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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난 수라바야에 늘어선 골동품 상점들
ⓒ 손인식

자카르타의 ‘수라바야 길(JL, Surabaya)’은 인도네시아의 인사동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곳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이건 한국 사람이건 한번쯤 인사동에 가보고 싶어하는 것과 같다.

나는 자카르타를 방문하는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수라바야 길을 안내할 만한 곳이라 생각한다. 현재의 인사동이 반드시 손님을 안내해야할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운 것과는 대조적이라 하겠다.

인도네시아 어로 ‘잘난 수라바야’, 이 특별한 거리는 30년여 년 전이나 현재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 한다. 자카르에서 30여 년을 살아온 한 교민의 말이다. 인사동보다 훨씬 더 특징이 있는 곳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지 않는가.

잘난 수라바야의 존재를 매우 신기해하던 벗은 인도네시아 역사와 인정이 낳은 다양한 문화 산물들을 눈 안으로 끌어들일 듯 세세히 살폈다. 더러는 세월의 때가 절어 끌끌한 느낌을 풍기는데도 만지고 주무르며 교감을 나눴다. 헤집어대는 본새가 물 만난 고기 같았다. 건축인 답다고 할까 다양한 취향과 안목을 실감나게 드러냈다.

출발할 때 벗은 스케줄을 물었었고 나는 목적지를 얼버무렸었다. 꼭 보여주려는 내 마음과 달리 그가 혹시 그런 곳을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해서였다. 그러나 잘난 수라바야와 벗은 단숨에 가까워졌다. 타국의 골동품과 수더분한 한국인이 서로 낯익어 보였다. 안내자인 내가 오히려 낯선 객으로 섰었다.

▲ 어지럽게 걸린 인도네시아 토속 공예품들
ⓒ 손인식

수라바야 길에는 세 가지쯤의 얼굴이 있다. 첫째가 산더미처럼 쌓인 인도네시아 토산 목공예 품들이다. 인도네시아 전국 구석구석에서 수집해온 것들이다. 이들 중에는 세월을 두텁게 머금은 골동품도 있고 제법 예스러움을 위장한 이미테이션도 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5위의 넓은 영토를 자랑한다. 300여 부족들은 도심과 산, 들판, 밀림에서 나름대로 자연과 조화하며 평화를 구가하며 산다. 그들이 분출한 각종 문화 산물들은 참 폭이 넓다. 그들의 생활도구나 공예품들을 들여다보노라면 정감이 흐른다.

각 부족들이 밀림에서 쓰는 주술, 제례 용품 등에서는 진솔한 풍속과 그들만의 해학이 진득하게 묻어난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시행하는 흑단목 보호 정책으로 인해 흑단을 활용한 대형 작품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지만 멋진 문양과 색조의 흑단 목에 정교하게 조각된 공예품들이 아직도 많다.

▲ 인니 골동품
ⓒ 손인식

자연미 물씬한 괴목에 토속미 짙은 목공예품도 많은데, 이들 중에는 더러 일상의 솜씨를 넘어서 창의성이 돋보이는 것들도 있다. 틈을 내어 돌아보는 이들의 발길을 알지게 한다.

그런가 하면 살기를 느끼게 하는 크고 작은칼과 창, 독침, 활 등 각종 재래 무기도 많다. 칼날과 창, 활촉의 미늘(낚시나 칼, 창에 달려 물체에 박히면 빠지지 않게 하는 거스러미)에서 정글살이와 부족간의 생존 경쟁의 틈을 읽을 수 있다.

둘째 중국문화다. 흔히 인도네시아 중국문화는 많은 숫자의 화교들로 인해 생성되고 변천해왔을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육지에 실크로드가 있듯 해상의 뱃길 향유로가 있었고, 바로 인도네시아가 해상로의 발원지이기도 하고 경유지였다는 것을 알면 이해가 빠르다.

뱃길 무역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인도네시아에 유입시켰다. 그리고 향유를 포함한 풍부한 자원들은 잦은 침략을 불러왔고 강제 지배를 당하게 했다. 지금도 멀리는 유럽과 일본, 가까이 호주 등 세계열강들이 틈만 나면 인도네시아에 호감을 표시한다. 바로 자원 때문이다. 풍부한 자원과 천혜의 조건은 이들을 게으르게 했다.

▲ 인니 공예품
ⓒ 손인식

예나 지금이나 개발과 생산은 대부분 다른 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현재도 일상에 쓰이는 공산품마저 대부분 중국에서 들어오고 있다. 여전히 경제가 지배당하고 있다. 정치, 경제, 창의력 모든 것에 있어서 지배당하는 전통은 이어져서 좋을 것이 없건만.

최근 들어 침몰된 무역선들을 찾아오는 보물선 탐사꾼들이 더욱 많아졌다고 한다. 지금도 더러 어부들의 그물 망에 골동품 한 두 점이 걸려 올라온다고 하니 괜스레 듣는 이의 마음이 설렌다. 정기적으로 잘난 수라바야를 찾는 이들의 속셈을 알 것 같다.

잘난 수라바야에서 눈에 띄는 중국문화는 금빛 또는 청동 빛으로 빚은 다양한 철공예품들과 도자기류 들이다. 기품을 뽐내는 동(銅)공예품들과 청화문양 웅숭 깊게 피어난 도자기류들이 그야말로 산더미다.

돌아들다 보니 내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것이 있다. 백수백복(百壽百福)의 글자가 전서로 새겨진 도자기 항아리다. 전각석과 연적도 있다. 전각이나 연적을 사용하는 문화 발생지와는 멀고먼 열대나라, 문화가 판이하게 다른 이국의 묵은 길가 허름한 점방 진열대에서 찾아오는 이들을 살피는 전각석과 연적, 과연 누가 저들의 새 주인이 될 것인가 생각이 많아진다.

손님의 눈길이 머무르는 것을 감지만 하면 그 물건을 집어들고 팔겠다고 달려드는 인도네시아 점원들은 도대체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 알기나 할지.

▲ 중국 도자기 유의 일군
ⓒ 손인식

셋째 유럽과 일본의 지배문화다. 섧게 보면 어찌 수탈이 남긴 찌꺼기가 아니랴. 유럽과 일본문화의 잔재들이 여실하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시대를 넘어서서 현재까지도 그 이름을 자랑하는 명품들도 있다.

독일과 일본의 카메라, 미국과 일본의 악기, 어느 장인(匠人)의 작품이었을 장검들도 새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네덜란드, 포르투갈, 일본 어느 병사였을까. 그들의 손때가 묻은 단검이 있다. 어느 거만한 지배자의 거실에서 조명을 받으며 8색으로 반짝였을 크리스털 공예품도 있다.

이것저것 눈 여기던 벗이 장검 하나를 집어들었다. 견장, 흉장 화려한 어느 정복자의 옆구리에 걸려 위엄을 부렸을 장검. 검집이 화려하고 손잡이 장식이 기묘하다. 손잡이에 감긴 헐은 가죽위로 손때가 번들거린다. 벗이 칼을 뽑았다. 검 날이 섬뜩하게 살아 나왔다. 살벌했다. 한줄 고랑이 칼등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칼끝으로 나있다. 저 고랑으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을까. 푸르게 드러나는 칼날에 남방의 햇살이 베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잘난 수라바야는 자카르타 구시가지에 자리 잡고 있다. 자연 주변에 역사적 상징물들이 많다. 인사동 주변 마을에 한옥들이 많듯이 고전풍의 우아한 구옥들이 많다. 인사동과 닮은 점이다
.
▲ 유럽호사가들의 취향이 물씬 드러나는 크리스털 제품들
ⓒ 손인식

“시간이 살아있지?”
내 물음에 벗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헐값에 산 연적을 만지작거리는 나만 건너다보았다.

차에 오른 벗이 물었다.
“여기를 자주 오나보지?”
“느끼잖아.”
“뭘?”
“생이 덧없는 것이 아니라든가 찰나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등 뭐 그따위들…. 진리는 새것보다 오래된 것에 있는 것 같잖아?”

벗은 나의 되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월간 서예문인화에도 송고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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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2015년 5월 인사동에서 산을 주재로 개인전을 열고 17번째 책 <山情無限> 발간. 2016,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현재 자카르타 남쪽 보고르 산마을에 작은 서원을 일구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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