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 맞불 지피시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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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2.♡.38.253) 작성일17-01-21 15:33 조회16,621회 댓글12건본문
사람 마음 참 간사한 겁니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매일 차려 주던 밥상 한 번이라도 늦으면 세상이 날 버리기라도 한 듯 마구 짜증을 부리곤 했는데 이제 많은 세월 지나 해외에 나와 살면서 일주일에 한 번 꼭 드려야지 맘 먹던 안부전화는 이 주일, 삼 주일씩 빠뜨리곤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젤 좋아하는 둘째 아들이에요!”
게다가 전화 드리려면 통화 중이거나 전화를 받지 않아 통화 인터벌은 점점 더 벌어집니다. 그래서 아버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니 반갑기 한량 없어 맘에도 없는 소리가 먼저 튀어나왔습니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던 건 당연히 장남인 내 형이었고 지금은 가업을 이어 목사를 달고 그 위에 대령 계급장까지 단 군목, 내 동생일 게 뻔한데 말입니다.
“야아, 네 목소리 밝은 거 들으니 궁금하던 게 다 풀려 기분이 너무 좋다.”
물론 아버지가 옛날부터 이런 분은 아니었어요. 어린 시절엔 얼굴 보기 힘들 정도로 사업에 바쁘셨고 한동안은 사업이 부도가 나 도망 다니느라 바쁘셨습니다. 6.25 전쟁 끝나고 신학교 나와 접어들었던 목회자의 길에서 벗어나 수십 년 건설업 현장을 뛰어 다니시다 뒤늦게 다시 원래의 트랙으로 돌아가 목사안수를 받은 후엔 준엄한 목사님이셨는데 은퇴한 지 오래 된 원로목사님이 되신 후엔 날로 점점 더 다정다감한 할아버지가 되어 가십니다.
“요즘 한국은 아직 많이 춥죠? 옷 단단히 입고 다니시는 거죠?”
“어, 그렇지 않아도 아까 막 아침 먹고 이제 너희 엄마랑 같이 나가려고 옷 단단히 껴입는 중이다.”
“어디 나가세요?”
“그래. 오늘은 광화문 나가 좀 돌아다니다가 엄마랑 점심 먹고 들어오려고 그런다.”
오늘 토요일인데?
“광화문에 나가요? 요즘도 거기서 매주 토요일 촛불집회 하던데 아버지가 거긴 웬일로 가세요? 드디어 당적 파서 옮기시게요?
“예끼, 이눔아!”
그 연세의 어르신들이 대부분 그렇듯 아버지는 평생 골수 여당 지지자였습니다. 아버지가 맞불을 들면 들었지 촛불 들고 대통령 하야를 외치실 분이 아니죠.
“그거 잘못 좀 한 걸 가지고 몇 번씩이나 사과를 해도 여자라고 너무 우습게 보는 거야. 사람들이 그러면 안돼!”
그럼 그렇지.
“아버지, 솔직히 내가 그 부분에서 아버지랑 뜻을 같이 하긴 어렵지만 평생 변치 않는 아버지 굳은 심지는 정말 존경해요.”
“하하하! 그래서 반대집회에 가는 거다.”
아니 이 분이 기어이!
“엄마 모시고 맞불집회 가시려고? 거기 분위기 안 좋던데 왜 그러세요?”
“사람이 자기 주장을 하고 살아야 하는 거야.”
“아이고. 아버지.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난 맞다고 봐. 수십만 명 나와 떠든다고 해서 그게 다 옳은 소리 아니다. 그거 다 빨갱이들 하는 소리야.
6.25 당시 강경에서 인민군들의 학살현장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아버지가 빨갱이를 혐오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국정원 출신도 아니고 군대 빼고는 공무원이 된 적도 없던 분이 아무튼 평생을 반공정신에 입각해 살아오셨는데 내가 듣기 싫다고 해서 아버지 신념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 고교동창회 단톡방에서도 한인회 직책까지 맡았던 노선배가 ‘좌빨들’ 운운하며 박사모 집회 참석사진을 올리자 후배들이 우수수 단톡방을 탈퇴했는데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한바탕 정치논쟁을 하고서 열 내며 전화를 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접근방법을 달리 해야죠.
“아버지, 나간다면 막을 순 없지만 어차피 나갈 거 돈을 꼭 받아 오세요.”
“거기 나가면 누가 돈 준다디?”
“근처 할아버지들한테 물어봐요. 아마 롱코트에 검정색 선글라스 낀 사람이 골목에서 오라고 손짓할 거야. 대통령 위해 몸바치는데 밥값은 받아야죠.”
“난 돈도 필요 없다.”
아오, 청렴결백 하셔라.
“그럼 준비물은 가져가요?”
“준비물? 무슨 준비물? 태극기?”
“일단 할아버지들은 군복을 입어야 돼.”
“뭐? 군복?”
“그리고 가스통도 하나 들고 가야 되거든. 프로판 가스통 큰 거. 요즘 다 도시가스라 그거 구하기 힘든데 어떡해요?”
“뭔 소린지 모르겠다!”
“엄마 모시고 간다면서 한 손엔 엄마 손 잡고 다른 한 손엔 가스통 들고. 이제 아버지 연세에 그거 하기 힘들다니깐.”
“군복이야 막내한테 하나 구해 놓으라 하면 되지. 가스통은 부르스타 부탄가스통은 안되냐?”
“안돼. 아버지!”
농담으로 시작한 건데 아버지 반응이 너무 진지합니다.
“네 엄마 모시고 가는 거라 어차피 조심해 갈 테니 네가 걱정할 필요 없다.”
“거기 가면 조심이 안된다니까요.”
“너도 그러는 거 아니다. 다들 어째 생각들이 삐딱해서 말이지. 아무리 요즘 세대라도 애국심을 가져야지.”
“아이, 애국심이야 기본이죠. 그냥 아버지가 준비물 제대로 안가지고 갔다가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이런 사람들한테 따돌림 당할까 봐 그러는 거지 뭐.”
“그럼 가스통부터 하나 사서 들고 가마.”
“아니, 아버지, 내 말 뜻은 말이지.”
전화기 건너편에서 박장대소가 터집니다.
“넌 항상 너무 진지한 게 문제야. 내가 설마 엄마 모시고 거길 가겠니?”
아니, 이 아버지가. 진지한 건 나였답니다.
“너야말로 신소리 그만하고 너희 엄마랑 얘기나 좀 해 봐라. 엄마랑 자주 얘기해야 돼.”
“넵!”
수화기 건너편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엄마, 엄마가 젤 좋아하는 둘째 아들이야!”
“아~, 그래, 오래칸 만이다. 잘 지내니?”
만약 내가 ‘둘째 아들입니다’라고 말했다면 엄마는 ‘그러세요? 오랜만입니다’라고 말했을 게 뻔합니다. 아무튼 오늘도 늘 하던 루틴을 우선 반복해야 합니다.
“엄마, 여긴 인도네시아야.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여섯 시간 반. 멀리 떨어져 지낸 지 벌써 20년 됐어요. 여기서 수현엄마랑 잘 지내는 중이고 애들은 다 대학 마치고 싱가폴에서 직장 다녀. 엄마 자손들이 지금 세계로 쭉쭉 벗어나가는 중이야.”
“그래, 다들 잘 있다니 다행이다.”
“다 엄마 덕이지 뭐. 게다가 우리 지현이는 나나 지 엄마는 안 닮고 엄마를 쏙 빼 닮았어. 겁나게 예쁘게 생겼거든. 걔 볼 때마다 엄마 생각 나요.”
“아, 그래요?”
내가 존대말로 끝내는 순간 엄마도 존대말로 바뀝니다. 사실 내가 지금 떠드는 수다는 본가에 전화할 때마다 늘 하는 얘기입니다. 단지 엄만 그걸 기억하지 못할 뿐이죠. 그래서 늘 새롭습니다. 물론 전에 했던 얘기만 기억 못하는 게 아닙니다. 내 말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 즉 내 아내, 우리 아이들은 물론, 엄마는 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치매가 점점 깊어가고 있거든요.
“언젠가 우리 아이들 다 데리고 한번 한국 갈 테니까 그때 잘 봐봐요. 지현이는 정말로 엄마 판박이라니까.”
“그래, 그래. 빨리 만났으면 좋겠다.”
난 엄마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보통 치매에 걸리면 기억력이 떨어져 좌충우돌 이런저런 사고를 치는 것뿐 아니라 비정상적 행동을 하기도 하고 쉽게 화를 내고 험한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죠. 하지만 엄마는 자기가 기억을 못해서 혹시 상대방을 마음 아프게 할까봐 늘 걱정하십니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 당신으로서는 사실상 금시초문인 전화기 너머의 낯선 남자인 나에게 최선을 다해 맞장구를 쳐주는 것입니다. 내가 살갑게 말할 수록 엄마도 살갑게 반응합니다. 기본적으로 엄마는 치매에 걸린 후에도 예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친절한 여자입니다.
“오늘 아버지랑 밖에 나간다는데 옷을 단단히 챙겨 입었어?”
“어, 그러니? 아버지가 말씀 안하셨는데. 오늘 다른 일정이 있는지도 좀 확인해 봐야 하고. 오늘 어머니가 오신다고 하셨는데 어쩌면 집에서 기다려야 할지...”
돌아가신 지 오래 되신 외할머니가 엄마에겐 아직도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오실 듯 생생하신 거죠. 난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아까부터 나가자고 보채는데 아무 말도 안 했단다. 허허.”
전화기 건너의 목소리는 다시 아버지로 바뀌었습니다. 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지. 아무튼 아들들이 아버지 덕 많이 봐요. 아버지가 그렇게 엄마 잘 챙기시니 아버지 믿고 나도 자카르타에서 그나마 맘 편히 지내는 거죠. 고마워요.”
“옛날에 내가 엄마 속 많이 썩였으니 내가 이제 엄마 돌보는 거 당연한 일이다. 너희들이 고마워할 일이 아니다.”
“아버지야 그렇게 말하시겠지만, 암튼 오늘 엄마 잘 모시고 다녀오세요. 길조심, 차조심 하시고.”
“걱정 마라. 내가 엄마 산책시켜 드리고 점심은 맛있는 짜장면 대접해 드리려 한다.”
한편으론 마음이 짠해 옵니다.
“아버지도 딸이 하나 있었어야 해.”
아내가 장모님께, 그리고 본가 부모님께 하는 걸 보면 늘 드는 생각입니다. 처남들도 나름 노력하겠지만 아내는 장모님의 가장 살가운 친구입니다. 하지만 분가한 아들들은 부모에겐 정말 쓸모 없는 인간들이 되곤 합니다.
"너희들만으로 이미 분에 넘치게 행복하다."
아버지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아들이 할 말을 턱턱 막아버리곤 합니다. 요즘 무슨 명대사 책같은 거 읽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래요. 아버지. 암튼 한국 가면 나도 한 턱 쏠게요.”
사실 이미 노인이 된 당신이 치매가 깊어가는 아내를 홀로 돌보는 게 쉬울 리 없습니다. 하지만 옛날 사람답게 아버지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참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더 없이 믿음직스럽고 그렇습니다.
“그 맞불집회 하는 시청 근처에 좋은 식당 소개받았는데.”
“아, 아버지, 정말 거기 가시려고?”
“지나가다 그 사람들 마주치면 잠깐 태극기 좀 흔들어 주고 가지 뭐.”
“아니, 아버지. 군복하고 가스통 없으면 못 간다니까.”
“대한민국은 정치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한편으론 더 없이 걱정되고 위태롭습니다.
“아버지, 다음 달에 한국 가게 되면 내가 거기 모셔다 드릴게. 뭐, 저게 금방 끝나겠어요? 그러니 그땐 내가 군복입고 내가 가스통 들고 갈 테니까 아버진 엄마 손만 잘 잡고 다니시면 돼. 오늘은 안돼요. 안돼.”
“그래, 그러자꾸나.”
전화를 끊는 아버지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전화를 끊을 때마다 늘 아쉽습니다. 묵묵히 엄마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며 노년을 보내는 아버지의 노고와, 다음에 전화할 때 또 다시 모든 것을 잊고 계실 엄마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도 오늘처럼 정치색 짙은 주제로 아버지와 즐겁게 얘기할 수 있으리라곤 전에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끝>
댓글목록
뿔로마스님의 댓글
뿔로마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5.♡.65.218 작성일
새해 모두 Gong Xi Fat Cai 하시고, Beautician님은 확실히 Fat Cai 하실 겁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글 감사 드립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그리워 지네요.. ㅠ.ㅠ
죠죠님의 댓글
죠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4.♡.232.22 작성일Pesona77님의 댓글
Pesona77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1.♡.78.193 작성일
Beautician님~
늘 좋은글 감사드리고~~~ 올해도 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202.♡.38.14 작성일
넵. 더불어 좀 늦기도 하고 며칠 빠르기도 하지만 Pesona 77 님도, 여기 계신 다른 모든 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Gong Xi Fat Cai.
정말 fat cai 해야 돼요.^^
Vitus님의 댓글
Vit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4.♡.26.113 작성일
입술에 웃음 가득 읽어 내려가다 미간에 살짝 힘 들어가는 구절 때문에 댓글이라는 것도 달아보네요.^^
좋은 글엔 좋은 댓글만...그것도 힘든지,,,
항상 인도웹 열어 Beautician님 아이디 보이면 Title 상관없이 빼먹지 않고 눈팅하는 일인입니다.
정보 가득한 글에서 많은 것 배워가고 있습니다.
악플에 생채기 나실까 우려되어 응원차 댓글답니다.
하긴, Beautician님 글 내공정도면, 무시하는 내공도 상당하실 듯^^
힘 내시구요 좋은 하루 되세요~~
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202.♡.38.14 작성일
감사합니다.
힘이 막 나요^^
이젠님의 댓글
이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218.♡.137.172 작성일
니 부모님 하곤 틀리네..부모님좀 따라 해라.
정신 차리기 바람니다. 그글빨 가지고 애국좀 하시지...
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202.♡.38.253 작성일같이 정신 한번 차려 볼까요?
권토중래님의 댓글
권토중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10.♡.59.200 작성일
안녕하세요? 뷰티션님께서 오랫만에 글 올려 주셔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빙그레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따뜻한 내용의 글이지만 이역만리에서 부모님을 자주 뵙지 못해서 슬픈 생각도 드는게 사실입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202.♡.38.14 작성일권토중래님도 반갑습니다. 자주 부모님 찾아뵈야 하는데 맘 내킬 때 비행기 타고 한국갈 수 있는 분들과는 달리 여러가지 상황으로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입장에 있는 많은 교민분들을 함께 응원해요.
mango님의 댓글
mango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180.♡.211.198 작성일
부모님 두분다 세상을 하직하신 저에게는 더욱더 돌아가신 두분을 생각나게 하는구요...
어버이 연합,박사모 같은 모임에 참석 하시는 어르신 보면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길이 없었는데....
부모님의 안위를 걱정하는 자식의 간절한 마음에 제 가슴 한켠이 아려오네요. 감동을 주는 글 잘 읽었습니다.
beautician님의 댓글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아이피 202.♡.38.253 작성일
계실 때 잘해 드려야 되는 거 잘 알면서 현실에선 왜 그게 생각처럼 여의치 않은지 모르겠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