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삶과 하나다
-해골마을 또라자
최우호 (UI BIPA)
고상한 취미가 하나 생겼다. 커피는 아메리카노만 고집하던 내가 커피를 내려 먹기 시작했다. 술라웨시 또라자를 여행했을 때 커피를 내려 마셔보고 그 구수하고 잔잔한 향에 매료되어 버렸다. 또라자 커피를 마시면서 짧지만 인상 깊었던 토라자 여행을 회상하며 그리운 한국을 잠시 잊어 보곤 한다.
한국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가게를 정리했다. 그리고 미뤄둔 학업과 새로움을 찾아 이모가 계시는 인도네시아에 오게 되었다. 7시간의 비행에 지쳐 공항에 내린 시간은 오후 9시. 공항 밖으로 나오니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와 멀미 때문인지 속을 뒤집는 듯 한 비릿한 냄새가 나를 반겨줬다. 사실 나는 인도네시아를 이슬람 국가, 잘 못 사는 나라, 우리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사는 나라 정도로 밖에 알지 못했다. 오른손으로 수저 없이 밥을 먹고 왼손을 휴지 없이 화장실에서 사용하며, 종교 때문에 그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미개한 풍습이 남아있는 후진국.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기분 탓에 좋지 않은 냄새가 났던 것 같다. 이모 댁으로 이동하는 길에 차가 너무 많이 막혀서 고속도로에 서버렸다. 속이 좋지 않던 나는 빨리 도착하길 기도하며 창밖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슝슝”하더니 오토바이가 역주행해서 우리 차를 지나갔다. 분명 고속도로인데 오토바이가 역주행해서 지나다닌다. 그리고 맨발로 차 사이를 누비며 물과 간식을 파는 사람들이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에 넋 놓고 있는데, 한술 더 떠 우리 차 기사 님이 시동을 끄더니 의자를 뒤로 젖히고 편안하게 휴식을 시작하셨다. 느긋한 건지 포기한 건지… 30분쯤 흘렀을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차 안에서 난 이곳에 도착한지 1시간 만에 한국을 떠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첫날부터 우리와는 너무 다른 이곳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충격 받았고 단 며칠 만에 귀국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시도 때도 없이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큰 기도 소리에 잠 못 이루고, 좁은 길에서 수많은 차와 오토바이들이 섞여 중앙선을 넘나드는 모습에 콧잔등에 땀이 맺혔다. 내가 힘들어 하는 모습에 이모가 문화탐방을 통해서 인도네시아 문화를 배워보라는 제안을 하셨다.
그렇게 가게 된 반둥 문화탐방은 너무 즐거웠고, 빙산의 일각을 보고 빙산의 크기를 단정 지은 좁고 편협한 내 시야를 질책하고 다듬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여행은 내 젊음을 인도네시아에 걸어 볼 자신감까지 생기게 해주었다. 그리고 2달 후 나는 이름도 생소한 술라웨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술라웨시는 자카르타 동북부에 위치해 있는 섬으로, 비행기로 2시간이 더 걸린다. 우리의 목적지는 술라웨시 남부 마카사르 공항에서 차로 8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커피로 유명한 토라자였다. 공항에서 차로 1시간 정도 이동했을까? 내가 너무나 그리워하는 제주도의 그것과 닮은 풍경이 내 감성을 자극했다. 창 밖으로 눈부시게 내려 쬐는 햇볕과 맑고 아름다운 색채로 푸르름을 자랑하듯 뽐내고 있는 암벽산은 제주도의 삼방산과 너무 닮아 있었다. 자동차 매연 가득한 자카르타를 벗어나 살 것 같은 이 기분. 한참 카메라에 열심히 그 모습을 담고 있는데 한국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메시지가 왔다. “엄마 생일인데 연락 안 하냐”. 분명 며칠 전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머니 생신도 잊어버리고 혼자 이렇게 멋진 곳을 여행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토라자 탐방기를 훌륭하게 써서 글 읽기를 좋아하시는 어머니께 생신 선물로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죄책감을 달래본다.
또라자는 사실 커피보다 장례문화가 더 유명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는 이곳은 타지 인들에게도 미개함이 아닌 오랜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로 자리 잡았다. 또라자는 “산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1500년 전에 형성된 마을이다. 산속인데 신기하게 사방이 논밭이었는데 이곳의 주된 수입원이 농업이라고 한다. 그리고 종종 보이는 크고 작은 십자가. 이곳은 특이하게 기독교와 토속신앙이 결합한 지역이다. 지금은 쓰지 않은 작은 교회 건물을 지나 멀리 보이는 바위산이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할 찰나, 자세히 보니 바위산 곳곳에 문이 있다. 이 암벽은 가족묘인 Lemo라고 한다. Lemo는 귀족이나 존경 받는 인물의 묘라고 하는데 Tau Tau라는 고인의 특징을 살려 만든 나무인형도 보인다. 묘라고 생각하고 보니 무섭기도 하고 닭살이 돋는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동굴에 들어갔는데 앞서 들어간 여성분들이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나오신다. 궁금해서 서둘러 동굴 안으로 들어갔는데, 동굴 전체에 해골들이 가득했다. 왠지 음산한 한기가 스멀스멀 밀려온다. 카메라에 담기 망설여지는 광경이었으나, 가장 보존이 잘 돼있는 해골과 사진을 찍어서 누나에게 보냈는데 돌아온 답장이 재미있다.
“박물관이냐?” 그렇다. 또라자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수백 년을 이어온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지금도 그 문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담고 있는 박물관. 고인과 그 가족들에게 느끼는 죄책감은 잠시 뒤로하고 열심히 보고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동굴에서 나와 돌아다니는 곳곳마다 해골이 없는 곳이 없다. 여기도 해골 저기도 해골. 해골 마을이다. 조금만 돌 위에조차 해골들이 자리하고 있다. 조상의 유골을 도난 당하거나 손실될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문화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하루 종일 해골과 함께하다 보니 해골이 놓이지 않은 바위를 보면 “왜 여긴 해골이 없지? 명당이 아닌가”하는 농담도 해본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마을에 해골들과 시체가 들어 있는 관들이 많은데 기분 나쁜 냄새가 나지 않는다.
길거리에는 전통가옥인 똥꼬난이 보인다. 이 집들은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고 신기하게 생겼다. 지붕의 양 끝이 물소의 뿔처럼 하늘을 향해 높이 올라가 있고 외부 벽은 화려한 문양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리고 지붕 끝에 잘 보이는 곳에 리본 모양 같은 것이 걸려있는데 그것이 걸려있는 집은 물소를 키우는 집이라는, 즉 부자라는 표시라고 한다. 드디어 장례식이 진행 중인 한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또라자의 장례식에는 많은 소와 돼지가 사용된다. 이들은 일생을 장례식을 위해서 돈을 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대하게 치른다. 한 마리에 한국 돈 300만 원에서 천만 원을 호가하는 성스러운 소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소가 밭을 갈게 하거나 고기로 취하지만 이 사람들은 죽으면 소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고 있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장례식 때 소 20마리 정도와 돼지들을 잡는다고 한다. 그 비싼 소 20마리를 잡는다고 하니 현지 물가를 고려해보면 평생 장례식을 위해 돈을 번다는 말이 맞는 말 같다.
장례식장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마당에서는 돼지를 잡아 손질하고 있고 마당 옆에 마련된 마루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다과를 즐기며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돼지를 잡는 모습은 흡사 만화책에서 봤던 원시인들을 연상케 했다. 대나무 들 것에 거꾸로 매달린 돼지를 두 사람이 어깨에 짊어지고 옮겨와 마당에 넓은 나뭇잎을 깔고 손질을 시작한다. 돼지 도축을 구경하다가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한자리를 할애 받아 앉았는데 다과상을 차려 준다. 자신들의 행사에 참여한 외국인이 크게 낯설지 않은 모양이다. 대접받은 다과 상에 못 보던 과자와 담배 그리고 풀잎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으론 담배를 피우는 게 예의라고 한다. 그리고 풀잎은 치아를 노랗게 하기 위해서 사용한다고 했다. 토속신앙에 치아가 노란색이어야 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 풀잎으로 치아를 노랗게 만든다고 한다. 난 치아가 하얗게 하려고 비싼 돈 들여 스케일링까지 하는데, 이 잎을 씹었다가 치아가 바로 노랗게 되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다른 분들의 눈치를 보다 결국 풀잎을 씹었다.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동네사람들 보라고 일부러 잘근잘근 씹어서 치아에 비볐다. 누린내가 심하게 나고 상당히 썼다. 인상을 찌푸리고 오물거리는 모습에 동네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크게 웃는다. 동네 사람들이 수줍게 웃으며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핸드폰을 내민다. 지극히 평범한 외모로 한국에서는 주목 받지 못하던 내가 아니었던가.
여기서는 내가 좀 통하는 외모인가 보다. 연예인이라도 된 양 들떠서 사인까지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나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이 나라에서 오래 살겠다고 다짐해본다.^^ 즐거운 분위기를 뒤로하고 전통 가옥(똥꼬난) 안에 안치되어 계신 고인을 뵈러 갔다. 전통가옥의 구조는 단순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2개의 방이 있고 안쪽 방에 고인을 모셨다. 고인을 지키고 있던 소녀가 나를 보고 방긋 웃으며 악수를 청한다. 한국에서 상갓집을 갈 땐 유족들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게 참 힘든데 이곳은 너무 달랐다. 악수를 하고 고인에게 간단한 목례를 하고 나니 소녀가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서 사진까지 찍어주고 나왔다. 이렇게 마음 편한 장례식장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그렇게 장례식을 관람하고 나서 돌아가는 길에 보니 동네사람들 손엔 묵직한 돼지고기가 들려 있었다. 장례식에 잡은 돼지고기들을 동네사람들 각 가정의 식구 수만큼 분배를 해준다고 한다. 염치없이 좀 얻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체통을 지켜야지…
축제인지 장례인지 확실하지 않은 또라자의 독특한 장례문화와 사상은 또라자 문화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또라자에는 아직도 계층 사회가 뚜렷하다. 그래서 장례식을 통해 부자는 더 많은 가축을 사용함으로 부를 나타내고 무덤을 만드는 방법도 계층 간에 차이가 있다. 장례식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영혼이 옮겨 가는 의식이다. 사람이 죽었더라도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는 죽음을 병으로 보고 집에서 함께 생활한다. 돈이 없으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장례를 치르지 않고 고인과 함께 생활한다. 저승에서 삶이 풍족하기 위해 아버지 시대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평생 장례식에 쓰일 돈을 모으고, 마을 사람들 간에 돈을 모아 돌아가며 장례를 치르는 등 채무관계가 형성되기도 하고 지역경제에 영향력을 끼치기도 한다. 혹자는 현대문명을 받아들이고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게 옳지 않겠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세상에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 많은가.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재미있는 그런 인생을 살기 위해 돈을 벌고 또 치열하게 삶과 싸우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가치 있는 삶이란 과연 뭘까? 또라자 사람들에게 있어 가치 있는 삶이란 자신들 아버지의 문화를 지키고 보전해서 후세에도 전해지는 일이 아닐까. 우리 외지인들은 그것을 존중해주고 이 사람들이 그 문화를 지켜 갈 수 있도록 차별하지 않으면 그걸로 되는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밤하늘을 보니 자카르타에선 몇 개보이지 않던 별들이 수 없이 많이 보였다. 인도네시아에는 저 하늘의 별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은 각자 다른 지역에서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고 살아간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우리가 한 뚝배기의 된장찌개를 같이 먹는 것을 더럽다고 욕한다면 우리는 상당히 기분이 나쁠 것이다. 우리도 그것을 생각하며 우리와 다른 이 사람들을 욕하거나 미개하게 생각하지 말고 존중해주고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다양함 속의 통일! 이슬람 국가의 폐쇄적인 이미지와 달리 외국인에게도 항상 먼저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사람들. 다양함을 받아들이는 오픈 마인드를 갖은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곳 인도네시아 사람들이다.
또라자에 문화탐방을 다녀온 후 지인들에게 향이 좋은 또라자커피 한잔 대접하며 또라자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글에 담지 못한 삶과 죽음이 하나인 해골마을 또라자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
* 수상소감: 아직 인도네시아를 잘 모르는 제가 이렇게 뜻 깊은 상을 수상하게 되어 행복하고 감개무량합니다. 뜻밖의 입상으로 늦게나마 어머니 생신 선물로 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비전을 제시해주는 고마운 나라입니다. 이 나라와 이 곳 사람들에 대해 배우고 이해해서 소통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우리의 능력보다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이해해주고 나에 대해 관심 가져주는 사람에게 끌리는 법입니다. 우리 재인니한인들 모두 바쁘고 힘든 일상을 보내지만 아주 조금의 관심으로 더 즐겁고 행복한 인니생활을 이어갔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인사회를 위해 노고가 많으신 한인회와 한*인니문화연구원 식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문화연구원에서 문화 활동을 하면서 건전한 젊은 시절을 보내라고, 문화탐방 프로그램 참가해 인도네시아 배우라고 비용까지 주시면서 등 떠밀던 이모님. 인도네시아를 사랑하게 만들어주신 우리 이모.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