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 '용서의 힘'과 사회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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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lik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0.♡.107.45) 작성일13-12-12 22:27 조회3,676회 댓글0건본문
간디처럼 평생 동안 평화와 화해를 위해 힘썼던 이 시대의 거물인 만델라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은 과연 무엇인가. 역사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은 대개 시대와 장소를 넘어 우리의 가슴 속에 무엇인가를 남기기 때문에 위대하다. 그의 유산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유독 한 문장이 머리를 맴돈다. "증오를 느끼는 사람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만델라가 1990년 2월 감옥에서 풀려나면서 한 말이다. 그가 삶의 좌우명처럼 생각한 이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어떻게 인생의 대부분을 부당하게 감옥에 감금되었으면서도 증오와 복수의 감정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보통 사람으로서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조그만 일에도 화를 내고 분노를 느낀다. 식당에 들어가 주문한 음식이 빨리 나오지 않아도 화가 나고, 나온 국에 건더기보다는 기름만 둥둥 뜬다고 분노한다. 김수영 시인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저 왕궁 대신에 왕국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탕에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는" 사람을 많이 닮았다.
하물며, 손발이 묶이고 자유를 박탈당했다면 어떻겠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도 더 분노를 느꼈을 것 같다. 감옥의 창살 사이로 밝은 햇살이 비치면 자유와 생명을 느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분개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불의와 폭압의 정권에 맞서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나가 권력을 잡으면 나를 괴롭힌 것만큼, 아니 몇 백 배로 되갚아 주겠다는 복수심을 키우지 않았을까.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행위의 수순이다.
그러나 만델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증오 대신 화해를 선택했고, 복수 대신 용서를 실천했다. 그의 정책이 남아공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흑과 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남아공은 과거를 용서하고, 미래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용서를 할 때에만 비로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만델라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지적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만델라가 타계한 이 시점에서 한 번 그 반대를 상상해본다. 용서의 정반대는 보복이다. 보복은 항상 폭력에 대항하는 반동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식으로 해를 입은 만큼 앙갚음한다. 문제는 한 번의 보복 행위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복은 항상 다른 보복으로 이어져,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연쇄반응 속에선 누가 옳은지 누가 잘못하였는지가 불분명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보복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결코 끝나지 않는 잔인한 연쇄 운동 속에 가둔다.
우리도 지금 이런 정치적 보복의 연쇄반응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정권이 바뀌면 누가 누구를 칠지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측한다. 권력을 잡은 자는 전 정권의 흔적을 지우려고 애쓰지만, 권력을 잃게 되면 복수의 칼을 갈았던 사람들에게 똑같은 꼴을 당한다. 우리가 평화롭게 공존하고자 한다면, 분노의 감정이 가슴속에 쌓여 원한과 복수의 응어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델라도 "모욕을 당한 자만큼 위험한 사람도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진정한 사회통합을 원한다면 분노의 응어리를 풀어 보복의 연쇄작용을 끊어낼 수 있는 용서의 미덕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미덕만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시작할 수 있게 한다. 아, 사회통합을 말로만 외치는 대한민국에 넬슨 만델라의 실천은 정녕 요원한 것인가.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