에 좋은 나라였다.
방 대표는 인도네시아 현지인들에게 태권도를 전파하며 동시에 한국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여타 국가들에서 취미 위주로 태권도를 전파하는 것과 달리, 방 대표는 태권도를 알리고 한국을 알림과 동시에, 좀 더 진지하고 본격적인 태권도 보급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대한태권도협회 인도네시아 지부가 세계에서 10번째로 승인을 받았고, 올해 발족과 동시에 방 대표가 협회장으로 취임했다. 방 대표는 인도네시아 지부의 설립과 함께 태권도를 알림과 동시에,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에서 유치되는 대회에 인도네시아 선수들을 출전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협회 출범 이전, 방 대표가 지원하던 태권도팀 선수가 대한체육회 소속으로 전국체전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방 대표는 향후 자신의 임기 동안 이뤄낼 큰 꿈을 가지고 있다.
방 대표는 우선 많은 선수들을 육성하여 실업팀을 만드는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실업팀이 구성된다면, 태권도를 통해 좀 더 높은 레벨의 선수를 육성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세계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면 인도네시아에서 태권도의 위상이 올라갈 것이다. 막연히 태권도를 알리고 보급을 추진하기보다는, 가시적인 성과를 이뤄내, 현지인들이 자연스레 태권도를 접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궁극적으론 이 선수들을 올림픽에 출전시키고, 메달을 따내는 것까지가 방 대표가 가지고 있는 계획이다. 이왕 시작한 것이라면, 그 꿈을 크게 가지는 것이 좋다. 또, 인도네시아 선수가 올림픽이란 무대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인도네시아의 여타 다른 국민들도 이를 통해 더 큰 꿈과 희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더불어 한국과 태권도에 대한 브랜드 상승효과는 말할 것도 없다. 다른 국가들이 경제적인 면만 보고 인도네시아 진출을 꾀할 때, 방 대표는 태권도를 접목하여 한국을 알리고 있다.
방 대표는 더불어 대학생들을 발굴하여 장학금도 주고, 한인회를 비롯한 각종 모임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나의 제2조국 인도네시아에서 태권도를 통해 한국의 좋은 브랜드를 알리고 봉사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 한국의 기업을 평가함에 있어 그 이윤과 매출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지속돼야 할, 기업을 운영함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이를 회피하려는 기업들도 많다. 그렇기에 방 대표가 보여주는 행보는 더더욱 많은 기업들에게 귀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최병우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