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 MOI에서 벌어진 FBR 폭동 (2015.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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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5.♡.203.138) 작성일15-05-31 00:07 조회11,643회 댓글12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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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야님의 댓글
토끼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1.♡.117.114 작성일너무 무섭네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도르네시아님의 댓글
인도르네시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36.♡.71.81 작성일아 재밋다 수호지 읽는거 같네요
Maslee님의 댓글
Masle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2.♡.65.166 작성일
모이에 살고있습니다. 엊그제 사건당시 경비원 단 4명만이 저지했고, 몰매 맞았다고 하네요. 현지인 말로는 경비가 처음에 저지하느라 밀친정도였다는데 신고하고 보복까지.. 건수잡으려는게 보입니다.
이후에 단지내에 군인 한두명씩 오토바이로 순찰도는게 보이지만 일벌어지면 안봐도 뻔하겠죠.
현지인한테 경찰신고 전번 물어보면 바로 대답할수있는 사람이 드뭅니다. 이런일 벌어져도 경찰한테 기대가 안가는 상황이 답답합니다.
멍냥이님의 댓글
멍냥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4.♡.165.163 작성일이런 멍멍이 같은 일이...갑자기 '나홀로 집에'가 왜 생각이 나는거냐...
하나킴님의 댓글
하나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39.♡.203.21 작성일우리나라도 문제지만 인도네시아도 공권력 참 한심하네요...
JavaSong님의 댓글
JavaSong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27.♡.14.179 작성일업무관계로 만나 점심 같이 먹었던 화교가 당시에 자기네 집도 98년 폭동에 불타 없어졌다고 하더군요. 따로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데, 극복해낸 그사람이 대단하기도 하고, 폭동이 그렇게 까지 번지는데 공권력이 통제를 못(안?)했다는게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바람2님의 댓글
바람2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4.♡.13.100 작성일
아파트 단지가 안전하지 못하다면 문제가 아주 심각하네요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것을 보면 이 곳, 인도네시아가 정말 싫어 집니다...
운제님의 댓글
운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1.♡.68.207 작성일어제 집에 가는길에 모이앞을 지나치면서 보니 파킹부스 여러대가 파손되어 보수하고 있더라고요. 당일 아이가 유치원 버스 타고 오면서 사람들이 칼들고 싸우는거 봤다는데, 유치원버스는 무슨 생각으로 그곳을 지나왔는지 안전하게 어디로 대피하든가 아이가 그광경을 다보게 했는지... 뭐 FBR 저희 가게 자카르타 남부에 있는데 매달 와서 돈받아가요, 경찰도 매달 받아가고. 여하튼 저런 사람들이랑은 절대 문제 생기지 마세요. 예전에 앰버서더 몰에 친구랑 갔다가 암본 깡패가 가게 여자종업원한테 치근덕거리다가 잘 안되니까 가게를 때려부수더니 명령조로 가게 문을 닫게 만들더라고요. 그자리에서 가게 사람들 가게문닫더라고요. 여기 경비원들도 뭐 무섭겠죠.. 이주전인가 꾸닝안 플라자 페스티벌에서 암본깡패들이 모여서 운동회를 하는데 주차장을 온통 자기마음데로 주차를 해놓아서 차 빼기가 힘들었는데 경비원들이 아무도 제지를 못하더라고요. 저도 여기에서 17년 넘게 살게 될까요 아~~.. 이제 4년 살았는데.. 혹시 98년도 폭동당시 이야기도 들려주실수 있으면 부탁드릴게요.. 와이프는 몸서리를 치고, 당시 사건으로 호주로 이민간 친구들 얘기들어보면 아주 인도네시아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를 하고 과연 당시에는 상황이 어떻고 언론들은 어떻게 사건을 다루었는지.. .... 친구중 한명은 메단에 살았는데 폭동당시 평소에 친하게 지내면서 도와주었던 이웃들이 폭도로 변해서 친구가족들은 다락에 숨어서 보니 이웃사람들이 집안에 들어와서 물건들을 다훔쳐 갔다가고 하면서... 저보고 어떻게 인도네시아에서 살생각을 했냐고 되묻더라고요. 돼지농장을 하던 친구네는 폭동다시 폭도들이 침입해 돼지를 죽이지 않고 먹지도 않는 돼지를 다훔쳐가서 인도네시아를 등지고 멜번으로 이사를 갔다는둥. 직접 겪어 보지 않아서 상상이 안가네요. 실제 그런일들이 있을수 있었는지...
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5.♡.203.138 작성일
1998년 자카르타 폭동 당시의 사건들은 구글링 해보시면 기사나 사진들 많이 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약탈이 한창 진행중이던 라마야나백화점에 누군가 방화를 해 그 한 건물에서 약탈하던 시민들 1,200여명이 한꺼번에 불타 몰살했던 사건 매우 충격적이었어요. 인터넷 뒤져보면 그 당시 위기를 간신히 헤쳐나온 교민들의 얘기들도 몇군데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겁니다.
폭동 당시는 아니고 반년쯤 흐른 후의 상황을 오래 전에 기록했던 것을 2008년 쯤에 다시 옮겨 적었던 파일이 있어 여기 올립니다. 대충 그 당시 분위기가 이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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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5월 수하르토 전대통령을 하야시킨 인도네시아 군중의 힘은 수많은 도시빈민들의 가세로 인해 순식간에 유례없던 자카르타의 폭동사태로 비회되었고 자카르타 곳곳의 상업지역마저 초토화시키면서 화교중심의 인도네시아 중,상류 사회를 공포 속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 충격이 채 가시지 않고 있던 그 해 11월의 일입니다.
그 해 줄곧 계속되고 있던 데모가 언제 다시 폭동으로 비화될까 전전긍긍하던 11월 어느날, 자카르타 시내 한복판 스망기 거리에서 시내고속도로를 점거하고 국회의사당을 향하던 데모대에게 주변건물 옥상등으로부터 인도네시아 경찰들이 발포를 시작했고 그 사건으로 몇 명인가 총격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자카르타는 다시 공포에 휩싸였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도심에서 벌어지던 대정부 항의 시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5월 폭동 당시 시민들의 대규모 단체행동은 정부도 어쩌지 못한다는 체험학습을 한 도시 빈민들이 상업지역인 스넨(Senen)에서 약탈과 방화를 시작한 것이 다음날 오전부터였습니다.
그 주에 먹을 음식거리를 사기 위해 끌라빠가딩에 막 도착했을 때에는 폭도들이 다가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파다했고 아직 오후 두시인데도 상점들이 속속 철시하고 있었죠. 그 와중에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거의 마하에 근접하는 속도로 차를 몰아 문닫기 직전에 들어간 고로(Goro)할인점에서 야채들을 챙기고 있던 나는 곧 문을 닫는다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주말에 풀만 뜯을 수는 없다는 신념으로 묶어놓은 두판짜리 계란까지 집어드는 데 성공합니다.
우리동네인 따만 모데른(Taman Modern)에 돌아와 보니 많은 주민들이 모두 길에 나와 삼삼오오 이야기하며 모여있는 모습이 어수선했어요. 집에 차를 파킹하는데 통장격인 에르웨(RW)가 문앞에 서서 빠꼼히 차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습니다. 빈센트라는 이름의, 그러나 유럽 화가를 연상케 하는 그 이름과는 아무 상관없는 여드름 가득한 큰바위얼굴의 그는 그 무렵 매일 밤 줄기차게 내 귀가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리는 내게 덤벼들며 수첩이며 서류를 내밀곤 했습니다.
"경비원들 보너스 주게 기부금 내세요."
"요 앞에 철조망치고 철문세우는데 바기바기(Bagi-bagi)로 좀 내셔야죠."
5월 이후 열번도 넘게 작지도 않은 돈을 매번 그런 식으로 걷어가더니 어느새 주택단지 진입로에 경비소가 새로 생기고 단지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5월 폭동 당시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거금을 거두어 갔는데 그 결과 어느 날 아침 우리 주택단지 앞에 장갑차 한대가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며 진입로 쪽으로 총구를 겨눈 채 버티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건 주택단지 앞쪽 큰 길가 신축건물에 막 개점했던 백화점을 비롯해 200미터에 이르는 진입로의 상점들이 모조리 방화로 불타 버리고 진입로 정면에 있던 호화주택 세 채에 폭도들이 트럭까지 대놓고 약탈을 자행한 다음 날이었죠.
요번에도 돈내면 되려니 하고 지갑을 꺼내려는데 오늘따라 빈센트의 표정이 절박해 보입니다. 오늘부터는 누구든 꼭 불침번을 서야 된다네요. 아닌 밤중에... 지켜야 될 조국 놔두고 인도네시아에서 불침번을 서야 되다니... 게다가 군대 제대한 지가 언젠데...
주택단지 중앙공터에 최근 세운 통장(RT)들 회의장이 통제소 역할을 하고 있었죠. 회의장이라고 해야 기둥 세우고 지붕만 얹어 놓은 것이었는데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화교들이었습니다. 자카르타 남부에 비해 허름하고 싼 집들이 대부분인 우리 동네 화교들은 수하르토 일족들의 배후에 있었다는 내로라하는 화교들에 비하면 부자 축에 끼기 힘든 사람들이었지만 따만 모데른은 빈민들이 살고 있는 자카르타 북부, 공단 인근의 이 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한 현대식 주택단지였으므로 마치 빈곤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파라다이스인 셈이었습니다. 그 해 5월 진입로의 상업지역이 몽땅 불타버린 지금, 폭동이 이곳까지 번진다면 이 주택단지가 또 다시 타겟이 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대단한 무장을 하고 있었어요. 일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끄리스(Keris) 같은 인도네시아 전통단검을 차고 온 반면 반면 화교들은 장비의 장팔사모를 위시해서 쌍절곤, 중국검 등을 들고 나와 마치 우슈나 태극권 시합장에 나온 기분이었고 쇠못을 박은 야구방망이며 일본도를 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한국사람은 나 혼자 뿐.... 이 단지에 꽤 많이 살고 있는 다른 한국사람들은 본국으로부터 직수입한 배짱과 반골기질을 토대로 한 오기에 가까운 신념을 발휘하며 아예 회의장에 얼굴도 내밀지 않았지만 회의장에서 10미터도 안되는 집에 살고 있던 죄로, 그리고 빈센트가 줄곧 내 집앞을 기웃거리는 정성 덕택에 어쩔수 없이 회의장에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그런데 공터 건너편 사는 통장이 씩씩거리며 회의장에 다가 오면서 궁시렁거립니다.
"우리 골목에 한국놈들 둘 살잖아. 한놈은 벌써 몇 주 째 안보이고 그 옆 집은 집안에 뻔히 있는걸 아는데 문 두드려도 나오질 않아. 하, 참, 그 놈들."
"그래요? 우리 골목에도 한국놈들 꽤 있는데 도무지 협조가 안되요, 협조가."
화교 둘이 워낙 큰소리로 얘기하는 바람에 못들은 척 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에 앉은 내가 몹시 불편한데 내 건너편에 앉아있던 빈센트도 편안한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빈센트가 내 눈치를 보면서 그들에게 다가가 저희들끼리 잠시 뭔가 속삭이자 갑자기 화제가 바뀝니다. 하하하, 그 장검 보기 좋네요, 날이 새파랗게 선 게 혹시 전설속에 그 참룡검...? 미스터르 배는 뭘 갖고 나오셨수?
뭐, 화교들이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그런 얘기한다고 뭐라 할 입장은 못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천박하고 화교들은 교활하다며 거품을 물고 비난하는 한국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니까요. 친한 친구를 잘 사귀어 두지 못한 업보라 생각해야죠.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눈 나는 일단 하던 일이나 계속 하자 생각하고 집에서 가지고 나온 노트북을 다시 열심히 두드렸습니다. 서울에서는 현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무쇠인간 마징가 제트 정도로 생각하는지 프로젝트 서류같은 걸 갑자기 부탁받아 날밤 까면서 만들어 본 게 이제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자카르타에 폭동이 나고 내가 불침번으로 불려나간다고 해서 미룰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지요.
어디선가 나타난 나이든 군인이 통장과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지금 군인들이 자티느가라(jatinegara)역에 와 있는데 곧 시내로 들어올 거라는 둥, 2개 분대만 이쪽 주택단지로 보내 달라는 둥, 뿔로가둥(Pulo Gadung)을 지나 오려면 폭도들하고 부딪혀야 되니 좀 어렵다는 둥 이러다가 봉투 하나가 슬그머니 군인 주머니에 들어가니 갑자기 군인이 무전기 들고 소리쳐 댑니다.
"수금 완료. 따만모데른에 2개 분대 출동시켜."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회의장 사람들 사이에 안도의 한숨이 퍼지고요.
군인이 돌아가자고 한참 후 연장들을 들고 회의장을 나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젠 표정도 가벼워 보입니다. 이젠 순찰을 돌 차례인 거죠. 그러자 아까 5월에 풀장 어쩌고 했던 옆의 화교가 나한테 말을 겁니다.
"우리도 나중에 론다(ronda) 돌아야 되는데 뭐, 무기는 안가져 오셨수?"
사실 나도 무기를 들고 올 생각 안해본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집에 있는 무기라는 게 식칼이나 포크, 뭐 이런거 밖에 없는데 본국에서 군복무 제대로 마친 한국인이 인도네시아에서 불침번 선다며 시퍼렇게 날선 식칼 들고 나오는 꼴은 상상만 해도 너무 삭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태권도가 좀 되니까... 뭐, 이런 식으로 뻥을 치려 해도 쌍절곤 들고 있는 아저씨들 앞에서는 아무래도 캥기고요. 그래서 준비물 못챙겨와 검사받는 초등학생처럼 대충 둘러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게….이래봬도…꽤 무겁거든요…그래서….한방 맞으면….머리 깨지걸랑요."
당시 처음 나온 메모리 1기가 짜리 싱가폴산 노트북.
실제로 2년 가량 가져 다니는 동안 어깨가 빠질 정도의 육중한 무게를 과시하던것이 사실입니다. 그 노트북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더니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웃으면서 다 뒤집어지더군요. 그리고는 새벽 세시부터 순찰을 도는 동안에도 그들은 내 옆구리에 낀 노트북을 미더워 마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그 후로도 한동안 매주 같은 요일에 회의장에서 불침번을 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노트북을 들고 나가기는 좀 미안했어요. 그래서 무기 얘기를 우리 가정부에게 지나가는 말로 했었는데 어느 날인가는 국기게양대로 쓰던 대나무봉을 반으로 잘라 시키지도 않은 죽창을 만들어 놓았더군요. 암만 그래도 한국인 자존심이 있지. 남들은 쌍절곤에 중국검인데 내가 옥쇄를 각오한 일본군처럼 죽창을 들고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시장에 가서 작은 일본도를 하나 샀어요. 길이 50cm, 폭 2cm 정도인데 손잡이에 술까지 달려있는 예쁜 검이었죠. 당연히 날은 서 있지 않았습니다. 날을 세울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부엌에서 밤늦게 그윽~그윽~ 칼을 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스스로 소름이 돋았어요.
자카르타의 상황이 진정된 얼마 후부터 그 칼은 샀을 때의 상태 그대로 지금도 장롱 위에 올려져 있지요. 그리고 그거 날 갈아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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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 군은 부대의 전투력을 민간인에게 판매하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98년도 5월 폭동 당시에 끌라빠가딩 지역에 폭도가 들어오지 못한 것은 각 진입로마다 배치된 중무장한 군인들의 서슬이 시퍼렇었기 때문이었죠. 당시 Jl Printis 쪽에서 진입하는 폭도들에게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을 보았다는 한 화교친구의 얘기를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첫 불침번을 선 다음 날 저희 주택단지 진입로에는 A형 텐트들이 10개 정도 쳐져 있었고 소총을 든 군인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돈을 잘 버는 편인 듯 하고 고급장교 중에는 그래서인지 가난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이등병으로 입대하려 해도 시험이 까다로울 뿐더러 최종합격이 되기 위해서는 1인당 1천 5백만 루피아(이게 대략 2000년대 초반가격 - 약 1백50만원) 정도의 권리금을 주어야 합니다. 경찰이나 공무원의 경우에도 크게 다를 바 없고요. 그것이 인도네시아 공무원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철저한 부패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새 글을 써올릴 여유가 없어 헌 글로 대체함을 양지바랍니다.^^
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5.♡.203.138 작성일
글이 길어지면 입력이 다 안되는 모양이네요. 본의 아니게 제가 1빠를...^^
뒷 부분 이어붙입니다.
마니또님의 댓글
마니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1.♡.105.33 작성일
안녕하세요. Beautician 님,
98년도 사건.. 벌써 17년전 일이네요...
긴 글도 게재할 수 있도록 수정해 드리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5.♡.203.138 작성일
"Polisi harus cari tahu siapa pelakunya. Kalau kagak, kami serang balik MOI. Harus ada itu pelakunya," ucap Hadi. (“경찰이 가해자를 잡아 내야 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린 모이 몰에 다시 쳐들어갈 겁니다”라고 하디는 말했다.) – Kompas 기사 발췌
사건 다음 날인 5월 30일 아침 경찰은 총 30여명을 체포했고 이중 FBR 조직원 9명과 경비원 3명을 입건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외에도 29일 폭력사태의 적극가담자와 실제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FBR 측 용의자들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경비원들의 프로답지 못한 대응과 그로 인해 MOI 몰의 고객들과 역내 아파트 주민들이 공포에 떠는 등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경찰이 경비원을 입건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찰이 FBR을 적극적으로 수사해 벌하기보다는 그들의 요구를 일정부분 받아들여 타협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의 경찰이나 경비원들이 결코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 특히 경찰의 경우엔 우리의 안전을 오히려 위협하기 쉽다는 것을 그 동안의 경험을 잘 알고 있지만 원칙을 지키고 주민들과 고객들을 지키려 한 쪽을, 그것도 압도적인 수적 수세에서도 나름대로 할 일을 하려 했던 경비원들을 벌하는 것은 앞으로 MOI는 물론 자카르타 어디에서든 FBR이나 암본깡패들이나 FPI나, 마두라 조폭들이 우리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이 왔을 때 경비원들이 몸을 던져 잡디스크립션에 따른 자기 책임을 다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즉, 우리가 알아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도 듭니다.
인터뷰에 응한 경비원들은 저렇게 얘기를 했지만 그들은 그날, 정말 자기 책무를 다했을까요?
29일날 저녁 무렵 MOI 아파트의 한국인들 사이에선 이런 멘션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학교 행사 있어서 지금막 모이 게이트C로 들어왔는데 삿밤 한명도 없더군요.
완전 개방되어 있었어요. 경찰도 못봤구요.
퇴근하는 기사 말로는 지하에도 삿밤 아무도 없다고 다들 퇴근했다고 하더라고 ...
그들의 안전 역시 중요한 게 사실이긴 하지만 입주민으로선 살짝 좀 당황스러웠어요.
게이트A 앞에 경찰.경찰차 바리게이트 치고 대기 중입니다.
지금 막 들어오다 확인했어요.
모이 로비1.2 경비 한명도 안보입니다.
그 경비들 다 어디로갔는지?
실상 MOI의 경비들을 1998년 따만모데른의 경비들처럼 그날 밤 모두 도망쳤던 것입니다.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무리 인지상정이라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이 닥쳐왔을 때 똑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되는 것을 보면서 인도네시아란 나라, 또 인도네시아 사람들에 대한 회의가 또다시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2015.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