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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문화연구원 282회 문화탐방기

한국문화원2015.09.30

Taman Fatahillah, 해맑은 웃음 속 뼈저린 상처


장인우(Pelita Harapan 12학년)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자카르타의 이름은 바타비아(Batavia)라고 한다. 바타비아의 중심이 되었던 파타힐라(Fatahillah) 광장은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커다란 화합과 소통의 장인 동시에 구 바타비아의 역사가 서려 있어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담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카페 바타비아는 2층으로 이루어진 1800년대 풍의 카페이다. 이 역사 깊은 건물은 1805년~ 1850년 동안 네덜란드 총독의 거주지로 설립되었다. 그 후,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1993년 보수공사 후에 카페로 오픈되었다. 1800년대의 고풍스런 분위기를 테마로 하고 있으며, 벽 곳곳에는 전 카페주인장의 수집품인 유명 인사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카페 2층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재즈 음악에 심취하며 커피 한 잔을 마시면 1800년대 바타비아 시절의 네덜란드 인들의 낭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곳 2층에서는 넓은 파타힐라 광장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오전 10시에도 벌써 산책 온 친구들과 연인들, 견학 온 학생들, 물건 파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여느 관광지와 다름없이 북적거리면서도 햇볕까지 더해주니 더욱 활기차게 보인다. 광장 한 쪽에는 16세기 포르투갈 대포도 전시되어 있다. 포신 앞쪽에 달려있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있는 엄지 표시의 손 모양은 상대에게 야유하는 형상인데 당시 인니 인들에게는 출산, 영광, 힘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스우면서도 호쾌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카페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왼쪽에는 인도네시아의 현대 미술사를 전시해놓은 미술 및 도자기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스풍의 네오클래식 양식의 이 건물은 1870년에 세워져 네덜란드 식민 지배 시절에는 사법 기관으로 사용하다가 다양한 역사를 거쳐 1977년 도자기 박물관의 역사로 개관한다. 1990년 미술과 도자기 박물관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미술의 역사는 남부 슬라웨시 Leang-Leang 동굴 벽화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무려 5000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그려진 손바닥 문양에서는 ‘액운을 막는다.’또는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 유추할 수 있으며, 나아가 어느 문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복을 기원하는 경향을 확인함으로 문화의 보편성을 설명할 수 있는 참고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 도자기는 마자빠힛(Majapahit) 시대부터 발달하였다. 다른 전시실에 전시된 중국 및 유럽 산 도자기는 그릇, 정수기, 잔 등 실용의 목적을 중시한 반면, 인도네시아의 도자기는 대체로 가면, 모형 등 장식품이 대부분이었다. 식민지 시절 예술 활동이 탄압받았던 이유로 1900년대 이전 인도네시아 회화는 많이 찾아볼 수 없다. 인도네시아 인들은 라덴 살레(Raden Saleh, 1800~1880)를 인도네시아 근•현대 회화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유럽에서 그림을 공부를 한 그는 유럽식 화풍에 딱딱하고 선명한 인도네시아의 화풍을 접목시켜 통칭‘라덴 살레 화풍’을 창조해낸다.

라덴 살레 외에도 식민지 시절 수많은 화가들이 작품을 남겼다. 네덜란드 식민 지배 말기(1925년~1938년)의 화풍을 무이 인디(Mooi Indie, 아름다운 인도네시아)라 칭하여, 인도네시아 풍경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낭만파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줄기는 잘라도 뿌리는 꺾을 수 없다는 듯, 식민 지배의 암울한 현실 아래에서도 인간의 행위는 억압될지언정 정신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도네시아 그림의 예술성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인도네시아의 숨겨진 저항정신은 일본이 지배층으로 들어옴으로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1938년부터의 화풍은 Persagi라 불리는 인도네시아 정신을 일깨우는 화풍을 띄고 있다. 이 때의 대표적인 작가가 “Painting is a visible soul”이라는 말을 남긴 수조요노(S. Sudjojono)이다. 사회상을 통렬하게 비꼬는 그림을 다수 제작하여 인도네시아의 정신을 일깨운 화가로도 추앙받는다. 수조요노와 라덴 살레의 동상이 전시관 입구에 세워져 있다. 그 밖에도 Otto Djaja, Hendra Gunawan 등 여러 반일 저항 화가들의 작품도 있었다. 창의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스페인 작가 Antonio Bianco의 작품 또한 같이 전시되어 있었다.

독립 이후에는 갓 일어난 인도네시아 공화국에서 사회 참여적 작품이 다수 등장한다. 수조요노는 이 때에도 활동하며 현실 참여적 작품을 남겼다. 또한 1965공산당 쿠데타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유명한 그림이 이 사람의 작품이다. Hendra Gunawan은 서양과 동양의 화풍을 조화시켜 인간의 얼굴을 비롯하여, 대상을 매우 정성스럽게 묘사하면서도 인도네시아 식의 거친 화풍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민중을 사랑하는 감상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은 헨드라였지만, 공산당 쿠데타에 가담하여 감옥에서 암울한 13년을 보낸다.

공산당 쿠데타 후는 신질서시대로 불려, 인도네시아 특유의 화풍과 정서가 드러나면서도 다른 스타일의 다양한 화가들이 등장한다. Basoeki Abdullah는 대통령 궁 화가로서 지도자들의 그림, 특히 인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대통령 관저 화가다운 묘사력을 보여주나 후 그림 도둑에게 피살당하는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 Affandi는 ‘인도네시아의 고흐’라는 별칭을 가진 인상파 화가로, 정식 교육도 못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절대적으로 야성적이고 날카로운 화법으로 자신의 정열과 자연의 기를 결합한 매우 추상적인 작품을 남겼다. 이외에도 닭, 고양이 그림으로 유명한 Popo Iskandara 등의 그림이 있다. 한편 Eria Supria, Heri Dono 등, 도시화의 폐해를 고발하는 현실의 문제를 지적한 사회참여 작가들도 많이 있었다.

바타비아 카페에서 2층에서 마주 보이는 아이보리색의 커다란 건물이 자카르타 역사 감옥 박물관(Museum Sejarah Jakarta)이다. 이 건물은 바타비아 시 건설의 주역인 2, 4대 총독 인 쿤(Jan Pieterszoon Coen)이 감옥과 함께 지은 건물로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의 시청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조선 총독부인 셈이다. 우리의 경우는 옛 굴욕의 상징을 형체도 남기지 않고 밀어버린 반면 인도네시아는 그것도 역사이다, 또한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 건물을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네덜란드 인들은 바타비아를 네덜란드의 한 도시로 생각했다는데 그런 이유로 이 건물은 암스테르담 궁전을 모델로 지어졌다고 한다. 야심찬 정복자들의 결혼식을 비롯한 온갖 활기찬 행사들은 이 건물 앞, 파타힐라 광장에서 벌어졌다. 반면 죄수들을 처형하던 곳이기도 하다. 광장 계단 양 옆은 지하도로 통하는 길이 있는데, 다름 아닌 고문실이다. 참으로 행복과 피가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장소가 아닌가 싶다. 왜 잔혹한 행사와 행복한 행사를 같은 곳에서 행했는지는 도덕상의 의문점이다.

건물 안에는 구 바타비아의 상징물인 사자 동상과 함께, 초대 총독 쿤의 사진이 떡하니 벽에 매달려 당시 네덜란드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심히 악독하여, 본국에서도 그 통치의 가혹성 때문에 종종 소환 명령이 떨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똑같이 식민 지배를 당했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나라도 얼마나 수난을 당했을지 대략 유추할 수 있으리라.정문으로 들어가서 왼쪽 큰 벽에는 구 바타비아의 전도와 함께 자카르타 시의 간략한 역사가 쓰여 있다. 자카르타는 본래 항구 도시로, 5세기 초 최초의 힌두 왕국 Tarumanegara가 해상 무역으로 엄청난 이득을 봤던 곳이다.

이 건물에는 당시 왕의 힘을 시바 신에 비유하여 그 발자국을 찍어놓은 돌과, 흰 코끼리의 발자국을 찍어놓은 돌도 전시되어 있다. 그 당시 왕국의 기념비문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이 도시는 7세기부터 순다 왕국 령 하에 순다 끌라빠(Sunda Kelapa)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자고로 당시 이 도시의 특산물이 야자(Kelapa)였다고 한다. 1522년 순다 왕국은 서부 자바에 있던 강력한 이슬람 왕국인 반탄 왕국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 지원을 조건으로 순다 끌라빠와 후추 무역의 자유를 포르투갈에 내주었다. 그 당시의 협정을 새긴 Padrao Stone 또한 전시되어 있다. 1527년, 반탄 왕국은 포르투갈과 순다 왕국의 연합군을 쳐서 몰아내고 순다 끌라빠를 정복, 이 도시의 이름을 자야카르타(Jayakarta, 완벽한 승리)로 명명했다. 당시 군대를 지휘했던 반탄 파타힐라 왕자의 사진과 그 옆 반탄 왕국이 포르투갈을 격퇴했던 대포의 정교한 조각 또한 그 안쪽에 전시되어 있다. 그 대포는 유럽에서 가져온, 인도네시아에서 사용한 첫 대포라고 한다. 1619년 네덜란드에 의해 자야카르타가 파괴되고 쿤 총독이 이 도시를 바타비아로 명명한다.

그 후 구 일본 제국 지배하에 자야카르타를 줄여 Djakarta의 이름을 되찾았고, 추후 개정된 인도네시아어 표기법에 의해 Jakarta가 된 것이다. 야자의 도시, 순다 끌라빠, 후 완벽한 승리의 도시, 자야카르타의 옛 영광을 전시해 놓은 공간이 1층이다.2층에는 바타비아 시절 사용하던 각종 가재도구를 그대로 전시해 놓아 당시의 분위기와, 네덜란드 정복자들의 야망을 생생히 느껴볼 수 있다. 정복자의 자기 땅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는 바타비아 문양, 인도 양식, 중국 양식을 혼합한 가리개도 전시되어 있다. 정복자의 야망을 드러내는, 네덜란드 여왕을 전쟁의 여신으로 묘사한 가리개(병풍)도 있다. 2층 발코니, 옛날 총독이 시민들을 향해 연설을 하거나 지시를 내릴 때 서 있었던 창가 밖으로 내다보면 카페 2층처럼 파타힐라 광장이 한 눈에 보이며, 총독의 야욕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야심의 상징물과 함께, 이 정복자들이 바타비아에서 저지른 악행들 또한 설명으로 나열되어 있다.

박물관 뒤뜰. 정치범을 수감하던 우물 감옥이 있다. 감옥 안에 죄수를 집어넣고 거머리를 집어넣는 식으로 고문을 했는데, 그러다 죄수가 죽으면 자바 해로 시체를 흘려보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죄수가 없을 때에는 군사 이동 통로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뒤뜰 계단 밑에 있는 자그마한 방들은 남자 감옥으로, 안에는 쇠구슬과 족쇄로 보이는 쇳덩이가 이 여러 개 방치되어 있다. 허리 펴고 서 있기도 힘든 이 방의 죄수들은 사각형 한 칸에 한 명씩 50kg 쇠구슬을 발에 차고 25kg 팔 족쇄를 차고 수감생활을 했다고 한다. 한쪽 구석에 비치된 여자 감옥은 더욱 비참하다. 허리를 펴기는 커녕, 햇볕도 안 들어오고 우기 때는 물이 찼다고 한다. 지배층의 야망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윗방과 피지배층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랫방이 너무 대조를 이뤘다.

뒤뜰에는 상업의 신으로 여겨지던 헤르메스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1740년 10000명이 죽었던 중국인 대량 학살도 이 곳에서 일어났다. 인도네시아 인들을 위해서 선한 일을 했던 에르베르펠트의 묘비도 이 곳에 있다. 정리하자면 이 곳은 지배자들의 눈부신 야망과 그들이 지탄받고 반성해야 할 어두운 역사를 한 곳에 집합해놓은 건물이라 할 수 있겠다.카페 바타비아에서 오른쪽에는 와양 박물관이 있다. 이 건물은 1640년 네덜란드 군과 유럽 시민들을 위해 설립된 Old Dutch Church. 한마디로 구 교회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1808년 지진으로 인해 무너지고, 1912년 네오 문예 부흥기 양식으로 재건축되어 창고, 사무실, 과학 문화 협회, 과학 예술 연구원으로 사용되었다. 드디어 1936년 문화유산으로 채택되고 다양한 역사를 거쳐 1975년에 이르러 와양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와양은 인형을 뜻하는데, 자바에서는 와양 그림자극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박물관에는 인도네시아 각 지역, 각국에서 온 3000개 이상의 와양과 2000여점의 가면, 와양극에 사용되던 가믈란, 역사적 문헌, 지도, 옛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전통으로서,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까지에는 가믈란과 스크린과 조명과 함께 와양극이 공연된다. 정교하고 빠른 손동작에 의해 움직이는 와양들은 미동도 없는 듯 손만을 움직이다가 갑자기 빨라지는 음악에 맞춰 급격한 움직임으로 커다란 동작을 취하는 등 다이나믹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잠잠하고 조용하면서도 굳건한 정신을 내면에 숨겨놓는 인도네시아의 정신은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박물관 탐방을 마친 후 낮 12시에 카페 바타비아 2층으로 돌아와 다시 광장을 바라봤다. 여전히 사람들은 북적거리고 해는 내리쬔다. 건물들을 둘러보기 전에는 그저 평화롭고 활기차 게 느껴지던 파타힐라 광장에, 잠재된 순다 끌라빠의 풍요와 자야카르타의 영광, 그리고 바타비아의 야욕과 뼈저린 고통이 있다. 지금 보이는 자카르타의 희망과 평화 안에 숨겨진 지독한 상처가, 우리나라의 뼈저린 역사에서도 같이 느낄 수 있던 민족의 숨겨진 상처와 불굴의 의지가 은은하게 드러난다.

꼬따 뚜아 탐방은 매월 첫째 주 토요일 진행된다고 한다. 다시 탐방에 참여하고 싶다.
의미 있는 기회를 준 한*인니문화연구원- 감사합니다.

한국문화원201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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